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명 모니노(牟尼奴).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낳은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1373년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때를 같이 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의 명으로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으로 10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가 죽은 다음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다 국왕을 믿고 권력을 남용했던 이인임이 최영(崔塋) ·이성계(李成桂) 등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됨에 따라,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었다. 1388년 6월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되었다. 강릉(江陵)으로 옮겨져, 1389년 12월 그의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왕 ·창왕은 모두 폐위되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왕으로서의 시호를 받지 못하여 폐왕 우, 폐왕 창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