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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게시물ID : humorbest_4927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꾼빰꾼빰
추천 : 36
조회수 : 5071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7/06 21:32:17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7/05 14:21:38
이 이야기는 제가 중학교 다닐때 담임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예초기를 들고 벌초를 하러 산에 갔다.
친인척이 별로 없는 나는 혼자서 부모님의 산소를 금방 벌초하고서 하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산을 내려 오는데, 
맞은편에서 낡은 비단 도포를 입은 수염이 허연 영감이 
녹이 슨 낫 하나 달랑 들고 올라오고 있지 않겠는가.
기묘한 느낌이었다.
영감은 팔십세는 한참 전에 넘긴듯 얼굴이 까맣고 쭈글쭈글했고, 머리며 수염이 허옇게 쇠어있었다.
그렇지만 걸음걸이나 꼿꼿한 허리, 심하게 낡고 해졌으나 비단이었음이 틀림 없는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도포에, 마찬가지로 낡았으나 제 기능을 잃지 않은 갓까지 쓰고 있었다.
지금 당장 흑백사진으로 찍어두면 역사속 한 장면이라고 믿어도 무리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노인네가 낫 하나 들고 올라오는 폼새가 딱해보여 도와주려는 맘을 먹고 말을 걸었다.

"영감님 벌초하러 오셨습니까?"

영감은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폼이 마치 선비라도 된 것 같이 무게가 있었다.

"아들 자식은 어쩌시고 영감님이 그 녹슨 낫 하나 가지고 벌초를 하신단 말입니까?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했더니 그 굳은 얼굴이 살짝 밝아지면서 또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라오라는 듯이 앞장선다.
영감은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길도 아닌 곳을 낫으로 풀을 베어가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겠다는데도 극구 사양이다.
도대체 무덤이 어디에 있길래 이렇게 길을 만들며 가야할 정도인가 의아했다.
한참을 걸어갔더니 무덤이겠거니 싶은 수풀더미가 나타났다.
봉분은 작았고, 주변은 물론이고 봉분에도 잡초가 너무 무성히 자라서 
언뜻 보면 무덤인줄도 모르고 지나칠 법한 모습이었다.
초라한 무덤이 혼자 있는 모습이 슬퍼보였다.
어쨌든 벌초를 시작했고, 주변 풀을 대충 정리한 다음 봉분을 정리했다.
예초기가 있은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벌초는 금방 끝났다.

"할 게 별로 없었네요. 영감님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하면서 돌아섰는데 영감은 그 자리에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영감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예초기를 쓰느라 시끄러웠고, 가는 소리를 못들은 것 뿐이겠거니 하면서도
어찌 이렇게 도와준 사람에게 고맙다 한마디 안하고 가버리나 기분이 나빠 툴툴 거리며 하산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꿨다.
낮의 그 영감이 꿈에 매우 고급스럽고 번쩍거리는 차림새로 나타나
금송아지, 금돼지, 엽전뭉치, 비단, 꽃신, 자개장 등등
갖은 재물을 건네주면서 "고맙네 고마워. 참으로 고마워..."
한참을 고맙다 고맙다 인사를 했다.

꿈을 꾸고 일어난 나는, 레스토랑을 하겠다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아내에게
전재산이 든 통장을 내밀며 '당신 하고 싶은거 한번 해보자' 라고 말했다.
평소에 반대에 반대를 하던 나였기에 아내는 기뻐하면서도 왜그러느냐고 연신 물었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과 꿈얘기를 했고, 아내는 잘 될 꿈이라며 당장 사업 구상에 들어갔다.

결론을 말하자면, 작은 자본으로 도시 외곽에 지어진 아내의 작은 레스토랑은 인기몰이를 했고
3년만에 세배로 증축했다. 아내는 종업원 14명을 둔 레스토랑 CEO가 되었고,
어디가서 연간 수익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벌어들였다.

내가 벌초한 무덤은 아마 그 영감님의 무덤이었고, 
영감님은 옛 천석꾼 쯤 되는 양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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