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예전부터 일본의 깊이없는 자유 민주주의적 사고가 넷 우익이 가능하게 된 조건이 되었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타인의 취향이나 목소리에 대해서 관용을 표하는 게 역설적으로 파시즘까지 관용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비판적이었던 것이죠. 즉 전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를 일본 넷 우익을 통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기획은 그렇지 않았죠. 민주주의를 정식화한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의 볼테르의 언명, "난 당신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의 발언의 자유를 위해서 싸워줄 수 있다"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발언의 자유만을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과 싸울 것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PD수첩을 보면 일본 넷 우익의 발언의 자유란 민주주의의 원칙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발언을 공론화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넷 우익들의 발언은 타자(타 민족이나 반대 세력)에 대한 존재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파쇼들임으로, 이들의 그 발언들은 민주주의하에서 범죄로 지각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자체가 이미 비 관용적 사고를하고 있고, 그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게 바로 민주주의의 정식이라는 걸 말이죠.
보통 똘레랑스 즉 관용이라는 말을하고 생각의 차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 관용이란 말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행위를 단지 차이라고 지껄이는 부류들이 있어요. 이 대한민국에서도. 누구들인지 다들 짐작하시라 봅니다. 넷 우익과 일베蟲의 상동성은 너무 많이 알려져 더이상의 지적 통찰은 필요없는 지경에 있지요. 그들이 탄생한 조건도 그렇고 그들이 자기들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싸우는 방식도 똑같습니다. 과연 이런 자들은 관용이란 이름으로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전에 오유 테러질한 것도 그렇고, 일베蟲들은 사고는 물론 행위도 비 관용적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주니 반복 도배로 폭파했던 것도 그렇고, 재작년 계속 되었던 베오베 테러와 게시판 분탕질도 그렇고, 그들은 오유에 와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논쟁을 통해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들의 발언의 장을 폭파 시키고 교란 시키려는 행위를 했습니다. 근래에 대자보들도 그렇죠? 대자보에 대한 일베식 답변은 보수 우파의 프레임을 통해서 멋지게 반론하는 게 아니라, 대자보를 훼손하는 것으로 답변을 했습니다(비록 몇개의 반론 글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 자체가... 대화와 반론이 아니라, 상대가 발언을 할 공간을 없에려는식으로 행위했던 것입니다. 이는 재작년에 극심했던 오유 분탕질과 궤를 같이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에대한 태도를 지적하면 사상의 차이나 다름 따위로 빠져나가려 하죠. 일본 넷 우익과 비슷합니다.
뿐만아니라, 정치 경제적 상황과 행위와 사고들을 보면 넷 우익과 일베蟲들의 상동성은 적지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상대주의의 입장에 숨어서(위 거론한대로 자유 민주주의에 숨어서) 자신의 입장을 자유의 측면에서 정당화한다는 것(현대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반동적 성향), 상당히 냉소주의적인 인터넷 문화에서 파생되었다는 것(2ch와 디시인사이드), 국익이니 국가니 따위의 쇼비니즘적 자위를 위해서 재일이나 전라도(홍어)등의 적을 만들어낸다는 것등이 그렇습니다.
즉 역사적, 맥락적, 내용적 차원에서 넷 우익과 일베의 현상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일베蟲이 친일파다라는 따위의 주장과 다릅니다. 그거야 사실 몇몇 일베蟲들중에 일뽕?을 맞은 애들에게(특히 디시인사이드의 역사 갤러리)만 통용되는 것이고, 실제로 일베가서 검색한 결과 성노예 할머니들에 대한 지지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여하간.. 국가나 인종적 이분법에 기댄 주장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사유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특회나 일베蟲을 단지 낡은 파쇼라고하기엔 마땅치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현대의 어떤 부산물이기 때문이고, 이건 과거의 민주/반 민주라는 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말합니다. 타 싸이트에서 보수 우익 성향의 네티즌들과 토론한바 일베는 단일한 부류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일베란 싸이트의 자극성과 그것이 주는 해방감이 카타르시스, 모종의 은밀한 향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그런 속성(로린이 따위의 단어들)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떻게보면 파쇼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민주주의의 정식으로 비판할 수 없는 영역일 수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계와 전선이 드러나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바로 가장 잘 먹히는 상대주의지요..
상대주의란 포스트모던의 관점이 오히려 역으로 파쇼 반동이라는 결과를 낫게 되었다는 역설적인 한계는, 이와같은 한계와 싸우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알게합니다. 그건 곧, 우리가 늘상 이야기하는 차이와 관용이란 문법의 한계와 싸우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더 근본적인 사유(근대성이나 계몽주의)를 하게끔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유도 마찮가지죠. 일베뿐만 아니라 정상적 보수론자들이 이 오유에서 고사되고 있고, 나아가 지배력 여론을 거스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오유에서 그 반대편에 서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게 됩니다. 심지어 그들은 파쇼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 모든 게 차이와 관용이라는 것의 난점과 한계를 말해주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는 보수든 뭐든 틀렸다고 접근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폐기시키는 한해서 자기의 정치 의식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 정치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단지 차이와 관용은 반대 의견이 비록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여하간 그들 나름대로 의견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수순이고, 역으로 말하자면 윤리적이든 뭐든 상대의 발언(일베蟲이 아니라.. 오유내 지배적 의견과 다른)을 절대적으로 타자화 시키는 선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대로 타자에 의해서 자신의 환상을 가로지르는(횡단하는)일이 차단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베蟲은 나아가 타자를 전체를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삼고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공격적 태도를 정당화하는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PD 수첩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재특회 즉 '재일한국인의 특권을 반대하는 모임'은 위대한 일본 제국이란 전체를 방해하는 이물이란 타자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재일한국인이죠. 근본적으로 오유의 문제도 그렇고, 이것도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입니다. 위상학적으로 접근하자면, 타자를 적대시하는 것, 적대시하지만 주장엔 관용을 보이는 것, 타자란 존재를 적극적으로 나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것(레비나스란 철학자)이 있습니다. 정치의식이란 결국 이와같은 규범들 속에 있는 것이죠.
여하간 일베蟲이나 넷 우익들의 문제들은 그들을 단지 파쇼라고 비판하는 것에서 머물면 안 된다고 봅니다. 또한 친일파 따위의 주장으로 손쉽게 정리해서도 안 되고요. 가장 강력한 비판은 우리 스스로도 그렇고 우리 내부의 전체주의적 분위기(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를 쇄신하고, 무엇이 윤리적으로 옳은가에 대한 끈임없는 자기 성찰을 동반할때만 바르게 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타자가 주는 교훈이고, 재특회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