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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대리등록02 / 산문 - 무제
게시물ID : readers_48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링고★
추천 : 0
조회수 : 52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12:17:59

미리 공지한 내용중 개인사정으로 직접 등록이 여의치 않은 분들을 위한 대리등록 서비스입니다. ( [email protected] 님의 작품 )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피부에 스미는 감촉, 코 안으로 퍼져가는 냄새. 모두 예전의 그것이었다. 죽어있던 시간이 다시 살아나고, 모든 감각들이 온전히 느껴지는 순간 그녀는 마침내 웃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두려웠지만 편안했고, 포근했지만 차가웠다. 눈이 부시도록 어두웠다.

 

 “왜 그렇게 거기에 목을 매는 거야?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간다는 건지 원.”

 “내가 걱정되는구나? 왜? 가지 말까? 니가 가지 말라면 안 갈 수도 있어.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해 봐.”

 “됐어. 걱정은 무슨. 본인이 가고 싶다는데 내가 무슨 명목으로 그걸 막겠어.”

 “야, 이게 뭐라고 자존심이냐. 걱정된다고 그 말 한 번 하는 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간 여자애가 로맨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 이번에 내가 갖다오면서 로맨스 좀 찾아와야겠어.”

 “어쩌라고. 태생부터 이런 걸. 이건 어찌 할 수가 없어.”

 “히히. 아무튼, 걱정 마. 금방 다녀올게.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다녀올게.”

 그가 말했고, 웃었고, 그녀를 잠깐 안아주더니 곧 비행기에 올랐다. 벌써 다섯 번째다.

그가 그녀 말고 미쳐 사는 또 다른 여인. ‘수확의 여신’

 그는 이미 세 번째 등정 때 정상에 올랐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산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늘 새로운, 묘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의 인생의 한 귀퉁이가 되어 버린 것일까. 동네 뒷산을 오르는 걸로도 벅찬 그녀가 그런 그를 이해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물론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 이해해보려는 마음도 먹지 않았다. 그게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이었다.

 

 하루에 몇 발짝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날도 지나고, 눈보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은 날도 지났다. 몇 개의 캠프를 지나 정상에 올랐다. 깃발의 휘날림과 함께 누구는 환성을 질렀고, 더러는 그럴 힘도 없어 주저앉았고, 일부는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환성도 지르지 않았고, 주저앉지도 않았다. 주변의 풍경 따위 처음부터 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눈발을 맞았다.

 

 그녀가 ‘수확의 여신’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소식을 접하고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던 때였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인생의 한 귀퉁이로만 지니고 살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예 인생 전체를 함께 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반대로 그는 그저 인생의 한 귀퉁이로 족했는데, 정작 그녀가 자신의 한 귀퉁이로 그를 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현 듯 그녀는 그를 품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죽은 뒤로 그의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기억만 남기고 모든 것이 지워진 것 같았다. 영화 ‘맨인블랙’에 나오는 기억을 지우는 기계가 생각났다. 차라리 그 기계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게 덜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준비를 했다. 우선 산악 동호회를 찾았다. 주말에는 암벽등반 트레이닝을 받았고, 매주 하루는 시내에 산을 다니며 트레킹을 했다. 바빴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는 그의 생활 자취를 따라 가다보면 순간순간 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서도 느낄 수가 없었다. 기억은 있는데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절절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데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가 떠난 날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다른 등정대원, 셰르파들과 함께였으나 그녀는 늘 혼자였다. 온 몸의 신경을 모두 그를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다만 아침이 왔고 밤이 찾아왔다. 해가 보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떠난 뒤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얼마나 지난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하려해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순간 그녀는 시간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소식을 차가운 전화기로 들었던 그 순간, 그녀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이미 없어졌던 것이다.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시간들을 지나고 지나 지금 그녀는 눈발을 맞으며 서 있다.

 

 ‘어디 있는 거야? 산 구석구석에서 니 흔적을 찾아 다녔는데, 없어. 못 느끼겠어.’

 

 “자, 이제 내려갑시다! 너무 오래 지체했다간 그녀가 우릴 모두 삼켜버릴지도 몰라요.”

 등정대장의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어느 곳에도 그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멍해졌다.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면서 그를 찾아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려가기 위해 발을 돌리는데 뒤에서 그의 숨결이 그녀를 잡았다. 분명히 그의 숨결이다. 예전 유난히 춥던 겨울날 아침,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던 그의 숨결이었다. 차가웠지만 포근했던. 가슴이 덜컥했다. 눈발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피부에 스미는 감촉, 코 안으로 퍼져가는 냄새. 모두 예전의 그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감싸고 있다.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손등 위에는 그의 손이, 오른쪽 쇄골에는 그의 턱이, 차가워진 그녀의 오른쪽 뺨에 그의 왼쪽 뺨의 온기가 스민다. 그녀의 등에서 그의 심장이 뛰고, 귀에는 그의 웃음소리가, 숨소리가.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눈물이 흐른다. 웃음도 난다. 눈물이 진짜인지 웃음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고마워. 니가 떠난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죽어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방금 니 숨결이   죽었던 나를 깨웠어. 평생 깨지 못하고 죽어있으면 어쩌나 생각했어. 드디어 모든 게 살아숨쉬기 시작했어. 고마워.’

 

 됐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녀는 살고 싶었다.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온전히 그를 느낄 수 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안나푸르나 등정 도중에 20대 여성 등반가 한 명이 등정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같이 등정에 임한 등정대장의 말에 의하면 등정대가 정상에 도착하고 얼마 후    갑작스런 눈보라가 불었고, 모든 대원들이 잠시 엎드려 눈보라를 피하고 일어났는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시 수색에 나섰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다음 소식은.....”

 

 등정대장의 소리가 멀어진다. 다른 대원들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온통 하얀 눈 산도 사라진다. 순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둠 속에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에 닿는다. 그의 손길이 그녀를 만지고, 그녀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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