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찾는 행위는 가장 자연스런 사람의 본능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리고 그 관계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려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이며 능력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정의가 되서는 안된다. 타인은 타인. 나는 나. 다른사람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으려 함은 결국 아직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찾지 못함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나를 침착하고 무거운 사람으로 알고 누군가는 생각 깊고 말이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며 누군가는 특이하고 가벼운 사람으로 알고 있고 또 누군가는 말 많고 실속없는 사람으로 알며 또 누군가는 이런 모습 전부를 아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러한 것들 이외에 수 없는 내가 있다. 길가의 나물파는 할머니에게 친절했으면 나는 친절한 사람인가. 인사도 없이 편의점에 들어가 술을 사고 말한마디 없이 나가버리는 나는 불친절하고 과묵한 사람인가. 어떤것이 나의 본질이라 말을하는것은 내게 있어 불가능하다. 단지 나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며 내 무의식이나 의식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세상은 하나의 연극이고 우리는 극 중 배우라는 어떤 작가의 말은 그렇기 때문에 가슴에 더욱 와 닿는다. 내가 희극을 공연하는데 어찌 비극을 행동할 것이며 내가 비극을 공연하는데 어찌 희극으로 행동하여 비극임을 주장할 것인가. 문제는 희극과 비극이 정해지는 기준에 있다. 육십억 모든사람의 입맛에 똑같은 희극과 비극은 흔치 않다. 그러므로 나는 내 행동에 나만의 기준을 내세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교육받은 것이건 환경에 의한 것이건 본성에 의한 것이건. ㅡ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보는 나라는 사람을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ㅡ그러므로 나는 자립된 내가 되어있는 것이 맞다.
누군가에게 나를 동질하려 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 사람의 형상이라 함은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으며 그것을 담은 얼굴이 있다. 하지만 다 그 모양새는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 외에 무언가를 동질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강요할 수도 없으며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고립될 필요도 없다. 눈큰 사람이 레이저 광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코큰사람이 코로 음식물을 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너는 너. 나는 나. 그냥 그저 그러면 되는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지만 너나 내가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할 연 이라는 한자는 그러함을 의미한다. 그러하다. 그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