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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털보네 B쌀롱 (BGM)
게시물ID : panic_492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21
조회수 : 3461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3/06/03 09:56:57






그녀는 스카치를 록으로 주문했다.
뒤로 묶은 새침한 머리는 분명 오랜 시간 공을 들였으리라. 가슴이 깊게 파인 검정 원피스와 은근한 밤색의 스카프. 은은한 바의 조명에 부딪히며 반짝이는 귀걸이하며, 옅게 보이지만 사실은 장인정신을 발휘해야만 나오는 투명한 화장법하며. 그녀는 꽃뱀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아니면 왜 이 새벽 같은 밤에 혼자서 바를 찾아왔겠는가. 남자들아 날 좀 봐라 하는 원피스를 입고. 남자들아 날 좀 봐라 하는 향수를 뿌리고.
그녀의 스카치 잔에서 아직 물방울이 스미기도 전에 어설픈 남자가 하나 다가왔다. 월급봉투가 좀 두둑해 보이는 말쑥한 느낌의 정장을 입은 남자였으나, 키가 땅딸만 한 것이, 뭇 여성들에게 인기는 없어 뵈는 남자였다. 이마도 좀 넓은 것도 같고.
그녀는 마다하지 않는 듯, 그렇다고 반기지도 않는 듯 홀짝하고 스카치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혼자신가요?”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대꾸가 없다.

웬일일까. 그녀는 1,2분도 아니고 5분이나 그를 방치했다. 꽃뱀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멋쩍어하면서도 그 시간을 버팅기고 있다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제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

그녀가 말했다.
일어서던 남자는 엉거주춤하고 무릎을 구부린 채 멈춰 섰다.
물론 나도 멈춰 섰다. 그녀가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사람이 그인지 나인지 분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물었다.

“저 말씀이신가요?”
“그럼 여기 누가 또 있나요?”

그제서야 여자는 남자를 한 번 돌아봤다. 입 꼬리가 앙칼지게 말려 올라가는 것이 남자를 홀리는 것에 도가 튼 미소처럼 보였다. 역시 꽃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자는 스틱으로 스카치 잔 밑에 달라붙은 얼음을 살살 밀어가며 돌렸다. 남자가 조바심이 났는지, 성급히 물었다. 그래도 좀 배운 사람인지 여유 있는 척 목소리 연기만큼은 일품이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고민이란? 손님들의 궁색한 작업멘트를 들을 때마다 웃음을 삼키는 것이 가장 곤욕스럽다. 어는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간질거리는 말들뿐이기에. 차라리 제임스 본드가 날렸던 ‘그대 눈동자에 건배’ 같은 것이 멋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뒤돌아서서 진열대를 정리하는 척 웃는 얼굴을 감췄다. 여자의 코웃음 소리가 들린 듯하다.

“내기 하실래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곧 “무슨 내기를 말씀하시죠?” 반문했다.

“저는… 3시간 전에 남편을 살해하고 나왔어요. 거실에서 식칼을 휘둘러 죽였죠.”

차분히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떨림이 감지되었다. 손님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좋지 않았으나, 그녀의 뜬금없는 살인고백에 나도 모르게 목이 돌아갔다. 그녀는 고개를 푹하고 숙이고 있었다. 남자는 동공이라도 열린 듯 크게 눈을 뜬 채 여자만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여자의 시선은 스카치 잔에 머물러 있다.

“지금 저희 집 거실에 남편 시체는 엎어져 있을까요? 아니면, 바로 누워있을까요? 내기해요.”

남자를 두드려 깨워줘야 할 것만 같았다. 얼어붙은 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입 속으로 파리가 다섯 마리는 들락거려도 좋을 성 싶었다. 괴기스런 정적이 사라지고 남자는 풋 웃으며 함박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요. 힌트는 없나요?”

재미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을 죽이고 꽃단장을 한 채 늦은 밤 술집에 와있다니. 3시간이라고 말한 시간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피 묻은 손이며 발, 머리카락을 씻어내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외출을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 사람을 죽여 놓고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서 반 대머리인 아저씨와 내기나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나처럼 남자도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힌트…. 저희 남편은 저보다 열아홉 살이 많았어요.”

그게 무슨 힌트야.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턱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뜻을 헤아려보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의 진지함에 오히려 내가 멍청한 것처럼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가? 혹시 열아홉이란 숫자에 초점을 맞춰두고 있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처다 보았다. 남자는 꾸준히 생각 중이라는 듯 턱을 매만졌다. 여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스카치 잔을 손에 쥔 채 휘휘 저었다. 남자는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의 남편은 적어도 50대였겠군요. 그리고 적어도 중소 사업체의 사장이었을 겁니다. 틀립니까?”

여자는 남자를 돌아보더니 그윽한 눈을 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물었다. 남자는 의기양양 대답했다.

“첫눈에 당신이 20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주 어려보이는 외모지만, 당신이 쓰고 있는 라벤다 향 향수는 사실 20대 친구들의 취향과는 판이한 상품이죠. 저는 화장품 업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향수에 대해 아주 모르고 있진 않습니다. 당신이 쓰고 있는 향수는 애초에 30대 주부를 겨냥하는 상품이었어요.”

여자는 실망했다는 듯,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스카치 잔을 내려놓았다.

“억측이네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해요.”
“아니요. 당신은 분명 서른넷에서 서른다섯 살일 겁니다. 당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죠.”

여자는 “이 시계 말인가요?” 하며 남자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시계에 코를 박는 모양세로 시계를 관찰했다. 그리곤 말했다.

“당신은 서른네 살이군요. 좀 전까지는 잘 안 보였어요. 저는 시력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당신 시계에 적혀있는 1979라는 숫자가 1978과 헷갈렸거든요. 그 시계는 한 정 수량을 주문으로만 구입할 수 있는 시계가 아니던가요? 시가가 천 만 원도 넘죠? 시계를 따라 둥그렇게 박혀있는 그 보석은 다이아가 아닙니까? 그런 시계에 1979를 새겼다. 기왕이면 의미 있는 숫자를 새겼을 테니, 그것은 분명 당신이 태어난 년도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틀립니까?”

여자는 팔꿈치를 카운터에 올린 채 양 손을 깍지 끼곤 입을 가렸다. 깊게 웃고 있는 모양새이다. 여자는 “맞아요.” 대답했다. 의외였다. 열아홉 살 차이란 말에 그런 식의 유추를 하다니. 내가 멍청해서 그런 답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저 인기 없어 뵈는 남자가 똑똑한 것일까. 괜한 자격지심이 생겨나는 와중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추리가 무슨 소용이 있죠? 저는 남편의 시체가 엎어져 있을까, 아니면 바로 누웠을까를 물었는데요?”

남자가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물론 관계가 있죠. 당신과 남편의 결혼 생활이 몇 년에 걸쳐 이뤄졌었는지, 그것이 핵심이 될 수 있으니까요.”

나이와 결혼 기간? 또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엿들어도, 엿들어도 궁금증만 증폭되어 갔다. 나는 멍청한가? 울컥하고 가슴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결혼 생활 기간과 저희 남편 시체와는 무슨 관계가 있어요?”

여자는 궁금한 척 물었지만, 남자의 대답이 아주 마음에 흡족한 냥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는 좀 전에 비해 자리가 편해졌는지 표정이 한 결 순해져있었다. 그도 여자와 같이 스카치를 주문했다. 얼음 없는 니트로. 남자는 스카치를 기다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이기면 뭐가 기다리는 거죠?”
“뭐가 좋겠어요? 달라는 건 뭐든 다 드리죠.”

여자의 뭐든 다 드리죠, 말에 남자의 끈적거리는 눈빛이 그녀의 젖가슴과 허연 허벅지를 오갔다. 여자는 보란 듯이 그의 시선 앞에서 다리를 고쳐 꼬았다. 부스스 부딪기는 원피스의 옷감소리가 이렇게 매혹적일 줄이야. 남자는 침을 삼켰다. 남자가 침을 삼키는 것을 따라 나도 한 바가지 침을 삼켰다. 그녀가 가슴께로 흐른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스카치 향에 섞인 그녀의 라벤다 향수의 냄새가 그윽하게 밀려왔다. 남자는 여자의 몸에 사로잡혔던 정신을 바로 잡았는지 질문을 바꿔 물었다.

“그럼 내기에서 진다면요?”
“내기에서 지면, 저랑 같이 저희 집 거실로 가서, 남편 시체 치우는 걸 좀 도와주는 건 어때요?”

기가 막혔다. 곧 죽어도 여자는 자기가 남편을 죽이고 왔다는 말투였다. 이제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는 남자의 표정도 그랬다. 남자는 마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 표정이 무덤덤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럼 시체를 다 치우고 난다면?”

여자가 씨익 웃었다. 그리곤 “달라는 건 뭐든 다 드리죠.” 했다.

뭐야. 결국엔 남자가 유리한 내기잖아. 생각했다. 남자는 곧 보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태도로 피식 웃었다. 의미를 가늠할 수 없었다. 또 자격지심이 발동할 것만 같았다. 그들의 대화에 비공식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이 시점에 두 사람은 일부러 나를 따돌리기라도 하는 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자는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요. 왜 결혼 생활의 기간이 중요해요?” 했다. 남자가 담배를 꺼내며 나를 쓱 올려다봤다. 대답대신 재떨이를 건넸다. 담배에 불을 붙인 남자가 말했다.

“여자나이 서른다섯은 애매해요. 당신과 같은 여자는 더 애매하죠. 결혼 생활을 가늠할 수 없는 몸매도 한몫을 합니다. 요즘은 다들 그래요. 아이를 낳았는지 슬하에 몇이나 아이가 있는지, 운동으로 관리를 한 덕택인지. 표시가 안 나죠. 옛날 같지 않게도. 그래도 당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는 것은 결혼 기간을 유추해 보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혼 기간은 정답과 직결되죠.”

여자는 달디 단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라도 발견한 듯, 그래서 입맛을 다시는 듯 아랫니를 앙 깨물었다. 남자는 이어서 말했다.

“결혼 기간이 길면 길수록 경제력이 많은 당신의 남편은 당신에게 차가웠을 수 있어요. 오죽하면 살인이 일어났을까요.”

남자의 말에 뒤통수가 빳빳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남자는 여자가 정말로 남편을 죽였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인가? 나는 경찰을 불러야하나? 아니. 경찰을 불렀다가 이 대화가 그저 퀴즈와 같은 형식의 순수한 내기였다면 어쩌지? 머리가 혼잡했다. 당연히도 내 혼란스런 머릿속과는 무관하게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남편이 싸움을 할 만큼도 애정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굳이 얼굴을 마주보고 칼을 휘둘렀어야 했을까요? 남편이 저항한다면 오히려 역으로 당신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어요?”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칠 뻔했다. 과연.

“등 뒤에서 기습을 하는 편이 좋았겠죠. 하지만 당신이 남편의 외도나 당신에 대한 무관심을 불만으로 표현할 정도라면, 아직 당신은 남편에게 애정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생기겠죠. 그렇다면 싸움이 일어난 과정에서 칼을 휘둘렀을 테니, 당신은 남편의 정면에 서서 그를 죽였을 거에요.”

여자는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이곤 “담배… 저도 한 대만 주시겠어요?” 했다. 남자는 담뱃갑을 손으로 훌훌 털어 담배 머리를 빼꼼 튀어나오게 만들어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굳이 머리를 내밀지 않은 녀석을 뽑아 입에 물었다. 그 행동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주관이 뚜렷한가 보군요.”
“왜 그렇죠?”
“제가 보인 성의를 굳이 피해가며 뽑기 힘든 담배를 꺼내시는 걸 보면요.”

여자는 대답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의 불이 그녀의 얼굴이 비추는 순간 바의 차분한 공기가 그녀에게 응집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저 여자는 서른네 살일까?
여자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마시곤 연기를 뱉지 않은 채 스카치를 목으로 넘겼다. 그 모습을 남자는 뻔뻔스럽게 쳐다보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시선을 즐기듯 생긋 웃었다. 여자가 담뱃재를 집게손가락으로 툭툭 털어내더니 말했다.

“얼마 전에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임신했다고요.”

동생? 내가 속으로 물은 질문을 남자도 똑같이 물었다.

“동생이요?”
“저보다 열 살이나 어리죠.”

그렇다면 스물네 살. 이것은 또 다른 힌트인가? 하지만 동생의 나이로 부부관계를 유추할 수는 없잖아. 남자는 또 깊이 생각을 하듯 턱을 어루만졌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남자는 잠깐 생각 한 후에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자를 돌아봤다.

“설마….”

남자가 설마, 하고 묻자 여자는 또 정답이라는 듯 씩 웃었다. 대답도 없이 짓는 그 진한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가 없다.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아니면 궁금증을 해소 할 수가 없었다. 목이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당신의 남편이 동생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 인가요?”
“끔찍한 이야기군요.”

여자는 맞다 틀리다를 차치한 채 말했다.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끔찍하군요? 왜 자신의 의견을 던진 것일까. 남자가 말했다.

“살인의 동기입니까?”

여자는 담배연기를 남자의 방향으로 후 불어내더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여자는 “한 대 더 주시겠어요?” 했다. 이번엔 남자가 직접 불을 붙여줬다. 여자는 담배의 불심을 진득히 빨아 당긴 다음 말했다. 담배연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넘실거린다.

“남편이 동생에게 눈독을 들였을 수도 있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동생이 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임신을 했다고 알리는 이유가 그것이었어요. 제가 남편과 이혼을 해줬으면 하고요. 그러면 자신이 제 남편과 재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 같은 이야기. TV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 그녀가 혹 소설가나 극본가는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과연 흥미로운지 생면부지 타인들에게 테스트를 해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가 “죽일 법도 하군요.” 했다.
여자는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요.” 했다.

스카치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하며 부서져 내렸다. 여자는 스카치 잔에 맺힌 물방울을 새끼손가락의 등으로 슬쩍 닦아 올렸다. 그리곤 자신의 입술 언저리를 매만졌다.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답을 말씀해 주세요. 남편은 엎어져 있을까요. 바로 누워있을까요.”

바보 같은. 지금까지 답을 갈구 할 만큼의 힌트가 있었는가? 남자는 말했다.

“동생이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할 정도라면, 당신과 남편의 슬하에는 아이가 없었다는 이야기군요. 그리고 당신의 남편은 애정이 깊은 사람이에요. 외도를 했지만, 당신의 동생만을 꾸준히 만났겠지요. 오십도 넘은 아저씨를 스물네 살 애송이가 사랑하기엔 경제력이란 매력이 너무 부족하니까요. 당신의 남편은 동생을 진심으로 아껴줬을 겁니다. 그리고 임신까지 시켰죠. 당신의 동생이 아무리 당찬 여자라 치더라도 언니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을 거예요. 분명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여자가 스카치를 벌컥 하고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여자는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겠군요.” 하며 주섬주섬 자신의 물건들을 챙겼다. 손바닥만 한 파우치를 손에 든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듯 멈춰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역시 남편은 바로 누워있습니다. 남편은 당신에게 이혼을 애걸 한 것이 아닙니까?”

여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가시죠.” 라고 했다. 남자는 “계산하고 나가겠습니다. 먼저 나가계시죠.” 라며 정중히 여자를 먼저 보냈다. 여자가 바를 떠나고 나는 스스럼없이 남자에게 물었다.

“어째서 바로 누워 있는 거죠?”

남자는 나를 비웃듯 피식 했다. 자존심을 둘 째였다. 해답을 듣지 않으면, 한동안 이 생각만 붙들고 지낼 것만 같았다. 남자는 동냥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여자와 있을 때완 다르게 말투가 시건방져졌다.

“당신, 여자가 식칼로 남자를 죽이는 게 그리 만만할 것 같아?”
“글쎄요. 잘 모르죠.”

남자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나는 카드를 받아 든 채 가만히 서서 남아있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더니 계속 이야기했다.

“겨우 3시간 전에 죽였다면, 저 여자가 저리도 말끔 할리 없지. 남자는 뒤에서 당했어도, 앞에서 당했어도, 식칼에 당했다면 단박에 죽진 않았을 거야. 분명 저항했을 거라고. 그래도 유리한 건 식칼을 쥐고 있는 여자였겠지만. 하지만 저리도 상처 없이 말끔하게 죽였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어. 사람은 드라마에서처럼 한 칼에 나가떨어지는 존재가 아니야. 저 여자는 보나마나 창녀야. 나와 하룻밤을 지낼까 말까 거리를 재봤을 뿐, 지금까지 나눈 대화는 사실과는 무근해. 남편이 바로 누웠건 엎어졌건 그런 건 처음부터 아무래도 좋았던 거야. 이제 설명이 됐어? 그렇다면 어서 계산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오늘 밤 바쁠 것 같아.”

남자는 계산을 마치고 유유히 사라졌다. 석연치 않았다. 그저 게임일 뿐이었단 말인가. 여자가 창녀라면 무엇을 위해 그런 수수께끼로, 먼저다가 온 손님과 시간을 죽였단 말인가.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가 나를 답답하게 했다.

여자가 다시 바를 찾은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바는 텅 비어있었다. 오롯이 그녀와 나 단 둘만이 덩그러니 카운터를 사이에 둔 채 침묵하고 있었다. 어제와는 머리의 모양도 옷차림도 전혀 달랐지만, 라벤다 향수만큼은 같은 걸 쓰고 온 듯 했다. 어제처럼 스카치를 홀짝이던 여자가 물었다.

“혹시 담배를 좀 얻어 피울 수 있을까요.”

나는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다.

“죄송합니다. 저는 담배를 갖고 있지 않아요.”
“끊었나요?”
“아니요. 한 번도 피워 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의외네요.” 라고 했다. 나도 무심결에 “그러는 손님도 전혀 서른네 살처럼 보이진 않는 걸요. 사람은 겉보기론 알 수 없는 거예요.” 하고 대답했다. 대답해놓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고 생각했다. 어제 이야기를 꾸준히 엿들은 것을 전부 티내는 꼴이었다. 어색해 질까 와인셀러로 도망치려 하는데, 여자가 “저기요.” 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여자를 돌아보자 여자가 물었다.

“제가 정말로 서른네 살처럼 보여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여자는 서른네 살처럼은 안보였다. 큰돈을 써가며 관리했다고 해도, 나에겐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는 외모였다. 차라리 스물넷이라면 수긍할 것 같았다. 여자가 물었다.

“그럼 몇 살이나 되어 보이나요?”
“모르죠. 모르지만 많아도 서른은 안 넘겼을 것 같네요.”

여자는 흐느끼듯 웃었다. 그리곤 “당신이 어제의 그 땅딸보 색정광보다는 훨씬 똑똑하군요.” 했다.
똑똑? 머리가 좋다는 뜻? 아니다. 나는 그저 여자가 젊어 보이기에 젊어 보인다고 했을 뿐이다. 여자의 웃음이 너무 맑게 보였다. 괜히 가슴이 아팠다. 몸을 팔며 살지 않아도 좋을 것을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환하게 웃음이 번져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몸을 파는 사람인가요?”

여자는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그 사람이 그러던가요? 제 뒤에서?”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알아둬요. 저는 창녀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만 하게 되네요.”

나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고개를 숙이자 진갈색의 카운터로 여자의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언제 숙인 머리를 들어야 할까 고민되었다. 가려진 시야를 넘어 여자가 물었다.

“제가 몇 살일까요. 내기해요.”

눈을 들어 여자를 바라봤다. 모르겠다. 내기에 자신이 없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그 땅딸보처럼 제 겉치장에 주목하지 않는 군요.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에요. 당신이라면 제 나이를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괜찮으니까, 아무 숫자나 말해 봐요. 맞춘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드리죠.”

여자의 깊이 파인 드레스 사이 들어난 가슴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피했다. 얼핏 시선일 갈 것만 같은 내가 민망스러웠다. 여자는 소리 내 웃었다.

“그래도 예의가 있으시네요. 대놓고 몸을 훑지 않으려 하시네요. 한 번 말해 봐요. 아무 숫자나…. 기대 되요.”
“스물여섯?”

여자가 눈을 잠깐 찡그렸다.

“아쉽네요. 저는 스물일곱 이예요. 고마워요. 어리게 봐줘서.”
“아니요. 그저 보인대로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여자가 손등으로 턱을 괴며 나를 올려다봤다. 여자의 눈가가 은근히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의 진홍 조명에 현혹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여자의 눈은 찰랑이다 넘쳐흐를 만큼 눈물로 촉촉해져 있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어요?”
“거짓말이라니요?”

내 물음에 여자가 반색했다.

“남편을 죽였다는 둥.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여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여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스카치 한 잔을 말끔히 비웠다. 여자는 금방 자리를 일어났다. 수표를 한 장 카운터에 올려둔 채. “나머진 팁이에요.” 라고 했다.

“이서를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펜 좀 빌려주시겠어요?”

수표 위로 정성스럽게 펜글씨를 남기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애틋하리만치 가냘파 보였다. 여자는 떠났다. 수표 한 장과 펜을 남긴 채.
여자가 떠난 후 손님들이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급격히 분주해진 바람에 주말에서 고용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불러야했다.

오늘은 바에 사람이 가득했다. 정신없이 접객을 하고나니 새벽 3시. 손님은 모두 빠져나가고, 아르바이트생과 나만 남았다. 아르바이트가 후~ 긴 한숨을 쉬며 카운터 넘어 손님들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갑자기 불러서. 말하니 아르바이트생은 괜찮아요, 하며 웃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당장 하루 일급을 주고 싶었다. 그녀를 앉혀 놓고는 바로 계산대로 돌아가 현금을 빼들었다. 빼곡한 현금 뭉치 사이로 여자가 주고 떠났던 수표가 희끗하고 보였다. 기분 좋게 현금 사이에서 수표를 꺼내어 아르바이트생에게 건넸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입도 아 벌어졌다.

“십만 원이나 주시는 거예요?”
“오늘은 장사도 잘 됐고. 또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워요. 오빠!”

아르바이트생은 수표가 신기하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눈앞까지 수표를 집어 들었다. 빤빤하게 펴진 수표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다. 수표 밑으론 예쁘게 미소 진 그녀의 입술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몸이 굳어버렸다.

아르바이트생의 앵두 같은 입술 위로, 오후에 여자가 정성스레 적어 놓고 떠난 글이 떠다녔다.


「저는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다만 3년 전 이야기를 했을 뿐이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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