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22일 보도된 이른바 '삼성 X-FILE' 사건은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국정원이 삼성 이건희 회장 등을 도청한 테이프의 내용이 공개됨으로써 국정원이 검찰에 의해서 압수수색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사회 각층에 전방위 로비를 가한 것이 밝혀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8000억원에 달하는 사과기금을 내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 보도를 했던 MBC 이상호 기자는 그 후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조직에서 왕따를 당했고, 취재 일선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 이상호의 손바닥뉴스 > 로 취재 현장에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MBC 김재철 사장이 가로막았다. 제2의 나꼼수가 될 것을 우려해서 전격 폐지시킨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취재를 막을 수 없다고 선언한 이상호 기자는 < 발바닥뉴스 > 에 이어 팟캐스트 < 발뉴스 > 를 통해 이 시대에 기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겠다는 태세다. 또 이상호 기자는 '삼성 X-FILE' 사건 당시의 취재기록을 < 이상호 기자의 X-FILE > 이라는 책으로 묶어 발표함으로써 이 시대의 경제민주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지승호(이하 지) = 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를 취재차 방문했다가 검찰 조사를 받았잖아요.
이상호(이하 이)=저는 이번 재판을 통해서 제 무죄를 구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독재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피해자들과의 면담을 요구한 것, 인터뷰를 요구한 것이 유죄라면 저는 백번 유죄를 받을 생각입니다. 독재를 겪어낸, 독재에 대한 기억을 잊고 다시는 독재 치하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야말로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결정체인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국민이 혹시라도 있다면 재판을 통해서 전두환 독재의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전두환 펀드를 모집했잖아요.
이=맞습니다. 사실 국민들을 상대로 손을 벌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죠. 국민 상대로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명백하게 사전·사후 보고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취재한 얘기고, 취재한 내용이 여러 차례 보도가 됐습니다. 명백하게 공무 중에 생긴 일인데요. 이런 경우는 통상적으로 회사에서 변호사비를 대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전두환 소송까지 58번째 소송을 치르게 되어 있는데, 모두 공무 중에 생긴 일이었고, 회사에서 변호사비를 댔는데요. 김재철 체제 하에서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저야 괜찮지만 같이 재판을 받게 될 AD와 오디오맨이 걱정되더라구요. 궁리 끝에 생각한 게 소셜 펀딩이에요. 소송비와 전두환 취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발뉴스를 도와달라는 취지로 올렸더니, 5000만원 목표했던 금액이 일주일 만에 모였어요. 처음에는 신기하고 두 번째는 기뻤다가 세 번째 드는 생각은 두렵더라구요.
지=그래도 사실 인력도 많고 하니까 여유 있는 돈은 아닐 것 같은데.
이=스튜디오를 꾸리고 기본적인 장비를 사고, 정말 아껴서 썼어요. 우리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 국민 성금으로 쓰지 않겠다, 스태프가 7~8명 되는데, 여태까지 십시일반해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분들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해드려야 되고, 사실 방송은 돈이 많이 들어요. 그 돈으로 비싼 형사소송을 치르고,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방송 촬영 제작을 하기에는 빠듯한 금액이죠. 이후에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머리를 보태고 있어요. 한겨레에서 하듯이 동창회 광고나 결혼 몇 주년 광고, 아이들 돌잔치 광고, 그런 소액 광고들을 영상으로 만들어주면 재밌지 않을까, 작은 소액, 동네 가게들, 그런 광고들도 한 번 해보려구요. @gobalnews로 신청해주시면 크든 작든 집안 대소사는 물론이고, 동네 재래시장 떡광고까지 영상으로 만들어서 많은 분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찾아가는 서비스를 만들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 < 손바닥뉴스 > 의 경우 인기 있는 방송을 갑자기 없앴잖아요. 김재철 사장은 "제2의 나꼼수가 될까봐 두려웠다"고 얘기했다면서요.
이=방송 준비하고 있는 당일 폐지를 통보받았어요. BBK 관련해서 김경준씨한테 제보를 받았는데,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일단 1보를 처리해야겠다, 파이시티 의혹과 관련해서, 이게 저희는 전형적인 권력형 게이트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권재진 법무장관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여러 질문들을 던졌죠. 이 사건과 관련해서 거취를 밝힐 의사가 있느냐,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검찰 조사를 어떤 식으로든 받은 적이 있느냐, 그건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거든요. 결국 제대로 된 수사 없이 수사가 종료됐어요.
지=김재철 사장 인터뷰도 했잖아요. "앉혀주신 분들이 줄줄이 구속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용감하게 하던데. 사실 겁이 났었다고 했었잖아요.(웃음)
이=겁나죠. 왜냐하면 전 세계 언론에서 자신의 사장을 공격적으로 인터뷰한 보도 사례가 있었을까 싶어요. 그 정도로 방송사 사장은 직원한테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미치죠.
지=사무실 구하려고 어려움을 겪다가 이한열 기념관 2층에 이한열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방송하게 됐는데, 뭔가 운명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아요. 전율 같은 것도 느꼈을 것 같고, 여기서 죽으란 얘기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 같고.(웃음)
이=이한열 선배는 저와 절친했던 선배고, 이한열 선배가 최루탄을 맞아서 아스팔트에 쓰러지시던 날 바로 뒷줄에 함께 있었던 후배였기 때문에 이한열 선배를 오랜 기간 잊거나 이한열로부터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살아왔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25년 만에 그것도 이한열 열사의 기념관으로 소환되어서 올 줄은 몰랐어요. 늘 마음 속에 이한열의 촛불, 조그만 빈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한열의 집안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중략>
지= 마지막으로 정리 말씀해주세요.
이= 며칠 전 7월 5일이 한열이형 25주기 기일이었어요. 25년 만에 한열이형 빈소를 찾았어요. 한열이형 죽던 날 다짐을 했어요. 한열이형 몫까지 근사하게 살게, 형이 만들고 싶은 세상, 그 꿈을 위해서 나도 나눠서 살게, 한열이형 쓰러진 자리에서, 그리고 제 약속을 지키는 길은 기자로서 초심을 버리지 않고 현장기자로서 남는 것, 남들이 꺼리는 보도를 하는 것, 그렇게 싸워내는 것,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기자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여기로 다시 오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25년 동안 기자생활, 사회생활을 했는데, 지금부터 25년 동안은 한열이형이랑 동업자가 돼서 이한열 정신, 6·10 민주화 항쟁, 6·10 혁명을 통해서 제기됐던 사회민주화, 정치민주화를 실효적으로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경제민주화를 이뤄나가는 나머지 25년의 싸움을 한열이형이랑 같이 해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한열이형과 동행해서 멋있게 해보려고 합니다. 많이 지켜보시고, 격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열이형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