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겨울 늦은 밤 그녀 집 앞.
얽매여진 시간 속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 던 건... 회사 내 분위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실타래가 풀려나가 듯 우리는 서로에게 끌렸고, 충무로에서 멀리 더 먼 곳에 있는 CGV를 찾아
단 둘이 외진 자리에서 영화를 보기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면 도봉산 자락 단합회 후 소주와 막걸리로 점철된 뒷풀이 자리에서
나는 그만 필름이 끊겨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던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멋적은 마음에 너에게 미안하다 전하려 점심을 따로 했지만,
너는 기억하지 못했고 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바뀌기라도 해?"
모르겠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그 때는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알게된건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관계에 놓인 것이 그 때 그 말 때문이었다고 했다.
나는 바뀔 것이다 라고 대답해 줬기 때문이다.
'응 맞아 내가 바꿀 수 있어. 내일부터 우리는 사귀는거니까'
하지만 이미 결혼날짜 까지 다 잡혀있는 그녀의 마음. 돌아올리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내 뱉은 말에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결혼도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고 감정을 지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리석게 시작한 나의 첫 연애는 막을 내릴 줄 모르고 내달렸다.
CGV에서 낯선 남자가 네 옆에 앉았었고, 귀가행 국밥집 옆 모텔촌을 그냥 빠져나온 것 하며,
전철 안에서 낯선 여인이 너의 무릎에 쓰러져 잠을 잤던 모든 것들이
그리고 남부고속터미널에서 의정부까지 그렇게 거리가 먼데도 너의 집 앞에 바래다주며
무엇이 진짜 연애이고 무엇이 가짜 연애인지 어렴풋이 보이는 듯 했다.
너는 남편이 될 사람을 나에게 보여줬었고 나는 그날 500cc에 소주 두병을 원샸했다.
가짜 연애는 그렇게 야한 노래를 서로 주고받는 사이에 이루어졌고 소주와 함께 녹아버리는 듯 했다.
손도 안잡고 어깨를 걸쳐주지도 않느냐며 핀잔을 줬던 그 가짜 연애는 나에겐 어쩌면 진짜 연애였는지 모르겠다.
하얀 겨울 늦은 밤 그녀 집 앞.
너는 가로등을 등지고 예쁘게 말 없이 서 있었고,
우리 손은 끈적이다 못해 거의 하나가 될 정도로 꼭 잡고 있었다.
네 눈가에 뭔가 아른 거렸던 것이 눈이었는지 아니면 가짜 연애의 진짜 눈물인지 모르겠다.
날은 추웠지만 하얀 겨울 늦은 밤 그녀 집 앞에서 나는 불타오르고 있었으나
양심이라는 녀석과 사투를 벌이다 결국 불타 죽어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너는 무언가 기대했겠지만, 빈 집 너의 방 안에 나는 금기시 해야 할 내 발 한자욱을 내디딜 용기가 없었던 것을 너도 알고 있었겠지.
우리는 얽혀있는 세상속에 8년이라는 집요한 정이 만들어낸 진짜 연애가 가짜 결혼에 뭍혀버리는 사건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