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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왜 하는가
게시물ID : humorbest_4821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보전네홍
추천 : 135
조회수 : 12610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6/06 23:06:58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6/06 10:50:35
소년문화(Boy's culture)라는 게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대나무 숲에 숨어서 비밀기지를 만든다던가
친구들과 곤충채집을 하면서 해질 때까지 잠자리채를 들고 놀아보신 적 있나요.
자전거를 타고 다른 친구들과 경주를 해본 적은 있으신가요.
소년문화에서는 집(dom)을 두 가지로 구분해요.
부모님이 존재하고 사회적 규율을 배워나가는 가정으로서의 집과,
내가 주도자가 되어서 내가 개척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
그러니까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 벗어나서 친구들과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요.
비밀기지라던지 곤충채집같은 건 후자의 집에 속하겠죠.

과거에는, 어른들이 소년문화의 집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단지 밥먹을 때가 되면 "철수야 밥먹어라"하고 놀이터에 찾아갔을 뿐.
거기서 그들이 무엇을 이루고 친구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죠.
다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본대로 사회규범을 이해한 방식을 공유합니다.
예를 들면 소꿉놀이를 하면서
실제 어른들의 방해없이 그들 나름대로 규범을 해석하고 공유하죠.
어른이 보기에는 실제와 다르거나 사실과 틀린 부분도 많지만
그걸 방해하거나 즉시 잡아주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왜냐, 그걸 지켜보고 개입할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아이들끼리 배우는 규범에는 집단교류, 친구를 만들고 그들을 이해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다시 집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금 아이들에게는 후자의 집의 역할을 해줄 공간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후자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또한 그들의 부모님과의 가정에서부터 (실물)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편한대로 이 땅을 부동산으로 제도질해서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라는 콩알만한 공간을 내어주고
그마저도 시소, 그네, 미끄럼틀 같은 '그들이 만든' 놀이기구를 사용하길 원합니다.
자전거 경주가 가능한 공간은 아파트 주차장이나 도로처럼 포장이 된 길 뿐이고
그건 어른들이 자동차를 타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그걸 이용하는 건 위험천만한 짓이죠.
하지만 아무도 아파트에 아이들을 위한 자전거 경주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ㅡ 그건 어른들이 이용하는 장소가 아니니 공간낭비니까요.
그래서 머나먼 곳에 특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놓고
주말이나 특별한 날 생색 내듯이 아이들을 데려갑니다.

이런 분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져서
이제 아이들은 부모님이 정한 놀이학교에서 부모님이 지켜보는 아래 놀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벗어나 아이들끼리 놀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더 아이들을 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회가 흉흉하기 때문에 과보호가 더 심해집니다.
소년문화는, 사실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들은 가정적이고 안정을 추구하지만
소년은 그러한 어머니의 문화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가정의 집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떨어진 공간이 없고 
또래친구들과 교류하기 힘들기 때문에
소년문화를 실행할 공간이 없다는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어떻게든 소년공간을 마련하거나 또는 소년공간을 포기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전제가 무척 길었는데, 소년문화는 결국 게임공간에서 실현됩니다.
그곳에는 또래들이 있고 부모님이 없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친구들과 교류하는 법을 배우고
실물경제가 아닌 모방된 세계에서 앞으로 사는 데 필요한 경험을 배웁니다.
얼음땡에서 얼음인 상태에서 멋대로 움직이다간 제외를 당하듯이
남들과 함께 정한 규칙을 어기면 타인에게 배척당한다는 걸 알고
살구에서 내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팀이 잘 받쳐주면 이기듯이
팀일 때는 운명공동체로서 협력해야 이길 수 있다는 걸 배웁니다.
지금은 그걸 게임에서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의 
"COMPLETE FREEDOM OF MOVEMENT": VIDEO GAMES AS GENDERED PLAY SPACES 
라는 글을 제 임의로 각색해서 쓴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사라진 소년들의 공간'이 게임으로 재현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갓 어른이된 아이들의 눈에 '현실은 게임과 같구나'란 생각이 드는 것은
그들이 소년문화를 게임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택은 게임에서의 직업 전직과 같이 돌이킬 수 없고
그것이 곧 앞으로 사회를 살아갈 때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구나,
정석대로 스킬을 쌓지 않으면 레벨이 높아도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듯
학점이나 토익점수, 자격증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세상 살기 힘들구나.
문제는 소년문화를 게임에서 보내고 게임을 통해 세상보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극단적인 해석까지 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왜 게임에서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지? 라던가
현질하는 녀석들이 위력을 발휘하듯 부모 잘만난 녀석들을 이길 수 없구나 같은 생각들.
이게 소년문화가 게임에서 재현되면서 생긴 가장 큰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헨리 젠킨스는 게임규칙이 아이들끼리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어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게임을 한다는 건, 현실에 대한 도피가 아닙니다.
사라진 소년문화와 소년공간에 대한 갈망이 일으킨 행동이지요.
게임을 안하면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 또래들이 몰려있을까요.
과거에는 강이며 들에 모여 즐겁게 놀기만 하면 됐었는데,
지금은 학교 점심시간, 학원 쉬는시간이 아니면 친구끼리 놀기 힘들고
만나서 농구공이라도 가지고 놀려면 동시에 시간을 내기도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소년문화를 게임을 통해 겪은 사람들은 게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땐 나뭇가지만 있으면 자치기도 하고 재미있게 놀았는데"라는 말처럼
"바람의 나라에서 다람쥐 잡을 때가 좋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지금 게임을 규제하려고 하는 어른들이 게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어릴 때의 소년문화는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대상에 대한 공포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같은 게임을 어린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두루 즐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또래끼리 어울려 놀면서 차츰 사회를 배워나가던 것이
지금은 사회규범을 습득중인 사람과 완전히 규범화된 사람이 같이 놀게 된 것이죠.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어른이 와서
이것은 규범과 이게 같고 저게 다르고 잔소리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아이들이 그들의 소년문화 속에서 스스로 배워나가기도 전에
이제 게임에서조차 소년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됩니다.
이건 게임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의 발달로 생긴 문제이기도 하지요.
이제 또래끼리의 공간이란 건 폐쇄형 커뮤니티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게임에서 어른을 배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돈이 되는 일에 투자가 일어나고 돈이 되는 곳에 공간이 할애되기 때문인지
지금의 어른 문화는 술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술을 팔고 돈이 있으니 그걸 기반으로 부동산을 사들이고 또 술을 팔고의 반복이죠.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어른들 스스로 이러한 문화를 바꿔나가기 위해
운동이나 여행(출사포함) 같은 동호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른들 역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퇴근하고 9시부터 12시까지밖에 짬이 안 나는 상황에서
또래들과 놀자니 운동이나 여행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너무 크고
그나마 또래가 많은 취미인 게임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게임은 숙취도 없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임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조절한다는 전제 하에서 좋은 취미입니다.)

시간이 아까운데 그 시간에 토익이나 하고 학점이나 더 올리지 하는 문제는
좀더 넓게 생각하면 어차피 죽는데 뭐하러 사냐는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사람이 반드시 순간을 죽이고 미래만을 위해 살아야할 이유도 없고
마찬가지로 미래를 버리고 순간만을 위해 살아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게 비율을 조절하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지만
저는 순간도 소중하고 미래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보는 '게임을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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