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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제 기억속의 영원한 라이벌 이대진VS주형광
게시물ID : humorbest_4977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종블로
추천 : 35
조회수 : 4503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7/19 00:32:42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7/18 22:58:21






90년대 해태타이거즈와 롯데자이언츠.이 두 제과라이벌에는 그때당시 젊은 나이로 리그를 평정했던 두명의 투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태의 이대진. 롯데의 주형광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피칭스타일은 달랐으나.


이둘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떠올랐으며 비슷한 시기에 부상의 나락에 떨어져 버렸죠.


그리고 거기엔 팀 사정이 얽혀있다는것 또한 비슷했습니다. 90년대에 새롭게 떠올랐던 닮은꼴 영건에이스 이대진과 주형광


어린시절의 짧은 추억과 빈약한 자료나마 뒤져서 이들에 대해 간략히 글을 써봅니다.





1.데뷔와 전성기


필자가 해태타이거즈팬이기 때문에 이대진에 대해 먼저 서술하겠습니다.


뭐 타이거즈팬들에게 있어 이대진이란 선수는 너무 각별할수밖에 없죠.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의 정신적 기둥의 역을 맡았으니...


지금은 그러고 보니 두사람다 타이거즈를 떠나있네요 하하...



93년 이종범과 함께 데뷔했던 이대진. 그는 투수로 데뷔하자마자 10승5패 2SV를 기록하면서 93년 해태의 우승에 큰 공헌을 하게됩니다.


신인답지않은 배짱과 150에 근접하는 빠르고 묵직한 돌직구. 그리고 아직도 역대급으로 손꼽히는 커브를 이용해 당시 함께 데뷔했던


선배 이종범과 함께 93년우승에 일조함으로써타이거즈의 '투수왕국'의 한축을 맡게 되죠. 


이듬해 94년은 4.20 7승 8패 3SV로 비교적 평범한 성적을 올리지만


95년에 풀타임 선발 첫해 2.57 14승 6패 168이닝 163삼진 7완투 2완봉을 기록하며 타이거즈의 강력한 에이스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해 탈삼진 1위를 석권하면서 이상훈.김상진.정민철.주형광같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닥터K라는 별명이 이대진에게 붙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해태의 선발라인업인 이강철-조계현-이대진의 원투쓰리펀치의 위력은 40승을 책임질수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거기에 0점대 방어율의 마무리 선동열 까지...


불과 데뷔 3년차가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투수진의 한축을 맡게 된것이죠. 



그리고 96년 이대진은 개인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합니다.


2.37의 방어율에 16승 8패 3세이브 160이닝 146삼진 Whip 0.96. 4완투 2완봉 당시 선동열의 일본진출 이후로 계투진이 빈약해졌음에도


계투.선발 가릴것없이(해태라는 팀 특성상 이전부터 쭉 그래왔었지만) 출전해 다승3위.방어율 3위로 몹시 빼어난 성적을 올렸으나


그 해에 구대성이 말그대로 대성불패의 최고 리즈시절이라....이건 주형광에게도 해당됩니다...


역시나 뛰어난 활약으로 96년 코리안 시리즈에서도 활약하여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으며


97년 해태의 마지막 우승시즌에도 3.14 180.2이닝 17승 6패 1세이브 140개의 삼진을 기록하면서 팀의 에이스로써 제 본분을 다하며


코리안시리즈에서 2승으로 팀의 9번째 우승의 큰 공헌을 합니다. 97년 해태의 마지막 우승을 장식한 에이스답게 이후에 타이거즈팬들에겐


이대진만큼 마지막 에이스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투수가 없다고 생각되죠....이러한 활약을 발판으로 김현욱을 제치고 골든글러브를 타게됩니다.



IMF가 닥쳐와 팀이 붕괴직전이던 98년에도 3.26 12승 11패 179이닝 183삼진을 기록하며 해태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탈삼진 1위를 다시금 재탈환 합니다. 그리고 그유명한 98년 이대진의 현대전 10연속 탈삼진의 기록은 역대 프로야구사에서도 길이남을 기록입니다.


(아니 상대가 98년의 '그' 현대타선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무너져 가던 팀을 떠받친건 이강철과 이대진. 마무리 임창용 뿐이었으며 자연스레 이들은 혹사당했고


후반기 들어서 해태의 강력한 투수진은 선발진의 투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주축선수들의 이탈과 불안정한 불펜 


이종범이 빠져버린 타선의 예년대비 너무나도 빈약한 득점지원은 결국 해태를 창단 첫 5위에 내려앉게 했으며. 


더욱이 빈약한 선수관리 덕분에 해태는 98년을 기점으로 이대진과 김상진이라는 두 거물우완투수를 잃게 되는데.... 


이 이후의 이야기는 속편에 계속합니다.




자 이제 주형광의 전성기 시절로 가보죠.





어린시절에 해태팬이었던 나에게 주형광이라는 선수는 롯데라는 제과 라이벌 팀의 최고의 적수였습니다.


정말 어린시절의 생각이지만 그때당시 주형광보다 잘던지는 투수는 롯데에 없었으며 또 저 주형광을 무너트리면 롯데는


해태에게 적수가 될 사람이 없다라고 생각했었을정도로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롯데투수진에서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무등구장에서 롯데경기가 열려서 가면 선발은 이상하게도 두번중 한번은 주형광이었고 그와의 대결은 늘 투수전으로 진행되었었네요.




주형광은 94년 데뷔하자마자 부산팬들에게 커다란 센세이션이었을것입니다. 데뷔하자마자 3.04 11승 5패 1세이브 186.2이닝을 기록하며


고졸신인 투수 중 정말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수밖에 없었으나 당시 94년은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이라는 LG의 걸출한 신인 3인방덕분에


너무 자연스럽게 묻혀져 버렸습니다...(지못미) 그리고 이듬해 95년 롯데가 시즌 3위를 기록하는 호성적 중에서 


3.05 200.1이닝 10승 7패 5완투를 기록. 류현진급 불운을 기록함에도 꾸준히 선발을 지키며 팀을 이끌었으며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기세가 대단했던 LG를 상대로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에 롯데를 올려놓았으나 


준플.플레이오프에서 상당한 체력고갈을 겪은 롯데는 아쉽게 김상진과 김상호가 이끌던 OB에게 롯데는 우승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당시 윤학길-염종석-주형광-강상수-가득염의 선발진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선발진이었으며. 주형광은 그중 단연 돋보였습니다.


철옹성이라던 해태의 마운드에 비견될만한 얼마안되는 강력한 투수진이었었죠.


그리고 대망의 96년. 주형광은 리그를 씹어먹는 대활약을 펼치는데 3.36 18승 7패 1세이브 216.2이닝 221삼진 10완투를 기록했습니다.


다승1위.탈삼진 1위.이닝 2위.완투2위(완투10회가 완투2위라니 어떻게 되먹은 나라야 여긴)로 역대 단일시즌 탈삼진2위라는 기록으로 


롯데에 84년 최동원이 재림한듯한 활약을 한 주형광이었으나...이해 롯데는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으로 중위권을 면치못하는데 


만약 주형광이라도 없었다면...롯데의 안습한 꼴지 순위는 더 늘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담으로 특히 주형광은 사직버프를 제대로 받은 선수였는데 홈에서만 16연승을 거두며 열광적인 부산 홈팬들에게 확실한 필승카드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해 MVP는 30-30을 기록한 박재홍과 투수4관왕에 빛나던 구대성의 경합이었으며 MVP는 구대성이 가져가게 된다.(물론골글도)


97년 방위병 복무이후 별다른 마무리훈련을 하지 못하면서 5.88 6승13패를 기록하면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98년 3.63 11승 7패 183이닝 148삼진을 기록하면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고


그리고 99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당시 주형광은 하나의 전설이 되는데.


99년 극심한 타고투저속에서도 3.98 13승 12패 190이닝 177삼진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올리면서 팀을 드림리그2위에 올려놓으며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과거 95년 LG전을 떠올릴 역투를 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는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모르니


다른 롯데팬 블로그에 가셔서 보시는걸 추천합니다ㅠㅠ(솔직히 그때당시 어린마음에 해태아니면 남의 야구 이야기라...제대로 보지도 않았었네요...)




예전에 내가 주형광이 광주에 와서 경기할때 아빠한테 했던 말이 있는데 '저 투수는 제일 잘던진담서 웰캐 느리요?' 이 말을 했었던게 기억납니다ㅎㅎ


지금와서 기록들을 보니 130전후의 공과 괜찮은 슬라이더를 가졌을뿐이라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많은 탈삼진을 거둔것은 특유의 무브먼트와 3분할이 가능한 빼어난 제구력.,묵직한 구위 덕분이라고 합니다...


여튼 염종석과 박동희.윤학길이 빠져버린 롯데투수진에서 빈약한 계투에도 묵묵히 200이닝 가까이 던지며 롯데를 지탱했던 투수 주형광


역시 이대진과 마찬가지로 그동안의 혹사는 그를 이제 망쳐놓게 되는데....




2.부상 그리고 부활







98년은 타이거즈에게 있어 향후 10년을 좌우할 에이스들을 잃어버린 시즌이었습니다.


위암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했던 김상진 선수 역시 98년 후반기에서야 부상으로 쓰러졌으며.


98년 말 이강철은 FA로 삼성으로 팔려갔고 임창용은 양준혁과 시즌후 트레이드가 됬으며 이대진역시 98년 부상의 악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99년시즌은 거의 통쨰로 쉬다시피하게됩니다 생각보다는 팔꿈치와 어깨부상이 크지 않았어서 지금의료기술로 치료한다면야 금방 재활할수 있었으나


해태구단은 그것을 방치했었고 그 방치된 상태에서 00년 연봉을 대폭삭감하며 승과 세이브를 올려야 연봉을 제값으로 줄수있다하여


그 망가진 어깨와 팔을 가지고 3.17 8승 6패 13세이브 105이닝 117삼진을 기록하며 팀 창단 첫꼴지에서 간신히 구제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투수인생은 07년까지 끝나게 되죠. 제대로 망가져버린 어깨와 팔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


01년부터 02년까지 꾸준한 재활을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자 김성한 감독이 타자로써의 전향까지 권유했습니다,







타자로써의 성적은 극히 저조해 0.083 4타점을 기록하는데 2003년. 여기있는 4타점중 3타점에는 기가막힌 사연이 있다.


1사주자 만루.5-4로 LG에게 지고있는상황 김성한감독은 당시 특급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이대진을 내보냈습니다.


과거 우완선발과 좌완선발을 양분했던 두 투수가 이제는 타자대 투수로 만나는 상황. 


이대진은 이상훈의 공을 받아쳐 싹쓸이 적시 역전3루타를 기록합니다....타이거즈 팬에게는 정말 감개무량한 순간...


아직도 연관검색어에 이대진 3루타가 있는것을 보면 얼마나 그 순간이 대단한 순간인지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자로써의 전향도 결국 잠깐의 외도였습니다.


그후로도 몇년인가 계속되는 통증의 재발과 야구자체를 못하는 그 아픔 속에서도


꾸준히 재활을 해나가던 이대진은 07년 복귀해 4.11 7승 6패 76이닝을 기록하며 복귀한다.


예전만큼의 강력한 직구는 온데간데 없이 5이닝 버티는게 최선일 정도로 망가진 몸이었지만...


노련한 경기 운용과 특유의 커브를 이용해 07년 윤석민밖에 믿을것이 없던 투수진에 그나마 한줄기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그후 09년까지 때떄로 선발로 올라서며 99승을 기록하는데 100승에 1승만을 남겨놓은 상황. 3전4기.상대는 한화


100승도전 상대가 류현진이었다. 100승이 과연 다음기회로 넘어가야만 할것인가 생각하던 그 찰나


그때 이종범이 그 둘이 함께 전성기를 맞았던 90년대에 늘 그랬듯 선두타자 홈런을 쏘아올렸고 이대진은 5회까지 틀어막았다.


그리고 100승의 순간. 타이거즈팬들은 모두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후. 주전경쟁에서 밀려 제대로 경기에도 몇번 못서보고 결국 LG로 트레이드가 되버린 이대진이지만.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영원한 타이거즈의 정신적지주 에이스 오브 에이스로 기억되고 있죠.


그래서 우리 기아팬들은 기아와 엘지의 경기에서 이대진이 등판할때면 차마 쉽사리 기아응원이 나오지 못합니다.





자 이제 주형광 선수의 차례입니다.








00년 3.49 8승6패 150이닝을 기록한 주형광.허나 그의 팔은 그동안의 혹사로 전혀 멀쩡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그 많은 투수들속에서 10승을 장담할 투수가 주형광 혼자뿐이던 롯데에서는 정말 별수없는 혹사를 병행해야됬고


결국 그 여파로 인해 01년부터 02년까지 부상에 빠지게 됩니다.


임수혁선수 사건 뒤에서도 전혀 정신을 못차린 롯데프런트는 힘줄을 쇠못으로 고정시키는 수술을 시술하여 


주형광은 그 후유증으로 원래 투구를 찾을수 없게 되버린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 뒤로 정말 예전의 그 200승 후보에까지 들던 주형광이 맞나 싶을정도가 되어 버리는데...


03년에는 어떻게든 좌완 릴리프로 나오기는 했으나 4.58 0-9 13홀드로 영 예전의 모습을 찾을수가 없었으며


2004년에는 11선발 3.41 4승 4패 63이닝으로 다시 예년의 감을 찾는가 싶더니 또다시 왼쪽팔의 통증은 시작되었고.


그 후로 임시선발과 좌완릴리프로 출전해도 이미 느린 공에 더 느려진 구속과 가속되어가는 왼팔의 약화로 타자들은 예전과달리


그의 공을 너무도 쉽게 공략했고. 게다가 점점 성장해오는 젊은 투수들은 그의 자리를 뺏어갔습니다.


직관을 보러갔을때 예전의 그 미워질정도로 강력함을 풍기던 그 투수가 맞을까 싶을정도로 땀을 뻘뻘흘리며 고전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위화감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겨우 만31세의 나이, 2007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 은퇴식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묘한 감정이 들었던것이 언제까지고 롯데의 최고의 선발로써 새로운 역사를 그려나갈것 같던


호남-해태에는 이대진이 있다면 영남-롯데에는 주형광이 있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당시 최고의 젊은 특급스터프의 투수가.


마치 함락되지 않던 철옹성이나 다름없던 주형광이 이렇게 허무하게 약해지고 은퇴해버렸던 것....


그토록 얄밉게 점수를 내주지도 않고 7,8회 팀이 필요하다면 예사로 9회까지 던지던 그의 모습이


저토록 안쓰러운 모습인가도 싶었습니다. 









참으로 그 둘은 묘한 관계입니다. 비록 라이벌이라고 불리웠으나 앞에서 보셨다 시피 그들의 피칭스타일은 너무나도 달랐었습니다. 


하지만


피칭스타일은 달랐어도 그들이 화려했을때 팀은 그들덕분에 화려했던 시기도 맞았고 최하위의 수모도 이겨내었으며


그들은 각각 그팀의 1선발로써 그팀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들이 부상에 신음하며 떨어질때 팀들 역시 유래없는 암흑기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때 팬들은 비록 예전같지 않을지언정 그때의 에이스들을 다시금 격려하고 응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팀의 영원히 잊지 못할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주형광은 은퇴했으나 아직은 뛰고있는 이대진 그러나 그도 얼마가지못해 은퇴하게 될것이기에


내 어린시절의 한페이지를 장식했던 이 두 투수의 모습은 이젠 기억속에서만 만나게 되겠죠.


하지만 이들의 젊은시절의 열정가득한 모습과 아픔을 딛고 오뚝이처럼 재기하던 모습들은 아직도 눈앞에서 생생합니다.






P.S


제가 어린시절부터 골수 해태팬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주형광선수에 대한 정보와 스토리가 이대진선수보다 미흡하게 알고있을수 있으니


혹시 관련 뒷이야기나 틀린부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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