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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비기독교인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
게시물ID : history_5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6
조회수 : 1002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1/04/15 21:17:35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오랜세월 로마 제국을 지탱해오던 전통 신앙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로마의 전통신앙은 단순한 신앙의 단계를 넘어선 로마의 개방성을 상징하는 존재였지요. 하지만 기독교의 흥

기로 인해 기독교 외의 신앙은 사교로 배척받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흐르게 됩니다.이런 사회분위기 속에

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 문화에 정통한 고트족 노예에 의해 길러졌는데 이 유년의 경험이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미루어 짐작해 볼수 있습니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 치세에 서방 부제에 임명되어 야

만족들과의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고 이를 시기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잠제적 위협으로 

보고 직접 토벌군을 거느리고 율리아누스를 공격하려 하지만 진중에서 병사하게 됩니다.죽기전 율리아누스에

게 제국을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고서 말이죠.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 벌어진 대숙청의 원흉이었던 폭군은 이

렇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그 외에도 콘스탄티우스가 남긴 실정의 결과들을 시정하는 것이 새 황제의 당

면 과제였습니다. 먼저 철인황제 마르쿠스의 치세를 모범으로 삼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황궁 경비를 대

폭 축소하고 황궁에서 환관들을 축출했습니다.이를 통해 황궁의 사치스럽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일소합니다.

또한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비기독교인의 저술들로 (예컨데 

플라톤,키케로의 저술같은) 수업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이로인해 기독교계 학교들에 타격을 주려고 했

죠.학교에서 배울것이 없으니 학생들의 발길이 자연히 끊길거라 기대한 겁니다. 그러나 이미 커질대로 커진 

기독교 세력들의 반발을 부르게 되었고 율리아누스의 개혁은 난항을 겪게 되지요.그 와중에 선제인 콘스탄티

우스가 추진하던 페르시아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안티오키아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시내의 아폴론 신전에 화

재가 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율리아누스는 이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보고 안티오키아의 교회를 폐쇠하라

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의 더 큰 미움을 사게 되지요. 이후 페르시아 영내로 진격한 율리

아누스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수도인 크테시폰 근교까지 육박하게 됩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의 격렬한 저항

에 밀려 퇴각하게 되지요. 그 와중에 복병을 만나 용감히 싸웠으나 창에 배를 찔리는 부상을 입고 진중에서 

생을 마감합니다.임종 직전에 "갈릴리 사람이여,그대가 이겼소"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요. 여기서 

갈릴리 사람은 예수를 의미합니다. 율리아누스의 사후 기독교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배교자로 낙인찍

고 로마는 이후 로마이되 로마가 아닌 길을 걷게 됩니다. 그 길의 끝에는 중세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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