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판단 기준의 우선순위가 다르구료. 러셀의 활동가로서의 면모에 더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소만, 그 점은 나도 역시 존경하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대한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소. 내 생각이나 후아암햏의 생각이나 어차피 90이냐 100이냐의 차이이므로...
내 애초에 그런 의문을 가진 이유는, 후아암햏이 정작 자신의 비판적 사고라는 여과를 거치지 않고 버트란트 러셀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소. '위대한 철학자인 러셀님은' 이라고 말문을 연 점, 러셀의 많고도 많은 글 중에서도 유독 끊임없는 계몽에 의한 무한한 이성의 발전이라는 낭만적인 테마를 함의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글을 인용한 점. 중세 유럽에는 말이오, 권위에의 호소라는 논증법이 있었소. 단지 성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참인 명제를 대전제로 놓고 나머지의 논증을 연역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오. 물론 논증 과정 자체는 타당할 지 몰라도 대전제의 진리가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논증에 의한 결론의 진리가가 반드시 참이 될 수는 없는 것이오. 거기에 관해 러셀 자신이 언급한 부분을 여기 발췌해 보겠소.
"오늘날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중세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대부분이 현재는 불필요하며, 실제로는 종교적 생활에 대해 방해밖에 안된다고 느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이 부딪친 반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런 반대를 합리적으로 보이게 해 준 관념 체계 속으로 일단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사제에게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느냐고 물었다고 가정하자. `그대가 교수형을 받게 될 것이므로'란 대답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 하면 교수형을 정당성을 설명해야 할 것이며, 또 경찰의 방식은 확실하지 않아 많은 살인자들이 도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융성하기 전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할 만한 것으로 보인 답이 있었다. 곧 시나이 산에서 신이 모세에게 계시를 준 십계명에 의해 살인을 금한다는 답이다. 지상의 정의를 교묘히 피한 범죄자도 신의 분노는 피할 수 없었는데, 신의 분노는 뉘우칠 줄 모르는 살인자들을 교수형보다 더 무서운 끝없는 형벌에 처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서를 전체로서 받아 들일 경우에만 그대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성서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같이 보이면, 우리는 갈릴레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진술을 지지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인자들과 기타 모든 종류의 약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논의를 지금 받아들일 사람은 극소수라 할지라도 그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도덕적 유기(遺棄)를 한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중세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견해는 오늘날에는 상실된 어떤 논리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과학이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교리의 권위적 해석자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주장하기를---그의 견해는 아직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로 되어있다---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진리들 가운데 일부는 계시의 도움없이 독자적인 이성의 힘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전능하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존재가 그 가운데 하나다. 창조주의 전능과 자비로부터 그가 그의 피조물들이 그의 섭리에관한 지식, 곧 그의 뜻을 순종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지식도 없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따라 나왔다. 그러므로 신의 계시가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으며 이 계시는 물론 성서와 교회의 결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이 성립하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의 나머지는 복음서와 전(全)그리스도교 평의회의 성명들로부터 추론될 수있다. 이 모든 논의는 그리스도교 국가의 거의 모든 인구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전제로부터 연역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논의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때때로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해도, 당시의 대다수 지식인들에게는 그 오류가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중략) 중세의 견해와 근대 과학의 견해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권위에 관한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성서, 가톨릭 신앙의 교의, 그리고 (거의 동등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독창적 사고며, 심지어 사실들에 관한 탐구도 사변적 대담성의 이 불변의 경계선들에 의해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어서는 안되었다. 지구의 정반대 쪽에 있는 지점에 사람들이 있는지, 목성이 위성들을 갖고 있는지, 물체가 그들의 질량에 비례하는 속도로 낙하하는지 등의 물음은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나 복음서로부터의 연역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물음들이었다. 신학과 과학의 싸움은 거의 권위와 관찰 사이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어떤 중요한 권위가 어떤 명제들을 참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묻지는 않았다."
이런 것이오만, 뒤에 이어서 달린 글들을 보니 후아암햏이 러셀의 권위에 의존하여 '위대한 러셀이 말하였으므로 무조건 참이다' 라는 식으로 인용한 것 같진 않구려.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서두가 길어졌소만...
'종교가 인간의 한계를 커버한다'라는 표현은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소. 그런 이유로 이 '종교에 의해서 인간적 한계를 완벽하게 보완한다'라는 말도 한 것 같소만, 내가 쓴 '어루만져 준다'라는 표현은 '커버'나 '보완'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나 달램에 가깝소. 암 치료에 있어서 항암제 투여와 방사능 요법을 알고 있을 것이오. 이 치료법들은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쓰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독극물이며 유해 방사선으로서 몸의 건강한 세포까지도 죽이는 부작용이 있고 따라서 이 치료를 받고 있는 암 환자들은 말도 못할 고통을 겪게 되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오만(종교가 암이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오), 항암치료에 의해서 완벽하게 건강한 신체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 놓으라면 끊임없는 계몽에 의한 식생활 및 여타 생활 습관의 개선과 더 극단적으로는 우생학적으로 암발병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손을 낳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오. 허나 '현실적'으로 암은 발생하고 있고 항암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어디에선가는 존재한다는 말이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이상향과 현실의 괴리요. 또한 암 치료법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을 수 없소. 그것을 발견하고 정립하고 실행해 가는 사람들 만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오.
햏이 곁가지로서 예를 든 아마 불가지론이나 유아론적인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가깝게 갈 위험성이 있을 듯한 경우를 보았지만, 나는 세계를 홀리즘(wholism)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소. 평범한 아침 하나의 사무실에도 전혀 다른 네 개의 세계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들이 수평적으로 얽히고 섥혀서 많은 공통분모를 산출해 내고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는 말이오. 더불어 그 시스템의 구성원 전부에게 혹은 구성원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항상 참인 명제란 아예 불가능하거나 무척 존재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오. 그런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불가지의 세계,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 으로서 훗설 식으로 말하면 '판단을 중지'하여야 하오.
그런데 햏의 이 말에 대해서는 도무지 그 의도가 파악이 되지 않는구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것은 또한 인간 자신밖에 없소.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지는 것이오. 그럼 햏은 종교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다라고 보오? 기독교의 '신'이? 신이 있다 없다라를 떠나서 우선 소위 성경이란 글자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다라고 보지는 않소. 누구나 자신의 세계,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가 있소.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야 말로 전부이며 자신 그 자체요."
아마도 자신의 한계는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다는 뜻으로 나름대로 풀이하고 있소만, 역시 어떤 맥락에서 이런 유아론적인 회의주의적 발언이 나왔는지는 이해를 못 하겠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의 병을 진단하는 의사나 심리학자는 기본적으로 사기꾼이며, '넌 왜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니?'라는 친구의 진심어린 충고도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라는 말로 회피해 버릴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물론 확실성의 정도에 있어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만큼 명석 판명한 명제는 없을 것이오만, 요는 그것을 시발점으로, 데카르트식으로 전체 지식 체계를 수직적으로 정당화시켜 나가느냐, 훗설처럼 현상학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느냐 혹은 '게임의 규칙'을 인정하고 나아가 홀리즘적인 수평적 고리들의 얽힘을 구성해 내느냐 차이 아니겠소?
햏은 '인간'과 '종교'를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는 듯 한데, 나는 '인간'을 규정하는 것 안에 '종교'도 있고 '과학'도 있고 '철학'도 있다고 생각하오. 아, 이렇게 말하고 보니 햏이 말한 맥락이 이해가 되는 듯도 하구려. 즉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메꾸는 것은 '인간'이어야 하지 '신'이어서는 안된다라는 뜻이오? 그러나 내가 말한 맥락은 그런 뜻이 아니오. '엄밀함'의 측면에서 '신'의 존재 유무는 불가지의 영역이고 신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오. 어디까지나 정서적인 측면이오. 학문적으로 신의 존재 유무를 증명한다는 것은 이미 1000년 넘게 논쟁이 거듭되어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 있소. 더구나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던 맥락은 신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종교의 필요성에 관한 것 아니었소?
곁다리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한 것 같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 말은, 햏이 이해하고 있듯이 종교란 인간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여 무언가 완벽한 존재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정서가 메마른 사람에게 예술이 필요하듯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지식이 모자란 사람에게 학문이 필요하듯이, 입맛이 없는 사람에게 맛있는 애피타이저가 필요하듯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예를 들어 네트워킹 프로토콜 개발에 있어 도를 튼 사람이라도 멋진 음악을 듣고 싶을 수 있는 것 아니오? 어찌 보면 내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해서 오히려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있어 종교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종교의 부작용 때문에 종교가 꼭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면, 술과 담배, 혹은 부작용이 심한 마이신이나 항암제 까지도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