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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오늘의 그녀 (17금 )
게시물ID : readers_50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andS
추천 : 2
조회수 : 28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21:15:13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며칠 밤을 트럭을 타고 돌아다녔다. 인적 드문 이 동네에서 늦은 밤길에 나온 그녀를 찾는 일은 꽤 많은 인내심을 요한다.

어렵게 찾아낸 오늘의 그녀.

트럭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예민한 여자라면 트럭이 멈추는 걸 보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의 그녀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파이프렌치를 손에 들었다. 차에서 내리고, 그녀를 향해 달린다. 달려가는 나를 본 그녀도 달린다. 그런 무의미한 행동이 나는 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파이프렌치를 맞은 그녀의 머리에서 빨간 피가 솟는다. 발자국 하나 없이 새하얗던 눈이 그녀의 피로 빨갛게 물든다.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여름날 태양을 보기 위해 17년을 견디는 매미처럼, 나는 빨갛게 물든 눈을 보기 위해 1년을 견딘다.

지금 이 순간 매미처럼 노래하고 싶다.

 

아침이다.

온몸이 뻐근하고, 쉽게 눈이 떠지지 않는다. 겨우 몸을 일으켜 담배부터 찾았다. 온 방 안을 뒤져봐도 빈 갑뿐이다.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시고, 그녀가 있는 욕실로 갔다.

 

“안녕?”

욕조에 누운 그녀의 얼굴은 필요 이상으로 굳어 있다. 욕조 안의 빨간 물을 다 치울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성가신 피비린내도.

“잠깐만 옷 좀 뒤질게. 내가 담배가 없어서.”

가지런히 개켜서 욕실 구석에 놓아둔 그녀의 옷들을 뒤졌다. 다행히도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였다. 담배를 입에 물고 변기에 앉았다. 지긋지긋한 변비. 산속 깊이 있는 내 집엔 신문이 배달되지 않는다. 나는 책도 보지 않고, 휴대폰도 없다. 그녀의 전화기는 그녀를 찾은 장소에 버리고 왔다. 변기에 앉아서 할 게 없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너도 혹시 변비 같은 거 있었어? 나는 변비가 좀 심한 편이거든. 앉아서 할 것도 없는데, 오래 앉아 있으니까 짜증나. 오래 앉아 있다 일어나면 다리도 저리고… 변비엔 뭐가 좋은지 혹시 알아?”

그녀는 대답이 없다.

“예전엔 심심하니까 얘기나 해볼까 해서 살려서 집에 데려온 적도 있었는데, 집에 애가 있다. 부모님이 아프다, 살려주면 시키는 건 다 하겠다, 절대 말 안 하겠다…… 진짜 다들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듣고 있자니 시끄러워죽겠더라고. 큭”

내 말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집중을 해야 겨우 한 덩이 쌀까 말까 한데, 앞에서는 살려달라고 비니까 짜증나서 죽여버릴 때도 많아. 내가 하루 종일 화장실에만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침에 해결을 해야 하는데……. 아무튼 집에까지 살려서 오면 귀찮은 일이 좀 있어. 살려서 집에 오는 게 더 힘들기도 하구…….”

 

오늘도 쾌변은 실패였다. 포기하고 일어나 그녀를 비닐에 담았다. 밤새 피를 쏟아낸 그녀의 몸은 어제보다 한결 가벼웠다. 그녀를 욕실 밖에 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구석구석 물을 뿌리고 솔로 밀어낸 후, 락스를 뿌려서 꼼꼼히 한 번 더 닦으면 청소 끝.

 

그녀를 비닐째 어깨에 들쳐 메고 마당으로 나갔다. 강아지들이 나를 반긴다. 그녀를 수레에 싣고 작업장으로 간다. 난로를 켜고 손을 녹인 후, 그녀를 손질한다.

 

그녀는 강아지들을 건강하게 해준다. 건강해진 강아지들은 봄 농사에 쓰일 거름을 만든다. 그녀는 상추가 되고, 열무가 된다. 상추이자 열무인 그녀는 세상에 나아간다. 상추와 열무를 먹은 사람 중 누군가가 나에게로 와 그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속에서도 순백을 뽐냈다. 칼바람도 그녀 앞에선 속도를 늦추는 듯 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날이 벚꽃이 날리는 봄날처럼 포근해졌다.

그 꼴이 견딜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그녀다.

 

순백을 보고 있으면 적색이 그립다.

부모님은 누나와 나를 비교했다. 누나는 반장이었고, 친구도 많았고, 교회 피아노 반주를 했고, 어른들에게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단정한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 모두가 누나를 칭찬했다. 누나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저녁 식사 때 온 가족이 식탁에 모이자, 누나는 성적표를 꺼냈다. 부모님은 누나에게 갖고 싶은 것을 물으셨다. 나도 성적표를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으시고는 나를 때리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밟았고, 나는 밟혔다. 엄마는 쟤는 누굴 닮아서 저러지 라는 말만 계속했고, 누나는 식사를 했다. 나는 입 안이 터져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배가 고팠다. 가족들 몰래 유리컵에 우유를 따랐다. 방으로 돌아와 우유를 마시는데, 하얀 우유 속에 빨간 피가 하늘거리며 퍼졌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 날 누나는 집에 친구들을 데려왔다. 누나와 전교 1등을 다툰다는 누나 친구도 있었고, 학교를 안 다니는 형들도 있었다. 나에게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오라 했지만, 난 친구가 없었다. 그럼 방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다. 새벽까지 화장실을 참고 참다가 밖이 조용하기에 문을 열어보았다. 누나가 안방 문을 열고, 형들에게 여기로 들어가라 했다. 전교 1등 누나는 술병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형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전교 1등 누나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누나는 세탁기에 안 들어간다면서 나에게 이불 빨래를 시켰다. 하얀 이불엔 빨간 혈흔이 있었다. 나는 그 혈흔을 멍하니 바라보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얼어붙은 비포장도로를 트럭으로 달리는 건, 많은 집중을 요한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찾아, 나와야 했다. 며칠째 그녀를 볼 수 없어, 하루가 길다. 담배를 피우느라 열어둔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핸들을 잡은 손이 시리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차를 돌리는데,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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