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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당한 딸을 위한 복수, 영화 ‘방황하는 칼날’
게시물ID : sisa_4954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둣돌
추천 : 3
조회수 : 382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3/29 16:14:35
2004년 12월 여중생 성폭행 사건
 
밀양의 고등학생 44명이 한 어린 여중생에게 1년여 동안 성폭행을 저질러
 
온국민을 분노로 몰아갔단 사건이다.
 
이 영화를 의령경찰서 서장및 특히 황선미 여경이 꼭 볼 것을 권고한다.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그건 보는 이들 자유다.
 
최근 DAUM 쪽에서 2004년 12월 밀양성폭행사건 그후.. 라는 기사를 DAUM 카페 5곳에
 
 올렸는데 강제 삭제하였다.
 
그 기사에서는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이 친구라는 이유로, 현직 여경 황선미가
 
가해자들을 두둔하는가 하면 피해자 여중생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최근 의령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황선미가 징계는 커녕 진급했다는 소식에 국민들
 
 분노가 극에 이르고 의령경찰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황선미에 대한 글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DAUM 쪽에서 개인 정보보호위반이라는 허울좋은 잣대로 그 기사를 강제 삭제함은
 
국민들 눈과 귀를 막고자 하는데 동조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낱 여경에 대한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기사를 삭제하는 것 같으면, 성추행및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오혜란 대위에 대한 기사 역시
 
가해자인 노 소령의 개인정보보호로 삭제할 것인가?
 
 
 
 
 

성폭행 당한 딸을 위한 복수, 영화 ‘방황하는 칼날’

 
영화 '방황하는 칼날'
영화 '방황하는 칼날'ⓒ민중의소리
 

고등학생 남자 아이가 친구들과 찍은 성폭행 동영상을 보고 있다.
 
피해자 여중생이 소리를 지르고 벗어나려고 하고 에워싼 남학생들이 그녀를 범하려는 장면이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는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보는 눈치다.
 
그 남자아이 뒤엔 4~50대로 보이는 남성이 숨어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고 있다.
 
눈물과 식은땀과 침으로 범벅이 돼 분노를 삭히던 이 남성은 결국
 
동영상을 보던 남학생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성폭행 동영상 속 피해자 여학생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피해자 아버지가
 
가해자인 살인마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는다.
 
영화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도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피해자 소녀의 아버지가 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살해하는 순간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견고한 경계선이 붕괴된다.
 
경계선의 붕괴.
 
이것은 사회 안전망에 이니 적신호가 켜졌다는 소리다.
 
양측을 지켜줄 보안이 허술하다는 것의 방증이다.
 
이처럼 영화는 피해자가 너무나도 쉽고 대책 없이 가해자로 전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라는 안전망이 얼마나 허술한지 느끼게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도
칼날들의 방황은 시작된다


영화는 ‘소년을 죽인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처음엔 ‘아버지를 이해한다’ 혹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 한다’의 기준이 생기고
 
관객 스스로 어느 편에 설법도 싶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영화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짓고, ‘청소년의
 
악행을 한 번 느껴보시오’라는 식은 절대 아니다.
 
청소년들의 행동에 잔인무도한 악행이라고 느끼기 보다는 ‘먹먹함’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들은 평범한 가정의 아들이거나 범죄 후에 생각 없이
 
스키를 타러 다니는 친구이거나, 사죄를 한 뒤 웃으며 잘 사는 아이들이 있다는 점에서
 
주체할 수 없는 답답함과 먹먹함이 발생한다.
 
범죄에 무감각해진 아이들의 모습에서 기괴한 불쾌감이 몰려온다.
 
이정호 감독의 기지다.


딸을 죽게 만든 소년들을 죽이기 위해서 충혈 된 눈을 굴리며 정처 없이
 
대관령 설원을 떠도는 아버지.
 
소년을 쏴 죽이기 위해 장총도 어깨에 메고 있다.
 
일각 ‘내가 아버지라도 저렇게 했을 것’이라고 한 관객들은 골프채 통에 숨겨둔 장총처럼
 
아버지도 범죄행각을 꽁꽁 숨겼으면 했을 것이다.
 
경찰에게 들키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상현은 대책이 없다.
 
곳곳에 지문을 남기는 것은 물론이고 경찰과의 ‘밀땅’에도 큰 관심이 없다.
 
심지어 소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성폭행 당할 때 고통을 참느라 이가 부러지고, 반항하느라 손톱이 갈라진 딸을 생각하며
 
소년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사회를 향한 분노로 확장된다.
 
“일단 집에 가셔서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사회와 법 체제를 향한 분노로 말이다.


멀쩡한 노동자이자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대책 없는 살인마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보장의 공백이 얼마나 큰지 느끼게 만든다.
 
사회는 무고한 딸이 소년들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죽었는데
 
그저 집에 가서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말한다.
 
공권력도 형벌도 마찬가지다.
 
반짝 이슈화 됐다가 휘발돼 버리는 피해자의 사연처럼 소년들은 반짝 매를 맞고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
 
소년들은 “벌을 받았으니까 이제 된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경찰 억관은 말한다.
 
“17년 동안 피해자 가족에게 했던 말이 똑같다. 항상 참으라고...”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17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전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슬픔을 애도할
 
시간마저 없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대사를 통해서도 피해자를 위한 보호나 배려가 약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칼날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결단을 짓는 기준이다.
 
사회적인 칼날일 수도 있고, 개인의 칼날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딸을 죽인 소년을 다시 죽이는 아버지에 대해
 
주인공들이 나름의 칼날(기준)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상현을 비롯해서 경찰인 억관과 현수도 마찬가지다.
 
피의자 소년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버지 편을 들고, 혹은 들지 않는 방식으로 칼날을 드러낸다.
 
이들의 칼날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래서 자꾸 부딪히고 살결이 뜯어지고 피가 난다.
 
중요한 것은 사회와 법과 제도도 방황한다는 점이다.


원작의 분위기는 그대로 살리면서 감독만의 감각과 색채를 살린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4월 10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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