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펌)소위 "도망간 윗대가리" 담론에 대하여
게시물ID : sisa_5019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iramisu
추천 : 1
조회수 : 3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7 23:43:46

원글링크:'http://pgr21.com/?b=8&n=51106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사고의 진행경과를 전달해주는 차가운 활자들조차 제 마음을 이렇게 분탕하는데, 당사자인 유가족들,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글을 올려도 될지 몰라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불분명하게 뒤섞인 담론들의 실타래를 풀어서 보여주는 게 
그나마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글을 써보았습니다.


----------------------------------


아래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어떤 글에서도 그렇고, 그 밖에 많은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의견이 소위 [도망간 윗대가리] 담론입니다.

우리나라는 유사이래로 늘 지도자가 수도를 버리지 않고 결사항전한 적이 없었다든가

아랫사람들에게 방어를 맡겨두고 윗사람은 도주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전통시대 전쟁사에 대한 사적 이해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시대의 전쟁의 양상과 의의가 근본적으로 근대 전쟁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합니다.


전통시대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요소들이 고려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지도부를 괴멸시켰는가 입니다. 
특히 상대방의 최고지도자의 신병을 구속하거나 아예 사살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최고지도자는 상대 진영의 의사결정구조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 실제 총 지휘가 다른 인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을지라도 그 지휘자의 권위와 통제의 정당성이 최고지도자로부터의 권한 위임에 의존하고 있는 바, 최고지도자를 제거하는 순간 방어 진영의 의사결정구조 전체를 일시에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지도자 부재 상황에선 설령 방어군이 멀쩡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방어군 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정당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이 일어나기 쉽고, 통일된 작전수행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합니다.

정리하자면, 최고지도자의 제거에는 [실용적] 목적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하구요.




둘째, 최고지도자의 제거는 [그 자체로] 아군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케네스 로빈슨은 그의 박사논문에서 (1997) 초기 조선왕실에 대한 주변 세력들의 조공관계를 분석하면서 
이들의 조공 행렬이 [서울]로 향했던 것이 아니라[왕]에게 향했다는 사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왕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기관으로서, 외교 사절의 최종기착지였는데요, 
이는 곧 바꿔말하면 전쟁 발발시 적군의 최종 목표 역시 [서울]이 아니라 [왕]이 된다는 걸 암시합니다.

왕의 제거는 곧 상대 국가가 구축한 통치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며, 이는 곧 상대 국가의 [패배]를 의미합니다. 왕이 제거되기 전까지가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었다면, 왕의 제거 후에는 [잔당 소탕]이 되버리는 거죠.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례가 곧 명나라 중엽 때 정통제가 친정에 나섰다가 몽골군에게 생포되는 대 사건, 
[토목보의 변] 당시 몽골군의 행보와 명나라 조정의 대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명의 황제가 몽골에 생포되는 순간 몽골군의 인식은 [어? 그럴 생각 까진 없었는데 명나라를 이겨버렸네?] 였습니다. 
몽골군은 이 생포된 황제를 질질 끌고 다른 명나라 성을 돌아다니며 이제 우리가 이긴거니 잔당들은 어서 투항하라는 식으로 나왔고, 
명나라 조정은 몽골군의 이러한 행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번개같은 속도로 [생포된 황제를 폐위하고 다른 황제를 옹립] 해버립니다. 
한 마디로, [아냐아냐 우리 진 거 아냐, 그거 황제 아님] 이라고 오리발을 내민 거죠.

이 비유가 정확할지 모르겠으나, 비유하자면 명나라 황제나 조선의 왕이나 리그 오브 레전드의 넥서스 같은 존재였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는 증거요, 그의 제거 자체가 패배 인증인 셈이지요.

이와 같은 [상징적 승패]는 당시 전쟁이 영토점령이라는 실제적 성격 뿐 아니라 일종의 [전례적(ritual)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실제 대규모 접전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찌어찌 왕만 항복시키면 어쨌든 우리가 이긴 게 되니까 
재빨리 왕의 항복만 받아내는 전술이 쓰일 수 있는 거죠.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정묘-병자 양란이 되겠습니다. 정묘호란 때 왕을 직접 잡아내지 못하고 사실상 빈손으로 돌아간 만주족은 병자호란 때 오히려 기동력을 더 높인 전술을 짜서 기어코 왕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가는데 성공합니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양쪽 군사의 인명 손실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체에 임진왜란 때보다 더 강력하고 심각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혔던 건 
임진왜란은 왕을 지켜낸 승전, 병자호란은 왕을 지켜내지 못한 패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죠. 
스타크래프트로 비유하자면, 임진왜란 때는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벙커 지키던 SCV도 많이 상했지만 그래도 커맨드센터와 팩토리 등을 많이 남겨서 경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반면, 병자호란 때는 아비터 리콜 한 방에 커맨드부터 날아가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정리하자면, 최고지도자의 제거에는 [상징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소위 [윗대가리]들은 다 부도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도망갔으니까?

다른 층위의 리더들을 살펴보면 그림이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왕과 그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은 전쟁의 패배를 막기 위해 [이 사람]을 지키는 것 자체가 그 목표였므로 [이 땅]은 얼마든지 버리고 퇴각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태수, 부사, 장군 등은 그 임무가 [이 땅]의 방어에 있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놀라울 정도의 결연함을 보여줬습니다. 
일본쪽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선봉대는 동래부사의 의연함에 상당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송상현은 자신의 임무인 동래부 방어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지휘소를 버리지 않고 항전했습니다. 
일본군이 지휘소까지 도달했을 때 목격한 것은 송상현이 도망가지 않고 의관을 바로한 채 정좌하고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죠. 
전통시대 전쟁의 낭만(?) 같은 걸 느꼈는지, 아니면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일본군은 그를 함부로 하거나 모욕하는 대신 무인의 예우를 다해 죽였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를 감안하고 보면 이승만의 후퇴,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아웅산 테러 사건, 실미도 부대 양성 등은 
1980년대 초반 까지도 남북한 정권의 전쟁인식이 여전히 전통시대의 그것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 최고지도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 
그게 일종의 [승리 조건]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던 거죠. 
또 그 당시에도 물론 목숨을 사리지 않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진지에서 산화했던 많은 지휘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인식 역시 동래부사 송상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 세월호 선장 탈출 사건을 조선왕조 왕들의 피난경험과 연결시켜 네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세월호의 선장은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게 그 임무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배를 지키고 승객을 탈출시키는 게 그 임무였습니다. 
말하자면, 동래부를 버리고 도망친 동래부사가 된 셈입니다. 
애초에 선조와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는 승객들의 최고지도자가 아니었으니까요.


-----------------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볼 때 그 위기의 순간 최후까지 다른 승객들을 도왔던 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월호의 선장이 보여주지 못했던 의연함을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있었다는 건데요, 
한 편으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잠재적으로 많이 있을 거라는 데서 (비록 평상시에는 잘 눈에 띄지 않겠지만) 희망을 볼 수 있고, 
하필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선장이었다는 데서 어떤 인재의 선별과 배치에 대한 구조적인 취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세월호 선장의 개인적 못남에 대한 비난, 우리 민족의 윗대가리들은 언제나 그랬다는 시대착오적(anachronistic), 자조적 한탄을 넘어서서

사람의 교육, 선발, 배치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기능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생존자들의 생환을 마음 깊이 바라고, 
이번 사건에서 잘못된 대처를 보여준 선장과 승무원들은 엄정한 처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