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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흐트러진 침대
게시물ID : panic_504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30
조회수 : 266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6/16 22:43:30
 
<흐트러진 침대>
 
 
 
나는 침대라고 합니다. k사에서 2012년도에 제작된 퀸사이즈의 매트리스를 등에 업고 있는 보기드문 명품이죠. 자, 지금 막 집에 돌아온 저 남자를 보십시오. 저자는 나를 무이자 할인가 150만원에 손에 넣었습니다. 진열되어있던 매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자랑했던 나를, 떨이 품목처럼 이자조차 받지 않는 할부 행사로 처분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는 남자의 집으로 배송되는 순간까지도, 적어도 로코코식이나 르네상스식으로 꾸며진 넓은 방에서 살게 될 거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배송된 곳은 20평이나 될법한 어느 오피스텔이었습니다. 아주 큰 충격이었죠.
 
‘어디다 놓을까요?’
 
남자는 무심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데나 두세요. 어차피 침대인데.’
 
아! 아직까지도 그의 목소리가 잊혀지질 않는군요. 들어서 이젠 아시겠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침대가 아닙니다. 한때 매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자랑했고, 최고급 시트와 쿠션만이 제 위에 올라올 영광을 허락받았던 자타공인 명품입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나를 단지 무이자 할인 행사로 싸게 가져온 물건 취급을 했습니다. 그의 오피스텔에 굴러다니는 고장난 물건들과 똑같은 취급을 했단 말입니다. 한쪽만 나오는 고장난 스피커나, 보기에도 끔찍한 흠집이 길게 난 브라운관, 냉기 대신 소음을 만들어대는 미니 냉장고,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서랍장, 그리고……지금 내 위에 널브러져있는 저 여자처럼요.
 
여자는 종종 이집을 찾아와 남자와 함께 밤새도록 내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녘까지 남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여자가 무심코 제 몸을 덮고 있는 싸구려 시트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습니다.
 
‘자기야. 이거 백만원이 넘게 주고 샀다면서……감도가 형편없는데? 내가 50만원 주고 산 침대랑 똑같은 느낌이야.’
‘그래?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아냐. 똑같다니까. 또 어디서 바가지 쓰고 왔나 보구나?’
 
여자는 깔깔대면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여자가 몸을 크게 들썩일 때마다 나는 치미는 분노로 인해 바들바들 떨어야 했습니다.
정말이지, 예의라는 걸 모르는 커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투욱……투욱…….
 
아, 이런.
 
여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액체가 카펫을 동그랗게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매트리스는 흠뻑 젖어있을 게 분명하겠군요.
나는 축 쳐져있는 매트리스를 향해 말했습니다.
 
-기운 내. 곧 저 여자를 치워주겠지.
 
매트리스는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이젠 틀렸어. 나 같아도 이런 건 내다 버릴거야. 속까지 젖어버려서 쓸모없게 돼버렸다고. 난 분명히 붉게 얼룩져선 길바닥에 버려지게 될 거라고! 넌 새 매트리스랑 알콩달콩 지낼 테지…….
 
더 이상의 위로는 불필요해보이더군요. 그의 쓸쓸한 미래가 머리에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그때 남자가 대형 비닐뭉치를 몇 개나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 남자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습니다. 매트리스와 나는 남자가 화장실 문밖에 내려놓은 공구함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걸로 우리를 해체하려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금세 깜빡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광기어린 밤을 보낸 덕분에 온몸의 스프링들이 노곤하게 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그렇다고 내가 프로의식이 없는 침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늘 성심성의껏, 비록 무례하기 짝이없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편안한 밤을 위해서 네 다리를 버티고 서서 그들의 몸을 받쳐주니까요. 하지만 성인 두 사람의 무게를 생각해보세요. 더구나 저 여자는 보기보다 훨씬 무게가 많이 나간다니까요. 벌써 몇시간 동안 저렇게 축 늘어져서 누워있으니까 더욱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끼이익,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남자는 공구함을 들고 우리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그는 공구함을 매트리스 위에 올려놓곤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철컥. 무언가가 절단되는 소리와 함께 링으로 된 물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반지였습니다. 남자는 얼른 허리를 굽혀서 반지를 주워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곤 여자의 다리를 잡고 끌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쿵!!
 
바닥이 울리는 소리에 남자의 어깨가 흠칫 굳더군요. 그는 밖의 소리에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래층에서 항의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다시 움직임을 재개했습니다.
 
지이익……쿵.
 
지이익……쿵.
 
몇 번의 소음 끝에 그는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여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길이 생겼습니다.
 
그 끔찍한 얼룩은 전문업체에 세탁을 의뢰해야 지워질 테고, 남자는 그런 수고까지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어디에서 새 카펫을 사올 테죠. 그것을 깨달은 카펫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매트리스와 나는 킬킬 대며 악당처럼 웃었습니다.
 
서걱서걱.
 
쿵.
 
서걱서걱…….
 
남자는 화장실에 들어가선 아주 오랜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카펫과 매트리스, 그리고 나는 남자를 기다리다가 모두 잠에 빠졌습니다.
매일밤마다 내 위에서 스프링들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에,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는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늘 시끄럽게 싸워대던 남자와 여자가 오늘만은 조용하군요.
특히 어제 새벽에는 맹렬하게 싸움을 벌였는데 말이죠. 이젠 화해한 걸까요? 아니면 남자의 고장난 물건 리스트에 한가지 품목이 더 추가되려는 걸까요? 아니면...
 
서걱서걱.
 
예리한 톱날이 움직이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이 소리는 퍽 시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뱉습니다.
아무리 잘난척해봤자, 우리는 침대이고 매트리스이고, 그래봤자 카펫이니까요.
 
아, 당분간은 편하게 쉴 수 있겠군요.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뭘 하는진 몰라도 한동안은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
 
 
청춘모텔이 베스트에 많이 올라간걸 보고
감사해서 하나 써봤습니다.
 
아무리 반응을 생각않고 쓴다고 해도, 고생해서 쓴 글이 묻히는 건 마음아픈데
그래도 베스트에 간 덕에 많은 분들이 읽어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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