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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쇠망사 (5)
게시물ID : history_50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
조회수 : 10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17 20:44:33
지난 글 : 비잔티움 쇠망사 (4)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5029&page=1&keyfield=&keyword=&mn=&nk=Lemonade&ouscrap_keyword=&ouscrap_no=&s_no=5029&member_kind=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방면의 소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031년, 서쪽에서는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사라센 인들이 그동안에도 종종 침입해왔던 것처럼 일리리아 지방과 코르푸 섬을 약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라구사 인들과 나우플리아 시장에 의해 대부분의 함대가 격침되면서 물러났습니다.


 그 다음해에 이들은 더 많은 함대를 동원해 재침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의 기록을 믿는다면 1천척의 함대와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부대로 편제된 이 군대는 나우플리아 시장인 니케포라스 카란테노스에게 재차 격파되었으며 1천명의 죄수들은 콘스탄디누폴리로 압송되었습니다. 


이에 해적질에 대한 응징으로 1033년, 프로토스파타리오스인 테크니아스가 이끄는 제국 함대가 이집트 해안에 상륙하여 막대한 약탈품을 취하였으며 많은 포로를 잡아들여 귀환하였습니다.[2]



드로몬(=I run)


황제와 상당수의 외관직 관료들이 군사적 사안에 있어서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여전히 방위 행정은 잘 운영되고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서 유능한 장성들에 힘입어 위기를 넘기고 그 영토는 확장되었습니다. 더불어 동지중해의 패권도 여전히 로마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혼란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었습니다. 로마노스 3세의 치세 동안에 소아시아에서는 지진과 메뚜기 떼가 발생하면서 기근이 이어졌고 이는 돌림병이 유행하는 원인이 되어 인구가 정체 혹은 감소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달라세노스를 위시하는-로마노스와 달라세노스의 관계는 마치 통일신라기의 김경신, 김주원[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귀족들이 황제권에 도전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고를 털어 지지를 사려고 하는 인기몰이 작전이 시행되고 있어 재정적으로 적잖은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권교체의 발단이 황후, 조이의 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4]


내가 바로 엠퍼러메이커!




주   석 입 니 다.

[1] 존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2: 번영과 절정』 pp.473-476


[2] George Finlay, Th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from 765 to 1057(http://kingdom-of-heavens.org/MedievalHistory/Byzantine-Empire/Finlay/B2-C3-S2-A-ROMANUS-III.html)


[3] 달라세노스는 콘스탄디노스 8세가 자신을 지명했음에도 관료들의 압박으로 로마노스가 즉위한 데 앙심을 품고 있었고 로마노스 사후, 미하일 4세 때의 정세에도 관여되어 있습니다.


[4] 조이는 48세에 60대의 로마노스와 결혼했고, 54세에 10대 미소년인 미하일과(;;), 61세에는 미하일 칼라파테스를 양자로 들였고 62세에는 콘스탄디노스 모노마코스와 결혼하였으며 아마도 70세를 전후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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