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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오월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게시물ID : readers_49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아푸
추천 : 10
조회수 : 24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18:35:45




  오월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다섯에게 말했으나 다섯 모두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정말로 보았느냐,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되묻는다. 한 사람 당 두 번 씩, 열 번이나 대답해주었다. 정말이라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들은 원래 의심이 많다. 사람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의심이 많은 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피곤하다. 그들은 심지어 눈이 왔었다는 것조차도 믿지 않는다. 아무리 때늦은 눈이라지만 이렇게나 눈이 많이 오는 도시에서 그게 뭐 그리 못 믿을 일인가. 그들은 아마 내가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녀를 보았다는 말도 괜히 꺼냈다. 차라리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 사실 그녀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면 나라도 믿지 못했을 거야. 나도 그녀를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거든.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그녀를 찾기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지. 아무런 소식조차 듣지 못한 채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이제는 그녀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생각했었는데, 응?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냐고? 그렇게 애타게 찾아 돌아다녔으면서?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다 잊혀 지더라고. 너도 알잖아 내가 하는 일이 뭔지.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상대하다 진을 빼고 나면, 어쩌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나 한 번 씩 그녀가 떠오를 뿐이더라고. 게다가 이제는 그렇게라도 그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이제와 불쑥 그녀가 나타난 거야. 잘못 본 거 아니냐고? 그럴 리는 없어. 그녀의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살짝 쳐진 입 꼬리와 단호한 콧날은 영락없이 그녀였는걸. 그런데 가만있자, 정말 그녀 이름이 뭐였더라? 그리 복잡한 이름은 아니었는데, 어째 통 기억이 나지를 않네. 혹시 자네는 알고 있나? 벽은 대답이 없고,


  차라리 혼자 이야기 하는 것이 낫겠다. 벽은 쓸모가 없다. 벽과 백날 대화해 봐야 무얼 하겠는가. 벽은 그녀의 이름도 말해주지 못한다. 그녀의 이름을 알려 줄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제 아무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해 우울해졌다. 대신 그녀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자. 나타샤라고 하자. 눈을 맞으며 서 있었으니 그녀는 아름다웠으니 나타샤라고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타샤는 눈을 좋아했다. 눈을 좋아한 것이 그녀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뜨거운 사람이었으므로, 눈으로라도 그녀를 식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성격이 불같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불이라기보다는, 불에 달궈진 뜨거운 무쇠 같은 사람이었다. 뜨겁지만 불처럼 가볍지도, 불처럼 화르륵 불타오르고 금세 사라져버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무쇠처럼 단단하고 무거웠다. 그녀는 은근한 열기로 그녀 주위의 모두를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나는 나타샤를 한겨울에 만났다. 추운 겨울이었기에 나는 따뜻한 열기를 나눠주는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말했다시피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겨울 교정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어찌할 도리 없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본능이다. 성적 욕망,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음양의 조화, 남자가 여자를 보았을 때 그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감정의 발현보다도 훨씬 앞서있는 본능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벌벌 떨던 사내들은 모두 그렇게 본능적으로 그녀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러니 그녀를 사랑했던 나와 사내들, 우리 사이에는 경쟁심보다는 묘한 동지의식이 맴돌았다. 공사장의 화톳불 주위를 빙 둘러싸고 담배를 나눠 피우는 인부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친밀한 유대감 같은 것 있지 않은가. 내가 추워 이 불 곁에 서서 몸을 쪼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춥지 않을 것이며 어찌 그를 매섭게 쫓아내 버릴 것인가. 물론 남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불을 쪼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12월, 십 년이 훨씬 넘는 기간동안 나라를 통치하던 장군이 총에 맞아 죽었던 해였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으나 교정은 아직도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휴학계를 낼 작정으로 학교에 갔었다. 학기 중이고 방학이고 조용할 날이 없던 학교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무리지어 다니기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런 내 모습이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고깝게 보였던 모양이다. 고향에서 집안일이나 돕다가 나를 잘 아는 이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야 교정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교무처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나오는 길에, 학생회관 앞에 모여 있던 한 무리의 학생들 사이에서 처음 나탸샤를 발견했다. 교무처로 되돌아가 휴학계를 철회했다.


  무리들이 내는 큰 목소리에 교정은 겨우내 시끄러웠다. 나도 함께 시끄러웠다. 여전히 홀로 조용한 것이 좋았지만, 나타샤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도 무리 사이로 끼어들어가 그들과 함께 해야만 했다. 나 혼자 그녀를 독차지하기에는 겨울은 추웠고 그녀는 뜨거웠으며 그녀 주위를 둘러 싼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눈이 그치고 겨울이 끝나가면서 그녀는 점점 더 뜨겁게 달궈져갔다.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도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2월, 입춘이 지나 꽃이 피었고 3월, 개강을 맞이했으나 예정대로 휴학계를 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휴학을 해도 상관없을 뻔 했다. 나탸샤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나도 수업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수업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눈이 그친 이후 그녀가 내뿜는 열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조차 감당을 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졌다. 나는 그녀가 녹아버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날이 풀리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녹아 없어져버린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그리고 5월, 나탸샤는 정말 내 걱정대로 사라져버렸어. 그 해 오월 그곳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으나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은 그것 하나뿐이었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녀가 끝내 오월의 태양에 녹아 어딘가로 흘러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지. 너도 알다시피, 오월이면 아직 여름이라 하기엔 좀 그렇더라도 제법 따뜻하잖아. 그런데 그녀가 다시 나타난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어쩌면 너무 놀라서 그녀의 이름을 순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몰라. 잠깐, 그녀의 이름이 어렴풋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그 뭐야, 아! 그렇지! 그래 그렇지. 생각이 났어. 그런데 가만있자, 내가 그녀를 어디서 봤더라? 생소한 장소는 아니었는데, 어째 통 기억이 나지를 않네. 혹시 자네는 알고 있나? 벽은 대답이 없고,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야한다. 이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으니, 그녀를 부르러 가야한다. 이제 그녀를 붙잡으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녹지 않도록, 일 년 내내 눈이 멈추지 않는 도시로 함께 떠날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그런 곳이라면 또 추위에 떨던 사내들이 벌떼처럼 모여들 텐데, 나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데, 어쨌거나 일단 그녀를 찾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녀를 어디에서 봤더라, 눈을 맞으며 서 있었는데, 눈이 내리는 곳으로 가자.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도시는 대체로 따뜻한 편이었다. 눈도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다. 이월, 늦어도 삼월이면 눈이 그쳤고 사월에 눈이 내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오월이면 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름에 더 가까웠다. 낮 최고 기온이 30도에 가까웠던 오월의 어느 날, 남자가 사라졌다. 의사들이 간호사들이 경찰들이 한동안 그 남자를 찾아 헤맸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남자가 빠져나간 침대 밑에 하얗고 차가운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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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지만 저도 한번 올려봅니다.

두 장 내외인 줄 알았는데, 두 장 하고도 한 문단을 더 썼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맥시멈 두 장이었네요.

엔터 없이 A4 두 장 꽉 채운 분량으로 줄였습니다.

참가자분들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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