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이과계열을 나오고 컴퓨터전공 대학을 나왔다.
몸도 별로 안 좋아서 병원을 다니느라 낮은 출석률로 대학을 나올 때 학점은 3점도 넘지를 못했다.
어찌어찌 졸업을 한 후에 맞춰서 아버지가 회사에서 나오셨다.
워낙 치열한 경쟁속에서 아버지는 제일 연로하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버티시다가
어차피 "너 대학 나오면 나오려고 했어" 라며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난 그때 나 하나 대학 등록금 보내주시려고 그렇게 고생을 하셨구나 라는 감사함과
그에 맞는 성적을 보여드리지 못한 죄송함이 가슴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나름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편이라 그래도 잘 될거라며, 잘 된 후에 꼭 효도해드리자 라는 생각으로 구인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당시 나이 26세, 첫 면접에서 나에게 질문했던 것은
"이런 스펙으로 여길 지원하면 뭘 할 수 있을것 같은가"라는 조롱성 섞인 질문이었고,
당시 간절함보단 자존심이 더 높았던 나로서는 면접 도중 "여기는 회사에서 저를 원하지도 않고 저도 회사를 원하지 않네요"
라고 말한 뒤 면접 장소를 빠져나왔다.
지방에는 알바자리조차 남지가 않아서 어떻게 하든 서울로 올라와서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는 스펙을 많이 요구하지 않으니까 라는 가벼운 생각과
서울에는 알바 자리가 많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속에서 좀 더 진지하지 못한 내가 있었다.
이런 진지하지 못함 속에서 나름 꿈을 가지고 있던 나는 해당 꿈과 매칭이 될 수 있는 알바를 찾아봤고
실제로 그 곳에서 알바를 할 수 있었다.
2년 이상 하면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며.. 등등의 조건으로 시작했던 알바.
하지만 정규직 전환의 꿈은 해당 회사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며,
심지어 2년을 채우면 연장 계약조차 이루어지기 힘든게 현실이었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알바라는 자리에서는
내 꿈을 실현 불가능했던 것이 물론이었으며 쳐다볼 기회조차가 없었다.
내 나이 28이었을때,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국비지원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비록 학점이 딸려도 내가 4년간 교육을 받아봤던 전공교육을 살려야 할 것 같아서 배우기 시작했다.
한달에 22여만원으로 공과금, 핸드폰비, 교통비, 식비등등을 처리해야 했다.
그래도 약 1년 6개월동안 모았던 돈과 함께 처음에는 버틸만 했다.
다만 마지막 몇개월 즈음에는
반찬 살 돈이 없어 맨밥에 고추장 비벼 먹었고,
쌀을 살 돈이 없어 부침가루를 사서 김치전을 해 먹었다.
그렇게라도 버틸만은 했다.
작년 겨울 가장 추운 날.
월세로 빌린 원룸의 보일러가 얼어서 찬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왠지 서러웠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라는건 진작에 깨달았었지만
그래도 서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서러움에 쪽팔리게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보니 좁게는 오유 사람들, 크게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미안한게 있는데
선거날에는 차비가 없어서 고향에서 투표를 못했다.
부재자 투표가 있지 않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투표할 동사무소에 가서 접수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
내가 교육을 듣는건 09:00~20:00. 동사무소가 날 기다려줄 리는 없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으면 알려주면 다음엔 꼭 그 방법을 이용해 투표를 해보겠다.
여튼 선거날 투표를 못했는데 그 날 친구와 투표현황을 보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반농, 반진담으로
"넌 개새끼야" 라는 말과 "밥 못 먹는다고, 차비 없다고 투표 안한건 무조건 개 핑계야" 라는 등의 소릴 들었다.
투표를 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에서 ktx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면서..
부정은 안한다. 분명 난 현실을 회피했었고, 내가 힘드니까.. 나 하나만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며 자기위안을 삼았으니까.
다만 그 말을 친구에게 직접 들으니 그것조차 왠지 부끄러웠고, 서러웠다.
교육을 처음 들을때 취직률을 봤었다. 60퍼센트가 좀 넘더라.
3명중에 2명정도가 합격을 한다는 것인데, 당시 같은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이 20여명 정도 됐었다.
그 중 2명 정도가 자신의 힘으로 중간에 취직을 해 빠졌고, 4명은 중간에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나머지 사람들을 보며 '아.. 수업만 끝까지 잘 들으면 취직은 다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 29살. 1월 말에 수업이 완료되었고 수료증까지 받았다.
나에게 스펙이 하나 더 생긴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구직 사이트 등에 나 자신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0여곳에 이력서를 쓰면 7~8곳에서 면접 제의가 왔었다.
나름 긍정적인 멘탈과 적극성을 띠고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통장에 모아놨던 돈이 거의 바닥났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주 전 공부하는 동안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남은 돈 중 일부를 쓰려고 현금을 빼놨다가
술 한잔 사주고 지갑을 분실했다.
뒤늦게 카드 재발급을 받고 방세를 내고 공과금, 핸드폰 요금 등을 내니 아무것도 없더라.
신분증과 면허증도 재발급을 못받고 있다.
진짜 억울하고 서러웠다. 왜 남들의 1년은 무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그 적은 확률의 불행한 사람이냐고.. 왜 그 불행이 연속되냐고..
분함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이미지는 긍정적인 성격에 항상 웃는 놈이었고,
내가 다 부숴버리면 그 이후에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되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일 전 면접 제의가 왔다.
그리고 4월 2일 바로 어제 .
재발급 받은 후불형 교통카드가 되는 체크카드 하나 들고 면접을 보러 갔다.
예전과 같이 웃으며, 긍정적으로 면접을 보고 왔다.
어차피 불행한 나의 이미지를 회사에 비출 필요는 없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좋아보이는 성격을 보면 조금이라도 달라지진 않을까 싶었기도 하고..
크게 기대는 안했지만, 되지 않으면 늦은 나이에 다시 알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2년 뒤엔 또 일에 정착을 못하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간절히 기도했다.
4월 3일 오늘 전화가 왔다.
4월 15일부터 나오라고 한다.
뛸 듯이 기쁜 것 보다는,
내가 서울에서 지낸 2년 8개월 정도의 시간이 한장 한장 되뇌여졌다.
후배들이 좋은 스펙을 쌓고 좋은 회사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들부터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하게 된 일들..
아까 말했던 친구의 투표 이야기, 그리고 얼음물로 머리 감은 일들 등등..
돈이 있었다면 듣지도, 경험하지도 않았을 일들..
자연스레 하나하나가 다 떠올랐다.
취직한 곳은 중소기업이라 후배들처럼 많이는 못 받고 시작한다.
하지만 더 발전된 나로 만들기엔 충분하고,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앞으로 더더욱 교만하지 말고 지난 날을 회상하여
힘들때 다짐했던 것들을 실행하자며 각오를 더 다지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볼수록 그 각오는 더 할 것이라 생각하며 올린다.
내년이면 나도 20대의 청춘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남기고픈 20대 마지막으로 쓰는 비망록.
부디 이 글이 후에도 나의 기억속에 자리잡아
교만하지 말고 정직한 나를 만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