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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민간인학살 사건
게시물ID : history_79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새누리매국노
추천 : 14
조회수 : 82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3/06 11:49:21

신문에 안나오는 기사]문경 민간인학살

 

1949년 전쟁 때도 아닌 평시에 주민들이 국군을 환영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산골마을을 완전히 불태우고 주민 86명을 무참히 살해한 경북 문경 산북면 석달동 민간인학살사건.

더욱이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은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이었다.

당시 살육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생존자와 유족들이 24일 오전 11시 한자리에 모여 제57주기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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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후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간난아기들까지 무참히 학살됐다. 이런 아이들은 '朴아기' '蔡아기' 등의 이름으로 적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유족회 채의진 회장과 생존자·유족들을 비롯, 신국환 국회의원(국민중심당)과 윤정길 문경시 부시장, 탁대학 문경시의회 의장과 문경출신 도의원 등이 참석했으며, 임종인 국회의원(열린우리당)도 추도사를 보냈다.

또 홍순권 동아대 교수와 정근식 서울대 교수, 도진순 창원대 교수 등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회원들과 민간인학살 범국민위원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관계자들도 참석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불교인권위원회 진관 스님과 평화통일시민연대 김승자 공동대표는 추모시를 낭독했다.





이에 앞서 23일 문경문화원에서 열린 증언대회에서 사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채홍빈(현재 71세)씨와 채홍연(68)씨가 살육의 현장에서 목격한 생생한 경험담을 증언하기도 했다.

60 년대 이후 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시사저널> 정희상 기자는 '문경 학살사건의 실태와 과제'라는 제목의 발표문을 통해 "이 사건은 그 자체의 범죄성도 문제이지만,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정부가 그 진상을 알고도 철저히 은폐한 뒤 '공비들의 소행'으로 둔갑시켰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면서 "이후 미군 극동군사령부의 문서들을 통해서도 이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은 없었다"라고 밝혔다.

문경 석달동 민간인학살사건이란?

문경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12월 24일 정오께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 남녀노소 86명이 근처를 지나가던 국군 정찰부대에 집단학살당한 사건이다.





시사저널 정희상 전문기자가 문경 석달동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가 해부대는 당시 문경 점촌 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제 3사단(사단장 송호성) 25연대(연대장 유희준) 3대대 7중대(중대장 유웅철) 취하 2개 소대였다. 학살을 직접 자행한 소대는 2소대(인솔 책임자 안택효 중사)와 3소대(인솔 책임자 유진규 소위) 병력 72명이었다. 당시 무차별 주민학살로 희생된 마을 주민은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여 기에는 젖먹이 아이 3명과 겨울방학식을 마치고 하교하던 초등학생 9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부대는 이어 400년간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이 마을 가옥 27채를 불살라버려 마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상당하는 바람에 확인사살을 면한 12명의 중상자들은 점촌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뒤 일부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

사 건의 발단은 순전히 현지 부대 인솔자의 오판과 정찰 임무만 수행하라는 상부 명령 무시였다. 즉 가해부대는 순찰만 돌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군부대가 들러도 환영해주지 않는다고 여긴 마을 분위기에 분개해 무차별 인간사냥을 벌인 것이다.

사 건 당시 출타중이거나 무참한 인간 살육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마을 주민은 60여명이었다. 이들은 사건후 사라진 마을을 영영 등지기도 했고, 일부는 없어진 마을 터 아래에 집을 지어 새로 마을을 형성한 뒤 지금까지 한 맺힌 세월을 살고 있다.

일 가족이 전멸해 대가 끊긴 집안도 6가구에 이르렀으며 생존자들 역시 대부분이 일가족을 잃고 한두명씩 살아남은 탓에 이후 이들의 인생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유족회를 결성해 정부에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 쿠테타 직후 유족대표들이 포고령 위반죄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나서는 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사건에 대해 은폐를 강요당한 채 피맺힌 가슴을 안고 살아왔다.

지 난 1989년 유족회를 결성한 피학살 유족들은 매해 12월 24일 사건 현장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국회와 청와대, 총리실, 국방부 등을 상대로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을 여러번 제출하며 학살사건의 진상규명,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정희상(시사저널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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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위령제 행사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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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난 채홍빈(왼쪽)씨와 채의진 유족회장(가운데), 채홍연씨(오른쪽)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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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살육 참극이 일어났던 현장 인근 토굴에는 아직도 당시 희생자의 유골이 남아 있다. 일가족 모두가 몰살돼 후손이 끊긴 희생자의 유골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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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제를 마친 후 참석자들이 마을 앞마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
http://cafe.daum.net/kokoin





글에 나오는 사단장 송호성은, 승진하여 육군총사령관 송호성이 된거 맞나요?

제주 4.3학살 사건도 송호성이가 맡아서 학살했는데. 그 참..

이런 놈들이 떵떵거리며 천수를 누리며 산다는게 정상적인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이런식으로 몰살시킨 마을이 한두개가 아니라던데... 물론 공비니 인민군이 그랬다고 소문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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