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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 뒷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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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
조회수 : 8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07 22:16:11
지난 글 입니다. : 비잔틴-페체네그 전쟁 Total War (3) (파란 글자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다사다난했던 제 1차 전쟁은 일단 페체네그 인들이 실력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평화를 제의하였고 역시나 중앙군이 통채로 궤멸당하면서 많은 재력을 소비해야했던 제국도 평화에 동의하면서 7년차로 종결되었습니다. 다만 전쟁 초반에 아드리아누폴리 시총독이었던 아리아니티스의 추격으로 대파되었던 페체네그 사령관 셀티는 항복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미하일 프셀로스는 이사키오스 1세가 페체네그 방어를 위해 수도를 비웠을 때 보낸 편지에서 셀티를 주의할 것을 당부하면서 셀티가 항복하지 않은 이유에 관한 자신의 추측을 말하길, '그(셀티)가 공포에 질렸던지 혹은 과도한 자신감에 빠졌던가 혹은 실의에 빠졌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지도자들의 항복이 그의 기만전술은 아닌지 신중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프셀로스의 편지 중 일부 내용 요약, 1059년경
라고 하였던 바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모노마코스 황제가 침입군 다수를 딱히 어쩌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놔두었으니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30년 평화협정은 얼마든지 내어버릴 수 있는 고식지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057년에 격렬한 내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사키오스 1세(1057-1059 재임)에게 페체네그와의 새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정벌의 발단을 제공한 것은 아니나다를까 페체네그 족 자신들이었습니다. 1059년에 헝가리 인들과 페체네그 인들은 동시에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이사키오스는 대응에 나서야 했습니다. 의외로 이들의 공격은 약하기 짝이 없어서 트리아디차(Triaditza, 오늘날의 소피아, 당시의 세르디카)에서 위협을 받은 헝가리 인들은 즉각 대사를 파견했습니다. 황제는 대사를 영접하고 평화에 동의함으로써 북방의 두 적중 하나를 없애고 이제 오로지 페체네그만을 남겨두었습니다. 당연히 그 다음 수순은 페체네그 방어였습니다.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친정(親征)은 아직 쿠데타로 인한 혼란이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불안을 키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하일 프셀로스는 편지를 보내 페체네그 족은 이미 과거에 충분히 제압되었다면서 이사키오스에게 군을 물릴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후의 사태 진행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황제는 먼저 동부 국경 지대의 이민족들이 국경을 침노하는 지를 확인하는 쉬운 일을 처리한 이후 전군을 통솔하면서 갑자기 군을 일으켜 얼어붙은 도나우 강을 통해 남하한 페체네그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셀티를 제외한 나머지 페체네그 지도자들은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탈했습니다. 셀티의 군대는 도나우 유역의 깊은 삼림 속, 깎아지른 듯한 암벽 곁에 주둔했습니다. 셀티는 이 곳에서 제국군에 맞서 싸우기로 작전을 입안했으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패배했습니다. 페체네그 인들은 이사키오스가 이끄는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전열과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소규모 단위로 나누어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못하자 3일간 전열을 정비하고 제 3일에 다시 전투를 치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3일동안 페체네그 인들은 부상자 등의 약자들을 버려두고 험한 길을 택해 도주했으며 제 3일에 제국군이 공격을 위해 출격했을때는 적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황제는 셀티의 은신처까지 점령했지만 더 이상 페체네그 족을 추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군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제국군은 병사의 손실이 있긴 했는데 이는 전쟁 자체의 피해보다는 이후 회군 과정에서 갑작스런 비와 눈폭풍에 의한 손실과 그리고 불어난 강물을 도하하는 과정에서의 일정한 사상자로 인한 손실이었습니다. 이로써 제 1차 전쟁과 그 뒷처리는 1059년경, 페체네그 족 지도자들 가운데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셀티의 패주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장장 13년에 걸치는 북변의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 페체네그 족도 피해를 입었겠지만 타격은 되려 로마제국이 더 많이 입었습니다. 일단 주 전장이 도나우 강 이남에 한정됨으로써 많은 촌락들, 특히 비교적 최근에 합병된 옛 불가리아 지역 및 수도권인 트라키아 지방의 도시, 촌락이 많은 인명, 재산상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앙군도 지휘관의 착오로 말미암아 한차례 전멸에 가까운 궤멸을 당하면서 용병을 대거 고용하고 중앙군도 재건하는 통에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었고 이러한 재정적 위기는 1040년대 말과 1054년 사이에 걸쳐서 이루어진 4차례의 극적인 통화가치 절하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종료된 이후 당장 처리해야 되는 문제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불안정하게 시작된 페체네그와의 평화를 확실히 해야하는 것이고 둘째는 재정의 재건이었습니다. 그 첫째는 이사키오스 1세가 군사력으로 재차 페체네그 족 최후의 반항세력을 격파함으로써 약 30년간 페체네그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다소 어려운 문제였는데 이사키오스 정부는 이에 대한 처리를 종결짓지 못하고 퇴진했으며 콘스탄디노스 두카스가 제위에 올라 적극적인 세수 증대책을 시행했고 이에 따라 통화가치는 절하가 저지되거나 일부 절상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카스 정부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은 동쪽에서 새로운, 그리고 더 긴박한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리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페체네그가 다시 실력을 기르면서 복수의 칼날을 벼르고 있었다는 것은 헤아릴 계제가 못되었습니다. 마침내 1차 전쟁의 영웅들인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 등이 모두 시절의 영욕 속에서 사라진 후, 페체네그의 위협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1086년 12월, 또다시 얼어붙은 도나우 강에 페체네그의 군대가 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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