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소설] 청춘의 벽이 무너졌도다 4
게시물ID : panic_498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19
조회수 : 110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6/10 12:14:54

 

 1~3 편> http://todayhumor.com/?panic_49808 

 

 

 

 

 4.


아내의 친구는 누군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그런 부주의함을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속사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린신부를 데려갔으면 잘 보살펴줘야지. 눈물바람으로 새벽에 도망쳐오게 만들어요? 아저씨 정말....그렇게 안 봤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신부’ 라고 부를 정도로 아내가 어렸던가? 내 기억으론 아내는 나보다 세 살 밑이었다. 나를 ‘아저씨’라 부르고 있는 아내의 친구의 앳된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목선이 드러나게 짧게 친 단발머리, 보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핫팬츠, 짙은 아이라인. 거리에 나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이십대 초반 여자들의 패션이었다.

늘 편한 옷에 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아내였지만 동안이기는 했다. 이웃들도 다들 ‘새댁, 애기엄마’하며 아내를 귀엽다는 듯이 불렀으니까. 애가 애를 낳았다고 짓궂게 농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멋쩍게 웃으며 “아내가 동안이죠?”하고 넘겨버렸지만 마음에 걸리기는 했었다. 내가 “그렇지?”하고 물어도, 아내는 웃지도 않고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서른, 아내는 스물일곱이었다. 요즘 출산연령이 올라가는 추세기는 해도, 스물일곱에 첫아기를 낳은 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빠른 편은 아닐 것이다. 아내는 다만 우두커니 서서 어색한 표정을 감추려고 했을 뿐이다.

“그 거지같은 사이비 단체에서도 빼내주고, 재활 치료도 도와주고 해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남자들은 다 똑같은 건가요? 결혼하면 이제 끝이야?”

여자가 볼멘소리로 불평했다. 나를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고.
그러나 그녀가 하는 말은 내 기억에 없다.

재활치료니 사이비 단체니 하는 건 처음 듣는다.
분명 나도 알고 있는 얘기처럼 말하고 있는데도. 낯설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최근 기억에 없는 것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 모텔이 무너져 내려 시체가 발견된 다음부터
내 머릿속도 멋대로 헤집어지고 있었다.

“야. 나와봐. 너희 서방님이 데리러 오셨다. 내가 새벽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내의 친구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그었다.

“잘 산다더니 뭐야 대체? 몸은 또 왜 죄다 긁어놓은 거야?”
“짐 챙길게. 잠깐 나가있어.”

아내의 기운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아기 소리도 들리는 걸로 보아, 둘 다 늦은 낮잠에 취해있었던 모양이다.

“저거 대체 왜 저러는 거래요?”
“네?”
“자꾸 긁는 거 말예요. 심리가 불안하면 자해같은 걸 하기도 한다던데.”
“병원에선 알레르기라고....하더라구요.”
“어? 잠깐. 아저씨 팔은 또 왜 그래요? 부부가 아주 쌍으로......”

매서운 눈초리가 내 셔츠 안을 파고들었다. 나는 걷어 올린 소매를 슬그머니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 나를 괴롭혔던 가려움증은 자고 일어나니 말끔히 나았다. 병원에 갈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안 그래도 요즘 그 동네 소문이 흉흉하던데, 애엄마 새벽에 내돌리지 말고 다정하게 좀 대해줘요. 산후우울증, 뭐 그런건 아닌지 병원에도 좀 가보고요.”
“아셨어요?”
“그럼요. 뉴스만 틀면 그놈의 모텔 얘기 밖에 없는데.”

“가요.”

아내가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왔다. 나는 얼른 가방을 받고, 아기의 보들보들한 볼에 입을 쪽 맞추었다. 쪼옥,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다시 입을 가져가는데, 뒤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친구가 뒤에서 기가막히다는듯 웃고 있었다. 그럴거면 왜 싸우냐는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아내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어 입이 꿈틀거렸지만, 떠오르는 대화거리라고 해봤자 ‘모텔’에서 발견된 또 한구의 시체와 여자의 몽타주 밖엔 없었으니 차마 내뱉을 순 없었다. 아내는 내가 모텔에 얼쩡거리고 다니는게 싫어서 집을 나갔으니까. 겨우 달래서 돌아오는 길에 그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미안했어.....”
“..........”
“여보. 내가 정말, 다시는 안그럴 게. 어제는 머리가 어떻게 됐나봐. 종일 그 생각밖에 안들어서....꼭 뭐에 홀린 것처럼. 당신이 그렇게까지 싫어할 줄 몰랐어.”

택시 기사가 힐끔 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내 손을 꼭 붙잡고 말을 이어갔다.
아내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체가......하나 더 발견됐대.”

깊게 잠긴 목소리였다. 아내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어? 어.........그랬다더라.”

여자의 몽타주,
그 여자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얼굴 보셨습니까?”
“예?”

갑자기 택시기사가 끼어들었다.

“그 여자시체 몽타주 말입니다. 그 뼈를 가지고 뭐 어떻게 복원기술을 써서 만들었다는데, 어찌나 신기한지. 요즘 세상 진짜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니까요.”
“아.....네.....”
“보셨어요?”
“근데 그 아가씨 얼굴이 낯이 익더라고. 요 근처 살던 학생이었던 것 같아. 무슨 여대에 다녔던 것 같은데. 학교 앞까지 내가 몇 번 태워준 기억이 있거든.”
“그래요?”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아내는 고집스레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마치, 동네 사람들이 어린 와이프 얻어 좋겠다고 내 등짝을 휘갈길 때, 방관자처럼 서있던 그때처럼. 여기서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입술이 어색하게 다물어져있을 게 뻔했다.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나는 샐쭉 웃으면서 아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아저씨 죄송한데 요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 좀 해주시겠어요?”








오랜만의 외식이라고 해봤자, 젖병을 달고 사는 아기를 데리고 나갔다면 집이나 밖이나 매한가지다. 품에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칭얼대는 아기 덕분에 아내는 식사조차 버거워보였다. 내가 얼른 입에 쑤셔넣듯 먹어치우고 아기를 보는 사이에 지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부터였다.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더니 이내 몸을 긁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와서는 점점 더 심해져서, 현관에 들어섰을 때는 벅벅 소리가 날 정도로 긁어대고 있었다. 어젯밤 나도 저런 모습으로 긁어댔으리라 상상하니 소름이 쭉 끼쳤다.

“여보, 또 왜 그래?”
“간지러워.”
“왜 그러지. 식중독인가? 약국 문 아직 열었을 텐데. 가서 약 사올게. 참. 저번에 알레르기 약은......”

벅벅벅벅!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긁기 시작했다. 어찌나 독하게 긁어대는지 당장 핏물이 뚝뚝 흘러도 이상치 않을 정도였다.

“그년이 돌아오려고 하는 거야.”
“.............뭐?”

아내 입에서 나온 생소한 욕설에 몸을 굳혔다.

“이 거지같은 몸뚱어리가 날 밀어내고 있는 거라고!”
“혜, 혜연아. 나 좀 봐봐. 응? 그만 긁어. 피나잖아.”
“부작용이 있을 거란 말은 없었잖아. 오빠, 오빠도 그때 들었지? 그년이 이런 일이 있을 거란 말은 안했잖아. 그냥, 자기 대신 살면 된다고......그랬었잖아.”
“부.......작용? 누가.....”
“웃기지 말라 그래. 난 다신 안 죽어. 어떻게 얻은 몸인데, 어떻게 얻은 아기고, 어떻게 얻은 인생인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내 주변을 서성이다가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아내가 품 안에서 바둥거리며 악쓰는 게 느껴졌지만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차츰 진정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소름끼치는 행동을 하고 이상한 말을 내뱉어도, 이 포근한 느낌은 내가 사랑하는 혜연이가 맞다. 아내가 어느새 내 등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끌어안고 있었다.

“오빠. 기억나?”

평소의 혜연이로 돌아와있었다.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나 역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뭐가?”
“병원에서도 이렇게 꽉.......안아줬었잖아.”
“언제든 안아줄 준비가 돼있지. 그래서 우리 색시 서방님인거 아니겠어?”

순간 기억나지 않았다. 아기를 낳던 날을 말하는 건가 싶어 애매하게 에둘러 말했다.
아내는 귀신같이 눈치를 챈 건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미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무서워. 내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아.........이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너무 너무 무서워.”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