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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청춘의 벽이 무너졌도다 <완결>
게시물ID : panic_503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25
조회수 : 1447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06/15 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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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 http://todayhumor.com/?panic_49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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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 http://todayhumor.com/?panic_50349
 
 
 
 
 
[완결편]

"'언니, 내 몸을 가지겠어요?'"

“지금……거래를 했다고? 당신이 악마야? 마녀야? 무슨 수로 그런…….”

아내는 충격에 휩싸인 내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서은이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잖아.”

“무슨 종교길래.”

“아주 이상한 집단이었어. 그곳에 어떤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는 어린 여자애들을 특히 좋아했어. 불운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혹은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제 인생에 불만을 가진……, 한마디로 일탈을 꿈꾸는 여자애들을 꿰어내곤 했어. 그 남자, 말재주 하나는 정말 타고 났거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니 영생이니 부활이니 하는 말들을 다 진짜처럼 믿었단 말이야. 나도, 서은이도. 난 거기 사람들의 광기에 질려서 빠져나왔지만……서은이는 성인이 돼서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어.”

“………….”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 서은이는 날 설득시키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았어. 이론으로야 뭐든 가능한 거니까. 그렇게 따지면 성경도 불경도, 이 세상 어느 종교도……실현되어야 하잖아? 영원한 삶이라니……그게 그 남자가 주장하는 교리란 걸 알았어. 서은이는 마치 자기가 전도사인것처럼 차분하게, 그리고 논리적인 말투로 나를 설득시키기 시작했어.”

생기 넘치는 스무살의 소녀가 죽음을 목전에 둔 여인과 마주 앉은 모습이 상상되었다. 어린시절, 친자매처럼 붙어다녔던 소녀들은 어른이 된 서로의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봤을 것이다. 오랜 시선의 탐색 끝에 혜연이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녀의 결정을 예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앞에 앉아있었으니까.

“이건 어차피 버릴 몸이에요. 저는 곧 자살할 거니까요. 그러니까 제 몸을 언니가 쓰세요. 전 필요없지만, 언니한텐 필요한 거잖아요? 이 분과의 사랑을 위해서라도…….”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게, 전부……나 때문이었어?”

“자책 하지 마. 우리가 같이 내린 결정이었으니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타인의 몸으로 영혼을 집어넣는 게 가능한 일인가?

“당신 말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니야.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래. 대체 왜……그 모텔 벽에…….”
“그야 나도 모르지. 그때 나는 죽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려면 어때. 어차피 똑같이 썩어버릴 몸이었는데. 어디에 묻히든……상관없었어.”

“그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난리가 났는데도,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이젠.”

이제는 이란 말이 가슴에 콱 박힌다.
‘나는 이제 김서은이니까’ 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떻게 저렇게 자신을 한순간에 져버릴 수가 있는가.
아내의 말투는 실로 기묘했다.
나는 그런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김서은의 몸을 이용한 것보다도 아내의 저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
멍하니 아내를 쳐다보자, 아내가 싸늘하게 경고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쥐죽은 듯 살아. 그 사건에 괜히 말려들지 말고.”

일침을 가한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를 내버려두고.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빡빡했다. 등을 뒤로 기대자 소파의 싸구려 모조 가죽이 끼긱, 불평을 토해냈다. 나를 그렇게 함부로 짓누르지 말라고 외치는 듯했다. 불안하고 초조하면 늘 그랬듯, 나는 어느새 눈으로 담배를 더듬더듬 찾고 있었다. 굳게 닫힌 방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고 있는 아기 옆으로 가, 피곤한 몸을 뉘였을 아내를 떠올리니 숨이 턱 막힌다.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게 굴 수 있을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서……. 아내와 나, 우리가 오로지 생존을 위해 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이유는, 곧 내가 알게 될 진실을 예고함이었던 걸까. 장맛비에 노출된 나무토막처럼, 나는 온갖 감정의 홍수에 흥건히 젖어선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나는 기억을 잃은 것도,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만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거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혜연이를 혜연이로 보고 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김서은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한혜연을 알아보았던 건 나밖에 없었다.
온전치 않은 내 기억의 틈새가 숨겨진 진실을 떠올리는 일을 방해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혜연이가 한 소녀의 몸을 탐한 사실을. 한 사람의 육체가 물건처럼 거래되고, 이를 주고 받은 사실을…….

한순간도 어색해하지 않고 아내를 사랑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김서은이 아닌 한혜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처음부터 한혜연을 사랑했던 것이다.

‘당신이 사랑한 건 처음부터 나였어. 누구도 아닌, 한혜연, 나.’

아내의 말이 옳았다. 목소리에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우리의 사랑에는 제3자가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아내. 그런 아내를 포기할 수 없어 자살을 선택한 나. 분명 정상적인 사랑의 방법은 아니었다.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사랑이었다. 분명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슬픈 결말을 맺었을 사랑이었다. 김서은이 아니었더라면.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끝내 헤어졌겠지.

“하하…….”

나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김서은한테 고마워해야 되나?
자기 인생을 포기해줘서, 그 몸을 주어서 고맙다고.
조금 전에 자기가 버린 옛날 몸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했던 아내에게서 싸늘한 냉기를 엿보았으면서, 이제는 똑같아 지려고 하는 건가? 나는 그 정도로 쓰레기인 건가?

드르륵. 드르륵.

나의 번뇌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핸드폰이 울렸다.
긴 진동음을 들으며 작게 파도치는 화면 속 번호를 확인한다. 그가 나를 만나기 위해서 급히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딸을 구제해준 은인으로 여기고 있을 그를 만날 수가 있을까.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당신 딸의 인생을, 미래를 송두리째 빼앗았다고? 그런 아내를, 나를, 우리를……이해해줬으면 한다고?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리곤 닫힌 방문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가 작게 속삭였다.

“바람 좀 쐬고 올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서 나갔다 오겠단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침묵이 유지되었다.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가슴 한구석에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처럼 헛헛했다.

밖으로 나갔다.
얕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 순식간에 불이 밝혀졌다. 날벌레가 까만 깨처럼 들어앉은 센서등이 시각을 자극했다. 계단참을 지나치기도 전에 불빛은 점멸하고 만다. 불빛마저 사라지자 오싹한 기분이 들고 만다. 타닥타닥……. 계단을 내려가는 내 발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크게 들린다. 세차게 뛰어 내려가는 내 소리를 듣고 어느 집에선가 시끄럽다고 불평을 토해냈다. 하지만 나는 무뢰한처럼 남의 불평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발소리는 점점 더 무게를 실어갔다. 그렇게 1층까지 한번도 멈추지 않고 단숨에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뒤에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린다.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는 입에서 단내가 폴폴 풍길 지경이었다.

한계치까지 속도를 높여서 달린 덕분에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텔 사장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는 땀으로 젖은 내 몰골을 보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 하지만 그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장거리를 오고 간 여파로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어떻게 하다뇨……?”
“나와 함께 조사해볼 생각이 있느냔 말일세. 오늘 병원에서 확인하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더군. 그동안 헛소리라고 취급했던 딸애의 말들이,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야. 그리고 오면서 떠오른 게 있는데……, 그 한혜연이란 여자 말이야. 딸애하고 어울려 다녔던 여자애였어.”
“………….”

몸 안의 태엽이 동작을 멈춘다. 사내의 말이 돌조각이 되어 태엽바퀴 사이에 틀어 박혔기 때문이다. 작동을 멈춘 태엽은 기기긱, 기기긱, 마찰음만 낸다. 움직이려고 하지만 좀처럼 불가능했다.
그는 나의 이런 반응을 단지 제 말에 놀라서라고 여기는 듯했다.

“봉사활동인가 뭔가를 한다고 한창 같이 어울려 다녔었는데 싸운건지, 연락이 끊어진건지 만나지 않더군. 처음에는 증상의 일환이라 여겼네만, 자네 말을 듣고 나니 그것 역시 심상치 않게 여겨지더군.”
“그건……그냥 해본 말이었습니다. 빙의라니……그런 게 가능할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불가능하지. 하지만 말이네, 분열증이란 것도 자네가 백년전 사람이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을 거야. 아직 정신분열증이란 말조차 발명되지 않은 시대엔 오히려 정신과적 치료가 불가능하지 않았겠나? 정신의학이 이처럼 발달한 건 불과 몇십년 밖에 되지 않았어. 몇십년전만해도, 아니, 십몇년전만 해도 동성애를 교정 가능한 정신병이라 여기고 폭력이나 전기치료 같은 걸로 ‘치료’했다더군. 한때,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여성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가둬서 치료 명목으로 고문하는 일도 공공연히 자행되었단 말일세.

정신분열증이란 말이 최초로 사용된 것도 고작 백년밖에 되지 않았지.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백년전 한 스위스 의사의 명명이 있기 전까지 분열증은 치매의 일종으로 진단되었단 말일세. 사람들이 치매라는 증세를 알기 전에는 어떻게 불렸을까. 귀신에 들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겠는가? 인류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서은이와 같은 증세를 겪었던 사람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겠는가?

누군가의 발견으로 새로이 명명될 뿐, 증상은 늘 인류를 그림자처럼 뒤따라다녔을 테지. 단지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한 무지의 영역일 뿐, 백년 뒤, 이백년 뒤에는 이름을 부여받아 사회의 한 현상으로 분류될지도 모를 일이지.”

“그럼 제 말이 정말……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도 지금으로선 확신할 순 없네. 다만 가능성을 본 정도지. 스스로 미친생각 같으면서도……아무튼, 아직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서 정리가 되질 않는군.”

“들어가서 좀 쉬십시오. 피곤해보이시는데.”
“자네는?”
“네?”
“할 말이 있어서 그리 급하게 뛰어온 거 아니었나?”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딱히, 그가 아니었더라도 누구나라도 좋았다.
그래. 아내한테서 도망칠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지금 상황에 이 남자를 만나면 마음이 괴로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괴로우십니까?”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딸과 인연을 끊고 산다는 게, 많이……괴로운 일입니까?”

무례한 질문이었을 텐데도 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저 서은이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면……우리 가족의 일그러진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 테지.”

전혀 웃을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웃었다.
빙긋 웃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네 말대로 집으로 가서 좀 누워야겠어. 나이 생각도 안하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녔더니 꽤 피곤하군. 자네도 들어가게나”하고 돌아섰다.

그를 보내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집에서 나온지 한시간 남짓 지났지만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았다. 화가 난 걸까. 아니, 화를 내도 되는 건가. 모텔 사장의 말을 들어서인지 넘실대던 마음 속 파도가 잠잠하니 가라앉아 있었다.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던 사장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어차피 포기했을 삶이었다.
그것을 주워서 재활용한다고 해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없겠지.
김서은 그녀조차 스스로 바랐던 바이니까.

그러니까……괜찮지 않나?

참으로 간사하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그쪽으로 자꾸만 마음이 치우친다.

그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아내였다. 가느다란 다리가 어두운 골목을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기는 데리고 있지 않았다. 놀라서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당신 어디 다녀와? 애는 어쩌고?”

바로 집 앞이기는 했지만 어린애 혼자 집에 있으리란 생각에 초조해졌다.
아내는 태평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
“……여태?”

해가 지도록 낮잠을 재우다니, 평소의 아내답지 않았다.

“아침부터 열이 좀 있어서 보채더니, 당신 나가고 깼다가 방금 또 잠들었어. 집에만 있기 너무 답답해서……그리고 당신도 기다릴겸 해서 나와 봤어. 이제 들어가려던 참이야.”

미안했다. 온종일 집에서 아기와 씨름을 하며, 구경할 사람 그림자라곤 나밖에 없는데 나는 요며칠 밖으로만 나돌았다. 그러니 집이 감옥 아닌 감옥처럼 느껴졌을 터였다.

나는 아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아내한테선 향긋한 샴푸 냄새가 풍겼다. 끝이 약간 젖은 머리카락은 등허리 위에서 나풀대며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드리워지자, 아내는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귓바퀴 뒤로 쓸어 넘겼다.

“이 샴푸, 향기가 좋은 것 같아. 잘 샀네.”
“그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내가 웃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평범한 하루 중의 저녁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고요한 평화가 언제까지든지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일이야 어떻든,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으니까.

현관문은 다행이도 큰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아기는 여전히 자고 있는 모양이다. 조용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냉장고를 열고 물병을 꺼내들었다. 갈증이 많이 났는지 물병째로 물을 꿀꺽꿀꺽 급하게 들이켰다.

“김서은이란 여자 말이야……자기 부모랑 왜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 좋았던 걸까? 단순한 반항심 때문이라고 보기엔……지나친 감이 있지 않나 싶어.”

“많은 이유야 있겠지만, 정상적인 부모는 아니라고 들었어. 특히 그 애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딸의 몸을 더듬고는 했지.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방관했고. 겉으로 보기에 날라리 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처럼 보였을 테지만, 사실 그 사람들 사이에 딸이 차지할 틈 같은 건 없었어. 부부 중심이었으니까. 그들만의 세계가 존재했고, 그 사람들은 딸 같은 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어. 모든 게……그 인간들 중심이었지.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우선시 했지. 딸이 파고들기엔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나 견고했어. 아주 작은, 실 같은 틈조차 주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놈은 소유욕 때문인지 딸을 놓아주지 않았어. 어쩌면 세컨드로 여겼는지도 모르지. 부인한테 싫증날 때마다 건드려도 찍소리 못하는 대상으로. 그 인간은 그런 놈이야. 그런 주제에 정상적인 척, 신사다운 척 굴지.”

“말이 좀 지나친 거 아니야?”

아내가 내쪽으로 얼굴을 휙 돌렸다.
물병이 기울어져서 발등 위로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데도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턱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턱에서 떨어진 물들이 티셔츠의 가슴 부위를 온통 적시고 있는데도. 아내의 눈에 광기가 언뜻 스치고 지나간 것은, 부도덕적인 부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유모를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내는 나에게로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뒤로 조금씩 물러서고 있었다.

“그쪽도 만나봤으니까 이제 알 거 아니야? 좋은 놈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지?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한 거고. 김서은은……그 좋은 부모한테서 왜, 벗어나려고 했을까. 그게 궁금한 거잖아?”

아내는 완전히 격앙되어 있었다.
웅변가의 그것처럼 열렬한 기세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여태까지 속고 산 거야. 그렇게 바보같고, 어수룩하고, 사람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머저리에 호구니까. 한혜연, 그년은 좋은 여자 같았지?”

“여, 여보……!”

“그년이 새 인생을 되찾고 제일 먼저 한 짓이 뭔 줄 알아?”

킬킬킬킬.

광기어린 웃음이 공중에 흩어졌다.
아내는 너무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잡고 깔깔깔깔깔 웃음을 흘려댔다. 웃느라고 푹 숙여진 머리가 우뚝 멈추더니, 얼굴이 점점 나를 향해 올라왔다.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는 거라곤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술 밖에 없었다.

“쟤가 진짜 네 새끼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그래, 당신……왜 그런 말을…….”
“그년은 자기 담당의였던 의사새끼랑 재혼하려고 했었지. 네 앞으로 생명보험을 들어놓고 말야. 참, 잘도 가랑이를 벌리더군. 그러다 애를 뱄어. 의사는 금세 그년한테 질렸고,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났지. 그 뒤론 어떻게 됐을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어느새 등에는 벽이 맞닿아 있었다. 벽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내의 매끈한 팔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 하나 없는……. 벅벅벅, 틈만 나면 긁어대는 통에 늘 새로운 상처들로 아무는 날 없었던 아내의 팔의 상처들은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문득,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언제부터 긁는 걸 관둔 거지? 언제부터 안 긁기 시작한 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 너는…….

아내의 입이 코앞에서 길게 찢어졌다. 붉은 혀가 하얀 치아를 낼름 핥으며 입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 뒤론, 아주 식상하고 뻔한 스토리잖아?”

“안 믿어, 그따위 말…….”

뒷걸음질 치면서 외면하던 사실을 인정하고 만다.

아내의 몸 속에 들어와있는,
아니,
자기 몸으로 되돌아온 김서은을.

“넌 혜연이가 아니야. 김서은, 김서은인이지?? 언제부터야. 도대체 언제부터!”

“글쎄. 언제부털까. 워낙 쉬운 사람이어야지. 자기 기억이 어긋나기 시작하는데도 넘겨버리기 일쑤더군. 덕분에 일이 쉽긴 했지만.”

“왜 돌아온 거야. 왜! 뺏은 게 아니잖아, 네가 혜연이한테 준 거잖아. 그런데 왜 이제와서……!”

“조건 없는 호의에는……반드시 숨은 이유가 있어.”

몸이 휘청거린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당장이라고 고꾸라져 넘어질 것만 같다.
발가락부터 찌릿거리는 전류가 다리를 타고 올라와 몸을 점령한다. 벌레 수천마리가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바지를 걷고, 셔츠를 벗어서 온몸을 긁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개미가 온 몸을 파먹는 환각에 사로잡힌 마약 중독자처럼, 웬만한 인내심을 가지곤 견디지 못할 가려움증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녀는 나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읊조렸다.

“난 그 집을 떠나고 싶었어. 한혜연, 그 여자처럼 살고 싶었지.”

혜연이, 혜연이는 어떻게 된 걸까.
어디 있지?
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혜연이가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그 시체는……혜연이를 모텔에 묻은 이유가 뭐지?”

“난 그 인간들이 벌벌 떠는 꼴을 꼭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어. 딸을 추행하고 폭행하며 키운 죗값으로, 경찰이 자기 집을 들쑤시는 동안에 심장이 쪼그라들어 벌벌 떠는 꼴을 보고 싶었어.”

“대체 어쩔 생각인거야……혜연이를 돌려줘. 그 몸에서 나가란 말이야! 어쩌려는 거야, 나랑 오순도순 살림이라도 차리려는 거야?!”

생긋.
그녀는 소녀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눈이 의심될 정도로 순수하고, 예쁜 웃음이었다.

“한 가지 묻죠. 아저씬 정말, 그 모든 것들이……막 스무살이 되었던 여자애가 꾸밀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벅벅벅…….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듣기에도 인상이 찡그려지는, 탈피시키듯 가차 없이 연한 피부를 긁어대는 그 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손끝이 아닌 내 손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손톱을 세우고 팔을 긁어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몰려왔다.

아내,
아니 김서은은 내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슬슬 돌아오고 있나 보네요.”
“돌아와……?”
“오랜만에 돌아올 그분을 위해서 내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벅벅벅벅…….

멈출수가 없다.

온몸이, 세포 하나하나가 가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까지 가려웠다. 마치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피부를 벗겨내 알콜을 들이 부어도 이 가려움증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가려움이었다.

“덕분에 우린 정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어요.”

아득한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무언가에 의해서 침식당하기 시작한다.
멀리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으엥으엥 들려온다. 나에게 남은 부성애가 발동한다. 아기가 있을 방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아기 우는 소리가 너무나 멀고, 아득하게 들린다. 나는 무기력하게 몸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입을 벙긋대며 아기의 이름을 외쳤다.

나를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던 눈동자가 문득, 내 옆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존재를 향해 속살거리듯 인사했다.

“어서 와요.”





* * *







[……지하에 있던 시신은 모텔 부부의 실종된 딸과 연인관계였던 남성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평소 이 남성과 부부 사이에 여러차례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그러나 한 씨의 시신에서 발견된 교살 흔적과 달리, 남성의 시신에서는 어떠한 타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경찰은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되고 있…………현재 경찰은 모텔 사장과 그 부인을 사체유기죄로 긴급 체포한 상태이며, 한 씨의 교살 건에서도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평화로운 지역에서 일어난 살해 및 사체 유기사건.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일각에선 이 사건을 두고…………]

집앞에 나와 라디오를 듣고 있던 중년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막 자기 앞을 지나쳐간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등을 짝, 소리나게 후려쳤다. 남자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녀는 유달리 붉게 칠해진 입술을 휘었다.

“애기아빠!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가기야? 그 뒤로 통 보이지도 않고.”
“………….” “그나저나 어쩌면 좋아. 소식 들었어. 뉴스에서 온통 떠들어대더라고. 지하에 있던 시체가 애기엄마 옛날 남자친구였다면서? 쯔쯧, 처가 쪽이 풍비박산 났겠네. 애기엄만 어떻게 지내. 잘 견디고 있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막을 틈은 없었다.
이제 서른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다른 손으로 옮겨 들으면서, 여자의 뒤쪽을 바라봤다. 가방 안에는 기저귀부터 시작해 자잘한 아기용품들로 가득했다.
그때 뒤따라오던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붉게 칠한 입술이 “어머”하고 동그랗게 모아진다. 여자는 제 입술 위에 손을 포개면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애기엄만가 보네. 안녕하세요?”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는 아기 엄마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된 외모의 소유자였다. 허리께가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서 아기를 받은 다음 품에 안았다.

“아이고, 애기가 이쁘기도 하지. 몇 살이야?”
“누구시죠? 처음 뵙습니다만.”
“모른척 하기야? 그, 모텔에 같이 갔었던…….”

자기 말이 이상한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자가 입을 꽉 다물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군요.”

남자의 손이 젊은 여자의 손을 꽉 잡았다.

“가자, 서은아.”

여자는 저만치 걸어가버린 젊은 부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술을 삐죽 끌어 올렸다. 붉은 립스틱이 살아있는 것 마냥 꿈틀꿈틀 춤을 추었다. 수다를 떨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표정이다.
그녀는 트집을 잡으려고 부부를 계속 쏘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모난 곳 하나 없이 보기 좋기만 한 젊은 부부의 모습이었다. 여자의 눈길이 남자의 등에 매달린 돗자리로 옮겨갔다. 막 여름이 휩쓸고 지나간 터라 날씨는 아직까지 더웠지만 숨막히는 무더위는 아니었다. 주말을 맞아서 피크닉이라도 가려는 모양이었다.

“싸가지 없는 것들.”

여자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골목을 지나갔다.
새로운 수다 상대를 찾으려는 듯 연신 주변을 살피면서.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어느날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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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으셨나요? :)
 
첫 공포 장편이라 어색한 부분도 많고 조급한 부분도 있었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김서은의 새인생 찾기....정도가 적당할까요?

김서은은 복수와 새인생을 동시에 손에 넣은 셈입니다.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물어봐주세요.

완결까지 같이 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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