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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나는 그녀와 눈이 맞았다
게시물ID : readers_49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픈태양
추천 : 2
조회수 : 15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16:16:44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물끄러미 바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제되지 않은 나의 시선이 그녀의 뺨에 닿는 순간 그녀는 미묘한 경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에 집중되어 있던 나의 시선은 그만 그녀의 눈과 마주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갑작스레 태양을 마주한 것 같은 화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에게 말을 걸어주길. 말을 걸어주길. 나는 돌린 고개의 노력이 아쉬워서라도 그녀가 말을 걸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없는 그 곳으로.

 

하지만 이 일은 나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풍겨오는 맵시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검게 흩날리던 머리에서 흘러 나오던 향기가 말해주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의 얼굴을 봤다. 내 얼굴을 본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이 쪽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실체가 되어버린 나의 얼굴을 그녀가 더 확인할 일은 없을 테니까. 덕분에 나는 마음껏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내가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작은 계기가 있었다. 아니, 어떤 계기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그녀와 나는 버스에서 항상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버스, 그리고 같은 자리. 이른 아침의 버스는 항상 그 자리를 그녀에게 헌납했다. 그녀는 항상 나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앉아 보란 듯이 앉아 있곤 했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장면에 나는 일종의 확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나를 유혹할 수는 없다. 그녀는 분명 나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바로 그 날부터 이틀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수치스러움까지 다다르자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 들었다.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들자 한없는 어둠으로 수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빛이 없는 어둠인가 싶었는데 더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대로는 혼자 지옥으로 떨어지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오려면,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의 마음이야 아무려면 어떨까? 적어도 마음을 안다면 이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침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아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다. 며칠 후, 그녀는 모든 것을 잊은 듯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다가 오기를 나의 음성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와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녀가 그곳에 다다른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응어리져 있던 말을 뱉어냈다.

 

카드를 잘못 대셨습니다.”

 

그녀의 왼쪽 볼이 강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뿐 아니라 표정까지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의 고백을 굉장히 불편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있는 힘껏 다시 한 번 말해보려 했지만, 그 다음에는 힘없는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나의 사랑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의 시선이 닿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렇게 아직도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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