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의 '단독 회담' 제안에 사흘째 침묵하고 있다. 안 대표는 "기초선거 공천 폐지 문제를 논의하자"며 두 차례나 회동을 제안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겠다"(민경욱 대변인)며 제1야당 대표의 회동 제안을 무시하고 있다. 기초공천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공당의 후보로서 이 같은 태도는 책임정치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일에는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가 청와대 대신 나섰다. 최 원내대표는 국회 대표연설에서 "대선에서 기초공천을 폐지하겠다고 약속드렸다. 국민과 약속은 천금과도 같은 것인데 이 약속을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하게 됐다. 정말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잘못된 약속에 얽매이기보다는 국민께 겸허히 용서를 구하고 잘못은 바로잡는 것이 더 용기 있고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격려 만찬에서 권영세 주중 대사(왼쪽)의 건배사를 들으며 웃고 있다. 오른쪽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 | 청와대사진기자단
친박계 핵심인 최 원내대표의 '대리 사과'를 통해 야당의 대통령 회담 요구 및 대선 공약 파기 공세를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권에선 박 대통령이 앞으로도 기초공천 폐지 논쟁에 무응답, 무시전략으로 일관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선거 관련 문제는 여의도 일인 만큼 대통령이 관여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게 청와대 정서라는 것이다. 청와대가 입을 닫고 최 원내대표가 대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적 셈법도 있다. 회동 제안에 응하면 기초선거 공천 폐지 논쟁이 6·4 지방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고, 야당이 내세우는 '약속 대 거짓'의 프레임이 작동할 수 있는 만큼 무대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인 것이다. 야당이 '무공천'으로 지방선거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된다면 이 문제를 놓고 야당 내에서 자중지란이 일 수도 있다.
청와대의 무시전략 배경은 높은 국정 지지율에서 비롯된 자신감이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31일 발표한 3월 넷째주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 지지율은 62.6%로 조사됐다. 대선 공약 파기에 대한 지속적인 쟁점화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60%대의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지율이 떠받치는 만큼 불리한 이슈는 뭉개고 가겠다는 전략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날도 회담 수용을 촉구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을 흔들며 "약속 위반에 대한 대통령 입장은 무엇인지 소신과 입장을 밝히는 게 예의이고 도리"라고 비판했다. 오영식·조정식 의원 등 '정치교체·정당 재구성을 위한 혁신모임'을 주축으로 한 의원 20여명은 이날부터 무공천 입법을 위한 무기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대통령이 야당과 소통하고 아우르는 게 바로 협치"라며 "자신은 초정파적인 지도자로서 여야 정당의 위에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