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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청춘의 벽이 무너졌도다 1~3
게시물ID : panic_498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25
조회수 : 14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09 18:43:59
[청춘의 벽이 무너졌도다]





1.


모텔 ‘청춘’.

수많은 젊은 남녀가 청춘을 불사지르며 머물렀다 떠난 곳.
나만해도 아내와의 첫날밤을 그곳에서 지냈더랬지.

물론 신혼여행의 허니문은 아니었다. 연애하던 시절, 우리가 어리고 젊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새삼 추억에 잠기며 담배를 문 입으로 아내에게 소리쳤다.


“혜연아, 들었어? 모텔 벽이 무너졌대.”

“담배연기 안으로 다 들어오잖아.”


아내는 대답대신 핀잔만 줄 뿐이다.

하긴, 방금 아이 낮잠을 재우고 이유식 준비에 한창인 아내 귀에 그런 이야기가 들어올리 만무하다.
턱을 괴고 아내가 하는 양을 지켜본다.
아까부터 냉장고와 싱크대 사이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할테지.

요리엔 젬병이었던 아내도 이제 제법 맛을 낼 줄 알게 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연애때만 해도 나보다 요리를 못하던 사람이었는데...이젠 요리를 동시에 두세개씩 거뜬하게 만들어 내놓는 능숙한 요리사가 되었다. 식탁 의자에 걸쳐놓은 앞치마의 분홍 레이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혼때 샀던 물건 중에 하나라서 그런지 색이 아주 곱다. 어느순간부터 아내는 저런 물건들하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꾸미는 일도, 고운 빛깔의 물건을 사들이는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특별하게 외출하는 날이 아니면 그저 질끈 묶어버리고 마는 저 머리카락에서 풍겼던 좋은 향기들을 떠올려본다.

나하고 똑같은 비누와 샴푸가 아닌, 낯설고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던 아내를 떠올려본다.

그러다보니 문득 그녀가 내가 아는 혜연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막연한 불안감에 심장이 춤을 춘다. 나는 그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그 소동에 아내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녀가 젖은 손을 셔츠 끝에 닦으면서 몇걸음 다가왔다. 불가에서 움직이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사랑스럽다 느꼈다.

나는 민망해서 히죽 웃어버렸다. 내가 아는 얼굴이 맞다.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아는 혜연이었다.
아내는 여기있다. 내 사랑 혜연이. 내 아이의 엄마...


"왜 웃어?"

“태풍 때문에 벽이 부서졌는데 시체가 나왔대. 들었어? 여자 시체래. 그것도 젊은...”

“그만해. 그 얘긴 왜 자꾸 꺼내는 거야??”

“왜 화를 내고 그래, 당신.”

"그게 웃으면서 할 얘기는 아니잖아. 당신 참 이상하다."

"그것 때문에 웃은게 아니고....왜 화를 내?"


그렇다. 아내는 질색하다 못해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변명을 하려다 말고 아내의 싸늘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아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경고한다. 정말 싫으니까 얘기하지말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가 투숙했던 모텔인데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텔 따위는 기억에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옛추억에 잠길 시간은 사치인 것처럼.
나는 다 잊었으니, 당신도 잊고 이제 그만 현실을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육아와 살림에 지쳤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순 없었다.


세상사람들까지는 몰라도 이 동네 사람들은 다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번화가도 아니고 변두리에 위치한 조용한 동네에 경찰차 몇대가 출동할 일은 극히 드물었던 탓이다.

퇴근길의 버스에서도 모두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궁금하지도 않나?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걸까?
그만하라고 쏴붙이는 아내의 표정엔 묘한 혐오감이 서려있었다.

뻗어나가는 내 생각가지를 빤히 안다는 듯이,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지익 그었다.


“그 모텔인지 뭔지 하는 얘기 두 번 다시 하지 마.”

“알았어.”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걸까.
한번 들어보라며 능청도 못 떨어보겠다.

“약속해.”

“알았다니까.”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나는 멋쩍어서 괜히 빈 담배갑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뒤 마음이 풀렸는지, 한풀꺾인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 씻어. 밥 먹게.”

나는 엄마 말을 듣지 않아 벌을 받고 있었던 아이처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씻고 돌아왔을 때엔 언제 끓였는지 짐작조차 못할 찌개와 반찬들이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청양고추를 얇게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인 김치찌개를 가운데 놓고 떠먹으면서 물끄러미 아내를 쳐다봤다.


‘난 매운 거 못 먹어. 김치만 먹어도 다음날 배탈이 나.’


그런 말을 하며 곱게 웃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부부가 되면 입맛도 닮아가는 걸까. 이젠 아내도 매운 음식을 선호하는 나만큼이나 잘 먹는다.

그때 방에서 아이가 깨어나 보채는 소리가 들렸다.

밥이라도 편하게 먹이고 싶어서 내가 가려는데 일어서기도 전에 아내는 벌써 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공중에 떠있는 엉덩이를 의자에 다시 붙였다. 반쯤 닫힌 방문 사이로 칭얼대는 울음소리와 이를 달래는 아내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서 들려온다.
나는 식어가는 찌개를 보고 있다가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밥을 크게 떠서 한입 가득 물고 씹는다.
어찌된 일인지 1분전에만 해도 꿀떡꿀떡 넘어가던 밥이 모래알처럼 입안을 돌아다닌다.
앞에 앉아있던 아내가 사라진 까닭일까...

기계적으로 씹고 삼키길 반복하며 아내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하지만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먹은 자리를 치우고 이유식 냄비에서 이유식을 조금 덜어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아내가 아이 옆에 누워서 머리만 들고 어서 나가라고 손짓한다. 다시 재우려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밖으로 쫓겨나 거실을 서성댔다.

휴일날 할 일이라곤 텔레비전을 보거나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일 밖에는 없었으니,
뭘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고부터 취미생활이나 야외활동은 먼나라 이야기가 되어갔다.
리모컨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애를 재우려는 걸 뻔히 알면서 시끄럽게 텔레비전을 켤 수는 없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나는 라이터를 챙겨서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서도,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에 딱히 이유는 없다.
가정이 생기고 집이 생기고 아이가 생긴 이후로, 왠지 사슬로 묶여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의무감의 사슬, 책임감의 사슬.
여길 떠나선 안된다는...그런 의무감에서였다.

베란다로 나온 나는 담뱃불을 붙이면서 경찰차의 불빛을 찾기 시작했다.

발꿈치를 한계까지 들어올리면 경찰차 끄트머리가 겨우 보인다. 원래는 여기서도 모텔 간판만은 잘 보였는데. 그마저도 태풍에 날아가버려서 더이상 보이지 않게 돼버렸다.
수년을 살아온 덕에 이 동네의 지리에는 빠삭했다. 어느 길에 무슨 식당이 있고, 어느 길로 가면 더 빠른지 등등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내 집의 베란다에 서서 보면, 내 손바닥처럼 뻔하던 길들이 낯선 미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인지 모텔이 어딘지, 어디쯤에 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발이 달려 도망간 것도 아니고, 늘 서있던 그곳에 있을 텐데 말이다.

‘다신 그 얘기 꺼내지마.’

발꿈치를 들고 경찰차를 찾다가 불현듯 아내의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슬그머니 뒤돌아서 아내의 동태를 살폈다.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재우는 중이거나 재우다가 같이 잠든 게 분명했다. 아내가 자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소년이 금지된 것을 상상하듯이,

나는 모텔 벽에 갇혀있었던 젊은 여자에 대해 상상한다.

그 여자가 발견된 곳은 얕은 붙박이장이 있었던 자리라고 했다.
여자를 파묻은 게 실내공사가 있었던 5년 전 초여름 즈음이 아니겠냐는 추측이 있었다.
모텔 '청춘'.
이름처럼 내 청춘의 일부가 머물렀다가 스쳐간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호기심이 자꾸만 발길을 잡아 이끈다.

나는 지폐 몇장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이가 깨지 않게 현관문을 최대한 살살 닫고는,

일단 복도로 나온 다음부터는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아내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2화]



저녁거리 특유의 낮게 가라앉은 공기가 뺨에 느껴졌다. 잔뜩 멋부린 아가씨가 조금전에 이곳을 지나갔는지 달짝지근한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계절상으로는 봄이라지만 바깥은 역시 춥다. 특히 해가진 뒤에는 온도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집밖에 나선지 5분도 채 못되어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짧은 인내심 끝에 소맷부리에 문질러대니 금세 딸기코가 되어버린다.

마침 길가에 주차되어있는 짙게 선팅된 차창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주말 내내 빗질을 건너뛰어서 까치집이 된 머리에, 코까지 딸기가 되어버리니 영락없이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등 뒤, 도미노처럼 끝없이 늘어선 주택들 가운데 어느 집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집에 두고 온 아내와 어린 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잠깐 산책하는건데 뭐.’ 하는 가벼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로등 빛에 늘어지는 내 그림자는 묵직하기만 하다. 발바닥에 붙은 껌처럼 나를 잡고 늘어지려고 했다.

나는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다가 속으로 외쳤다.

‘도대체 왜?’

고작 사건현장에 구경하러 가는 일인데 왜 이토록
오버스러울 만큼의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불륜을 저지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디 외출하시나?”

재작년까지 통장을 도맡았던 박 노인이었다. 그는 늘 그렇듯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박 노인도 모자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인사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긴 했지만 얼굴엔 노인 특유의 주름하나 없이 팽팽했고 풍채는 여전히 대단했다. 젊어서 운동선수를 했다는 말이, 순전히 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정정하단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냥 산책을 좀 하려구요.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오랜만에...”

나는 어물쩍 대답하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박 노인이 늘어지는 말꼬리를 얼른 붙잡았다.

“저 앞 여관에 가는 거지?”

“네?”

“실은 나도 거기 갔다 오는 길이야. 듣기로 자네도 거기 단골이었다더구만.”

“단골이라뇨.”

“거기 한번도 간적 없다고?”


누굴 호색한 취급하는 거야?

하지만 따지고 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보다 적어도 30살은 많은 데다가 동네의 유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별다른 부정도 긍정도 없이 나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박 노인이 등을 팡팡 쳐대며 호기롭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근방에서 저기 한번쯤 안 묵어본 남자가 어딨겠나. 요즘에야 여기저기 모텔이 들어선다고 해두 몇년전만 해도 근처에 여관이라곤 저기밖에 없었잖아. 안 그래? 내, 새댁한테는 비밀로 부칠 테니 걱정 말게.”

“아뇨. 와이프한테 숨기고 그럴 일 없습니다.”

아직도 동네에서 ‘새댁’이라 불릴 만큼 젊은 아내였다. 어느새 이십대 후반,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음에도 차리고 나가면 대학생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일까. 이웃의 기억 속에 아내가 애인이었던 시간은 없다. 연애를 길게 한 축에 속하는데도 말이다. 나와 데이트 하는 동안에 수도 없이 이 골목을 오갔을 혜연이를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만큼 나랑 상관없는 일에 무심한 거겠지.

박 노인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서있는 내 어깨를 한번 더 밀치곤 자리를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인해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채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길 끝에서 경찰차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몸속의 피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서넛 남아있는 구경꾼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건이 터지고 며칠 동안은 이 길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구경꾼이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더랬지.

‘청춘’

그 이름에 담긴 시간이 낙엽처럼 지듯이
모텔 청춘의 간판도 아스팔트 위로 추락해 있었다.

주인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직도 전기를 차단시키지 않은 모양인지 간판 글자들이 파지직 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 주위로, 밤이 되면 으레 불을 찾아모여드는 날벌레들이 달라붙고 있었다.

해외 수사물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출입방지 띠들이 모텔 입구에서부터 쳐져 있었다.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모든 일들이 궁금했다. 수사관들이 증거를 찾으며 현장을 헤집고 있을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돌아갔을까.

자라처럼 머리를 쭉 빼고 기웃거리는 내가 측은하게 보였는지, 어떤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3층 방이래요.”

“3층 몇 호요?”

“308호랬나. 6호랬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나, 봤잖아.”

“뭘 보셨는데요?”

아무래도 이 아주머니는 아무한테나 자랑하고 싶었던 듯싶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기시작했다.

“시체요, 시체. 점심때 파내가는 걸 봤다니까? 그땐 몇 명 없었어. 다 밥 먹으러 가느라고.”

“그래요?”

“박 씨 할아버지랑 나랑 교복입은 애랑 딱 세명이서 봤어요. 으휴~ 얼마나 끔찍했는데.”

박 씨 할아버지라면 조금 전에 만난 박 노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도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기야 했지만, 대놓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것처럼 상기되어있는 아주머닐 보자 한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사건인데...

“경찰은 아직도 있는가 보네요? 경찰차도 서있고...”

“아니야. 내일 아침에 다시 온다고 가더라고.”

“그럼 차는 왜?”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는 경찰차를 가리키며 묻자 그녀는 히죽 웃었다.

“밤사이 누가 들어 갈까봐 일부러 세워둔 거지.”

“정말 철수했다구요?”

“아까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걸 내가 다 들었다니까. 지금 안에 아무도 없어.”

“그럼 왜 여기 서있으세요?”

“그야 궁금하잖아. 밤이 되면 귀신이 나올지 누가 알아요?”

이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말이 많은 수다쟁이다.
어느 동네나 한명씩 있을 법한 오지랖 넓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예에...”하고 말을 흐리곤 옆으로 몇걸음 떨어졌다.
얽히고 싶지 않았던데다가 그녀의 수다 상대가 되어주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가오며 속삭인 말에는 관심이 갔다.

“그래서 말인데...이따가 들어가보지 않을래요?”

“네에?? 아무리 그래도 범죄현장인데...”

“글쎄 아무도 없다니까. 몰래 들어가서 구경만 하겠단 거잖아요. 혼자 들어가기엔 무서워서 그래요. 궁금하지 않아요?”

“.......”

“둘이 들어가면 맘도 놓이고.”


혹여 내가 거절할까 싶어 아주머니는 노심초사 했다.
아무리 참견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한다 해도 살인이 난 빈 건물에 혼자 들어가는 건 무서울 테지.
컴컴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라...슬슬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아주머니는 바로 코앞에서 부담스럽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초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에 입술만은 붉게 칠했는데, 눈썹은 문신인게 확실했다.
아내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눈썹 문신을 단체로 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던게 생각났다.
생각하는 동안 옆구리를 쿡 찔렸다.

"갈거지??"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짙은 붉은색 립스틱이 양 옆으로 쫙 찢어졌다.
정말 신이 났는지 그녀는 웃는것에 그치지 않고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럼 여기서 자정에 봐요.”

근처에 서있던 남자가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 눈초리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의심하는 듯하다.
아주머니는 마지막으로 내 입에서 몇시에 만나기로 했는지 확인을 받고 나서야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씩씩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팔을 흔들자 덩달아 그림자도 춤을 춘다. 그녀가 코너를 돌아가자 그림자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주머니가 떠나자 남자 한명과 나만 둘이 남겨지게 되었다.

‘저 남자도 몰래 들어가려고 기회를 엿보는 걸까. 아니면 혹시 살인범??’

범인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현장에 다시 찾아온다느니 하는 말이 있지 않는가.
아주머니의 주책이 전염된건지 잠깐 동안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생각을 잊기 위해서 헛기침을 하며 모텔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슬쩍 발걸음을 돌렸다.
아내가 내 부재를 눈치채기 전에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지배당해서였다.

전혀 초조할 것 없는데도 나는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걸으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사건이 일어났다는 3층의 창문을 헤매고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

아무리 악의없는 호기심이라고 해도 빈 건물, 그것도 살인현장에 불법침입을 한다는 건
철없는 어린 시절 했었던 담력훈련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 어느때보다 냉철한 이성이 발휘되어야할 순간이었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아주머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낯선 여자와 한밤중에 몰래 모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다니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바로 그때 아내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도와줄까?"

"됐네요."

그러곤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간다. 나는 빨래를 개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계가 째깍째깍 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가지 않는다.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음에도 바늘은 숫자 10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11시도 안된,
그러나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약속시간까지 앞으로 1시간 남짓 남아있었다.
아내는 옆에 앉아서 빨래를 개며 드라마를 보느라고 내 초조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빨래를 정리하느라 고개를 숙일 때마다 드러나는 가느다란 목선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흘러내려 있었다.
하루가 얼마나 정신없고 고단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이런 사람을 놔두고 하루종일 모텔 생각에 빠져 있었다니...무슨 변덕이 일었는지 나는 대뜸 손을 뻗어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래?”

“그냥...”

뒤돌아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아내의 볼이 봉긋하게 올라붙는 걸로 보아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더 힘을 줘서 꽉꽉 지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팔뚝으로 내려오자 아내가 “아”하고 날카롭게 신음을 흘렸다.

“거긴 하지마.”

“왜....또 긁었구나.”

딱지를 건드려버렸는지 아내의 하얀 셔츠에 피가 묻어난다.

‘또’ 긁었구나.

나는 멀어지는 아내를 보며 내가 뱉은 말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상기해보았다.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피부를 긁어대고는 했다. 말로는 가려워서라고 했지만 실은 습관이라는 걸 눈치챈지 오래였다. 피가 날 때까지 긁어야 직정이 풀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피부과는 갔다왔어?”

“알레르기래.”

“알레르기? 진드기 같은 건가?”

“몰라, 나도. 자꾸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마. 나도 괴로워.”

아내는 다 개키지도 않은 빨래들을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이가 잠들어 있는 방은 우리집에서 성역이나 다름없었다.
아이가 잠에서 깨면 아내를 귀찮게 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나는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아이를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겸연쩍게 소파에 주저앉아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내를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자정이 다가온다는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11시를 넘겨버린 시계는 또다시 야속하게도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초침이 움직이는 것까지도 집중해서 보다가 30분이 넘어서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으로 가서 아내의 기척을 살피니 잠들었는지 죽은 듯 조용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문을 빼꼼 열어서 아내가 누운 것까지 확인하고 만다.

"미친놈."

나는 어둠속에서 중얼댔다.
걱정과는 별개로 몸은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자정이 되기까지 10분이나 남은 시간이었지만
아주머니는 벌써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있었는지 내가 모텔 주변에서 기웃대니 갑자기 팔을 확 잡아 당겼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머니가 히죽거렸다.

'아깐 튕기더니. 속으론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구만?'

하는 의미인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월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든 걸까
길거리에는 지나는 사람도 드물었다.
우리는 몇분간 쭈그리고 앉아서 대단한 범죄를 공모하는 사람들처럼 주변의 기척을 살피고 또 살폈다.
마지막으로 아저씨 한명이 재채기를 하며 지나간 다음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피둥피둥한 몸으로 제법 움직임이 빨랐다.

아주머니가 먼저 입구를 바리게이트처럼 막아놓은 띠 안으로 몸을 숙이고 지나갔다.
뿐만아니라
그보다 키가 컸던 내가 정수리 부근이 걸려서 낑낑거리니 혀를 쯧쯧차며 나를 도와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동시에 잠깐 멈춰섰다.

청춘이, 비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3화]



삐걱...
우리가 걷는 뒤로 배경음이 깔린다. 삐걱대는 마루소리가 꽤 을씨년스럽다.
나는 겁이 나서 연신 뒤쪽을 확인했다. 거의 세 걸음에 한번씩 돌아보는 수준이었다. 자꾸만 뒤처지는 걸음에, 아주머니가 새된 목소리로 나를 힐난했다. 옆에서 거치적대니 인내심이 끊어질 만도 했다.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요? 젊은 사람이.”
“그러는 아주머니도 무서워서 저 부른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두 댁같이 겁 많은 남자는 또 첨보네, 첨 봐.”
“그런데 정확히 뭘 찾으시려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귀신이지.”
“만나면 어쩌시려구요?”
“만나면……도망쳐야지. 퇴마사도 아니고.”

그 솔직함에 무서움도 잊고 허허 웃어버렸다.
아주머니도 겸연쩍게 웃고는 서두르자며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실내등이란 등은 모조리 꺼진 상태였지만 건물 바로 앞에 있는 가로등 덕분에 걷는데 지장이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사실, 태풍의 피해를 입은 건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꽤 깨끗한 편이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기 직전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청춘 모텔의 주인 부부 얼굴을 떠올렸다.
금실 좋은 부부의 표본처럼 늘 미소를 담은 얼굴이었고, 서로를 부를 때도 목소리나 호칭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간혹 아르바이트를 쓸때도 있었지만, 그 긴 세월의 대부분을 부부가 교대로 일하며 지켜왔다.

“나는 위층에 가볼 테니까 아저씬 밑에를 살펴봐요.”
“예? 따로 따로 움직이자구요?”
“지금 느긋하게 모텔에 방 잡으러 왔어요? 이런 일일수록 신속이 생명 아니겠어?”
“그래도....”
“1,2층은 나눠서 대충 훑어보고 3층에서 만나요.”

아주머니가 위층으로 쿵쾅대며 사라지자마자 묵직한 정적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천장을 보며 아주머니의 동선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코끼리가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천장이 삐걱대며 걷는 소리가 들릴 리는 만무했다.
잠깐 주변을 살펴보다가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온 미니손전등을 꺼냈다. 손전등빛이 왔다갔다하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부터 보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했다.
나는 벽으로 다가가 손전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불빛이 닿은 곳은 바로 카운터 뒤쪽의 벽이었다.

손전등 빛이 비추는 범위는 의외로 한정적이었다. 시력이 좋은 사람었대도 이 불빛으론, 몇 미터 밖의 물체를 확인하는데 무리가 있을 터였다. 나는 카운터를 훌쩍 뛰어 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손전등 빛을 비추었다. 여러장의 사진이 손전등 불빛에 푸르게 빛을 발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다. 아주머니하고 들어올 때 스쳐지나가면서 봤었던 사진이었다. 카운터 벽에 걸린 여러장의 단체사진. 장사 좀 오래했다 싶고 단골이 있다싶은 장삿집이면 으레 걸려있는 그런 사진들이었다. 이곳이 모텔이라는 전제를 깔면, 주인내외와 어지간한 친분이 있지 않고서야 사진을 벽에 걸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룻밤 스쳐가는 뜨내기손님에게 댁의 사진을 좀 걸어놔도 되겠냐고 물었다간 단번에 미쳤냐는 대답이 돌아왔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 벽에 걸려있는 사진의 주인공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 모텔과 주인 부부에게만큼은.

아내와의 연애시절 동안에 이곳에 몇 번이고 투숙했지만 카운터 뒤의 사진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텔이라는 장소 자체가 나를 겸연쩍게 만들기도 했거니와, 사진 몇 장이 혈기왕성한 청년의 눈길을 사로잡기엔 무리였다. 바로 옆에 예쁜 애인이 팔짱을 끼고 서있는데 남의 사진이나 들여다볼 남자가 어디있을까. 것도 모텔에서.

그런데 이 순간,
사진들이 이상할 만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나조차도 이해 불가능했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사진 속 얼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본능이 찾고자하는 인물을 발견하기란 아주 쉬웠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 사람은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 구석에 서있는 젊은 여자였다.
수수한 단발머리에 앳된 얼굴, 젊다기보다 어리단 표현이 더 어울리는 소녀였다.
그 소녀는 다름 아닌 혜연이, 내 아내였다.

이건 아내의 사진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소녀적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고등학생이 됐거나,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거나, 그쯤으로 보였다. 많아봤자 열여섯,... 아내 옆에는 또 다른 소녀가 서있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소녀는 아내보다 서너살 연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이차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둘 사이가 막역하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꽤 친밀해 보였으니까.

사진에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람은 아내와 소녀밖에 없었다. 그 소녀를 제외하면 연령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십대인 사람은 그 둘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사진인가 싶어서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그들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찍은 단체 사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가족사진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내의 집안은 대가족이 아니었던데다가 손이 귀해, 명절 때마다 모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더욱 찝찝한 사실은,
내가 이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는 거였다.

“......뭐지....?”

나는 어둠속에서 홀로 독백했다.
아내는 이 모텔에 관해 얘기를 꺼내는 것만 해도 질색했었다. 그런데 왜 아내의 사진이 이곳에 버젓이 걸려 있을까. 더욱 충격적인 건 내가 이 사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였다.

내 숨겨진 무의식이 이 사진을 발견하길 바랐던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이 사진을 발견하고자, 나는 아내의 말도 어기고 이 늦은 시각, 쥐새끼처럼 몰래 범행현장에 숨어든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우당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연이어 쿵쾅거리며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아주머니의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녀는 헉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뛰, 뛰어요. 들켰어!”
“!!”

우리는 순식간에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이곳에 들어올 때처럼 입구에서 낑낑거리는 것도 없었다. 신속하게 빠져나와 거리를 잠식한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곤 누가 쫓아오는지도 확인하지 못하고 전력질주했다. 그렇게 계속 뛰다가, 모퉁이를 돌아서 불법 주차된 차들이 도미노처럼 이어진 곳에 가서야 겨우 멈춰서서 숨을 골랐다. 우리는 덩치 큰 트럭 뒤에 쭈그리고 앉아 숨을 토해냈다.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맨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주머니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녀는 비지땀을 소매 끝에 찍어 닦아냈고, 나처럼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누가 우릴 봤어. 창문 근처에서 기웃거리더라고.”
“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분명히 들었다니까. ‘거기 누구세요?’하는 소리를.”
“1층에 있었는데 전 못 들었어요.”
“진짜래두. 여자목소리였다니까.”

그녀의 말이 진실이든 단지 착각이든지간에 간담이 서늘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정수리 부근이 찌릿했다. 땀으로 범벅된 등골은 싸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어쩌죠?”
“뭘 어째. 시치미 뚝 떼고 있어야지. 아니라고 하는데, 별 수 있어? 여기 사는 사람이 몇인데, 주민들 일일이 대조해 볼 것도 아니구.”
“........”

튀어오를 듯 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쓱 살펴보았다. 홍조가 피어올랐던 얼굴을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극도의 긴장 때문이었다. 우리는 섣불리 일어설 수 없었고, 지린내가 진동하는 골목에 앉아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혹시 미행이 따라 붙었을 수도 있으니까. 뉴스에선 증거조차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현장을 수상하게 기웃대던 두 명을 쉽게 풀어줄 리 없었다. 잡혔다간 우리가 용의자로 지목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두 번째로 시계를 확인했다. 아주머니가 몇 시냐고 물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나도 슬그머니 따라 일어났다. 차가운 바닥에 장시간 앉아있었더니 엉덩이가 저려왔다.
우리는 인사 한마디 없이 골목을 빠르게 가로질러, 각자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찢어졌다. 아주머니가 가는 걸 확인하고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스릴로 치면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여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은 밤이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땀만 뺀 허무한 밤이기도 했다.
스릴과 허무함을 종합해보면, 오늘밤의 총점은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현관 앞에 서서 열쇠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던 나는 욕을 내뱉었다.

‘제길.......’

손전등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잡아 끄는 바람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걸 이제야 생각하다니....
나는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간, 잠깐 담배 피우러 산책을 다녀왔단 핑계도 먹혀들지 않을 터였다. 아니, 사실 어떤 핑계라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결혼한 유부남이 새벽 1시가 넘도록 밤이슬을 맞고 다닌다는 건 내가 생각하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늦었는데 손전등을 찾으러 갔다 오면 아내가 눈치 채겠지.
아니, 그 전에 경찰에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내는 얼마나 황당할까. 동네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서에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조심히 현관의 잠금장치를 푸는 쪽을 선택했다. 손에 찬 땀 때문에 열쇠가 미끌거리며 도망치려고 했다.

달칵.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달칵, 쇳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진다.

“이크.”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웃의 창문에서 비치는 불빛을 제외하곤 집안은 불빛하나 없이 어두웠다. 게다가 조용하긴 얼마나 조용한지, 아이가 태어나고 이렇게 평화로운 밤은 몇 번 없었다.

나는 소리를 죽이고 외투를 벗어서 손에 들고 화장실 조명 스위치를 켰다.

“!!”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아내였다.
아내가 의자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들었다가 깨어난 건 분명 아니었다. 나를 보는 눈빛에서 졸음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고요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휴. 놀래라....뭐하고 있어, 어두운데서.”
“당신. 거기 갔었어?”
“거기라니...”
“그 모텔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다신 얘기도 꺼내지 말고 눈길도 주지 말라고.”
“소리 낮춰. 애 깨겠어. 왜 그래, 당신?”

나는 아이가 자고 있는 방을 의식하면서 말했지만 아내는 웬일인지 안중에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아이가 늘 0순위였으면서.

“기억 못하는 척 하는 것도 지겨워. 언제까지 가증 떨고 있을 심산이야??
나한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당신은 고고한 척 그렇게 살겠다고? 정말, 그러고 싶어?”

“뭐어??”

더한 독설이 쏟아져 나오리라 생각했다.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많은 말과 감정이 쏟아져 나와, 나를 숨막히게 하리라 생각했다. 아내가 여태까지 해온 걸로 보면 분명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는 볼에 흐른 눈물을 손으로 훔쳤을 뿐이다. 그 손을 셔츠에 문질러 닦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곤히 잠든 아기가 엄마 품 안에서 두 다리를 맥없이 흔들었다.
아내의 손에는 외출용 기저귀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아기를 재우고 가방을 챙기고 자기 옷까지 갈아입으려면 족히 한시간은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는 작정하고 아이 외출가방을 미리 꾸려놓은 게 분명했다. 기저귀며 분유 같은 것들로 꽉꽉 찬 가방의 배가 불룩 솟아 있었다.
아내는 그것을 들고 매정하게 돌아섰다.

“당분간 친구네 가있을게.”
“여보....왜 이러는 거야, 고작 그런 가쉽거리 때문에. 정말 이러고 싶어? 재미로, 그래...! 재미로 한번 가본 거야. 왜 이래 정말.”
“며칠만이야. 전화할게.”

계단까지 따라 내려가서 붙잡았지만 아내는 전에 없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연애할 때에도 이렇게 크게 싸운 일이 없었다. 아내는 조용히 속으로 삭이며 화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나중에 말하는 편이었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미리 불러뒀던 게 분명한 콜택시 한 대가 아내 앞에 끼익 멈춰섰다. 아내는 확인도 하지 않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나는 허망하게 서서 택시가 떠나는 걸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서야, 내가 맨발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터덜터덜 발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늘 보던 거실이고 부엌이었지만 어딘가 휑한 기분이었다. 관속처럼 어두웠고, 음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을 켜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어둠에 파묻혀버리고만 싶었다.

갑자기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나는 물을 찾아 어둠을 헤치고 냉장고로 걸어갔다.
보통의 차가운 물로는 부족했다. 얼음을 부수어 넣은, 그런 냉수로 목을 축이고 싶었다.
물병을 식탁 위에 쿵 내려놓고 얼음을 찾던 나는 무심코 식탁 위를 보았다. 시야에 작은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게 무엇인지 인식하자마자 나는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라이터 크기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

나는 멍하니 그것을 들어 올려서 버튼을 눌렀다.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그 특유의 느낌이 손끝에서 퍼져나갔다. 나는 벽에 동그란 빛의 구가 생겨나는 광경을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

이건 내가 조금 전에 떨어뜨린 손전등이었다.

'진짜래두. 여자목소리였다니까.'

순간, 탐험가처럼 어둠 속을 누비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때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이를 생각하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다. 스트레스는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 몸이 간지러웠다. 불이 붙는 것처럼 화끈거리기도 했다. 나는 아내처럼 팔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알레르기가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간지러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내 없이 맞이한 아침은 참으로 비참했다.
아기의 칭얼대는 소리도, 까르르 숨 넘어가게 웃는 소리도 없이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까치집이 내려앉은 머리를 들고 일어나 앉아서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난밤의 대단한 사건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그러나 아내의 부재가, 그게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시간과 날씨를 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아침방송을 켜놓고 씻으러 들어갔다 나오니, 익숙한 동네가 화면 가득 방송되고 있었다. 우리 동네였다. 정확히는 모텔이 있는 골목길. 곤두박질 친 모텔 간판은 여태까지 치지직 대고 있었다. 구경 나온 많은 주민들 사이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통통한 몸집. 그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카메라를 의식하듯이 한번 쓱 쳐다보곤 얼굴을 피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어젯밤에 그 난리를 쳐놓고 꼭두새벽부터 구경하러 가다니....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새벽 건물의 지하에서 새로운 시신이 발견된 가운데, 수사의 방향이......]

“뭐?? 뭐라고??”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지하에서 한 구가 더 발견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것도 모르고 거길 헤집고 다녔다는 건가? 아내가 화를 낼만도 했다. 아주머니와 내가 어젯밤에 모텔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라도 하면 단번에 뉴스에 출현하게 될 신세로 뒤바뀔 거다.

[........때문에 신원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있지만, 20대 중반의 젊은 남성의 유골이라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수사를 진행함에 따라 정보를 공개할 예정이며, 복원프로그램으로 피해자들의 몽타주를..........완성된 몽타주는 오늘 저녁께 공개될 예정입니다. 최근 10년간 K지역에서 발생한 실종사건은 총 20여건으로.........]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어안이 벙벙했다. 고요한 호수에 누가 돌을 집어 던진 것처럼, 작은 동네에 파란이 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서있는 기분이었다.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아내, 혜연이와 스스로 걸어 들어가려는 나. 누가 어리석은 걸까.








하루종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초조함에 담배를 평소보다 두 배 가량 피웠다. 끼니도 거르고 커피와 담배로 종일 버티고 나니,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선 거의 녹초가 되어버렸다. 나는 내려야할 역을 몇정거장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 내가 내려야할 다음 역이 아내 친구가 사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친구네 집에서 지낸다고 했으니, 그 여자네 집에 갔을 게 뻔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그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친정은 멀리 있었기 때문에 어린 아기를 데리고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을 거고.

결국 아내를 데리러 가기로 마음먹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무의미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뉴스를 보기로 했다. 모텔 청춘에 관한 뉴스 동영상을 누르자 카랑카랑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얼른 이어폰을 꼽고 소리를 높였다.

벽 속에서 발견된 여자의 몽타주가 완성됐다는 소식이었다.
범인의 몽타주가 공개됐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급히 완성시킨 표가 나는 여자의 복원된 얼굴은 더욱 측은해보이고, 더욱 가련해보였다.
게다가 아주 낯이 익었다.

“아!”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내뱉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뉴스화면에 집중했다. 정지시킨 화면을 크게 확대했다. 역시 맞다.

그 여자다.
아내의 팔짱을 끼고 있던 그 소녀.

모텔 벽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진 속의 인물이었다.

단순한 우연이라 치기엔 묘한 구석이 있다. 바보라도 알아차릴 만큼, 석연찮은 무언가가 있었다.

뉴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내려야할 역에 도착했다. 나는 황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고 활짝 열린 문 쪽으로 달려갔다. 우울한 기분은, 우중충한 날씨도 한몫했다. 금세 비가 쏟아질 듯 찌푸린 하늘 밑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우산장수가 색색의 우산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가 우산 하나 사가라며 나를 붙잡았지만 이를 무심히 지나쳐갔다. 육교를 건너자마자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얕은 후회를 했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말이 맞지? 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우산장수의 능글맞은 웃음을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내 친구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땐 어깨며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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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이곳에서 연재했던 글인데 요즘 다시 쓰고 있습니다.
 써놓은 분량이 좀 있어서 당분간 매일 한편씩 올릴 계획이에요.
 잘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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