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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담] 지리산의 여러 전설과 설화들 <BGM>
게시물ID : panic_505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10
조회수 : 292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6/18 17:35:47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U9pdL
   
 
 
우투리 전설
지리산의 우투리 전설은 지리산이 모성의 산에 머물지 않고 민중에게 얼마나 혁명의 꿈을 심어준 장소인지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 역시 정적인 산이 아닌 세상을 향해 걸어나오는 지리산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우투리 전설은 지리산 기슭 산골마을에서 평민영웅 아기 장수 우투리가 탯줄을 억새로 끊으며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지리산과 바다를 오가는 비밀스러운 자기수련과정을 거쳐 군사와 식량을 모아 세상을 평정할 꿈과 힘을 키우던 중 결국 자기와 가장 가까운 어머니의 고발로 인해 좌절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우투리'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지리산은 단지 패배자와 은둔자들만의 보금자리, 자양분을 안겨다주는 그런 모성적 의미의 산으로서만 기능하는 곳이 아닌, 새로운 변혁의 꿈과 그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하는 능동적인 공간임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전설인 것이다.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는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얽힌 전설로서 지리산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오던 중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어느 요망한 여자가 "산이 걸어나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리적으로 고정불변의 존재인 산이 들판(세상)을 향해 걸어나왔다는 것은 바로 산의 생명성과 능동성, 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리산의 모성적 토대 위에서 자생력을 회복한 저항과 변혁세력이 새 세상을 꿈꾸며 들판을 향해 내려오던, 나아가 들판문화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던 역사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산은 들을 향해 '열린 공간'이자 또한 들보다 높고 험해서 '닫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들판문화가 강고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산은 그 압력을 자연히 받게 되지만 역으로 들판문화가 느슨해져 산 자체의 동질성과 자생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면 산은 들판문화에 저항하고 나아가 크게 위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띤다.
이와같이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서의 모습과 부성적인 산으로서의 모습 양면을 띠는데, 이것을 흔히 '지리산의 이중성'이라 부르며 고 박현채 교수는 '수동성'과 '능동성'이란 말로 정리한 바 있다. 분명 지리산은 정치사회적인 과도기나 이행기에서 이제까지의 수동적인 모습을 벗고 능동적으로 역사 전면에 나서곤 했다. 또 그러한 역할은 근대로 올라올수록 더욱 큰 비중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흥부전
남원에는 일찍부터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가 실존인물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어왔다. 그 가운데서도 동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와 관련된 마을이라고들 하는데, 내용인즉 성산마을은 흥부가 출생한 곳, 성리마을은 흥부가 놀부에게 쫒겨나 유랑 끝에 정착하여 복을 누리고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성산리는 남원과 함양을 잇는 팔랑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소설 <흥부전>과 판소리 <흥부가>에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라는 대목이 운봉과 함양 사이에 있는 성산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산리에는 흥부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등. 성산리에 전해오는 박첨지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흥부전>과 비슷하다.
박첨지는 부자임에도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믿고 소작인들과 이웃을 혹독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내쫒는 것은 물론 다시 찾아왔을 때도 매만 줘서 내쫓았다고 한다. 이후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임을 당하였는데도 마을사람들은 박첨지의 시체조차 거두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새 부자가 된 아우가 형의 참변소식을 듣고 찾아와 동네사람들에게 돈과 제답을 주며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하여 성산마을에서 박첨지 제사를 지내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영면 성리에는 <흥부전>에서 놀부가 아우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흥부를 찾아가는 대목 중에 나오는 "고향 근처 한 곳에 당도하니 촌명은 복덕"에 나오는 지명 복덕과 같은 복덕촌(복성)이 있다고 한다. 성리에도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춘보'라는 사람의 얘기가 전해오는데, 가난 끝에 부자가 되었다든지, 선덕을 베풀었다든지 하는 인생역정이 흥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성산마을처럼 화초장 바위, 허기재 등 흥부전의 내용과 관련된 땅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흥부전"은 이와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피아골 종녀촌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 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려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인걸과 아미선녀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날개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 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후 하늘나라에서는 아미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이 쌀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 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 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그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벽소령에 있는 부자바위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세 자녀가 걷는 모습이다. 한 아주머니는 벽소령 도로공사때 마천 주둔 공병대 병사들이 몇 명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위를 잘못 건드려서라고 설명한다. 쌀바위를 얘기하는지 알 길은 없었다.
   
 
 
 
 
 
음양수와 선비샘 전설
남부능선과 주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음양수 샘터가 있다. 세석산장이 확장건립된 이후로 수량이 줄고 마르는 날이 많아졌지만 음양수 샘은 그 신비함에 옛부터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물로 인식되어져 왔던 샘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음양의 조화로 흘러내리는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양샘 주위에 몰려들어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러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한편 세석고원에서 서쪽으로 주능선을 따르다 보면 벽소령 못미쳐 선비샘이 나타난다. 야영의 흔적이 곳곳에 있고, 쓰레기로 가득 찬 이곳 샘터가 현재는 서서 물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실현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 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마야고
지리산의 여신 마야고(麻耶姑)는 남신 반야(般若)를 사모하여, 그리운 옷 한 벌을 고이 지어, 만나서 전해 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잘 닿지 않아 마음을 태웠다. 달 밝은 어느 날 밤, 마야고는 지리산 중턱에 앉아 반야의 옷을 품에 안고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꿈에도 기다리던반야가 자기 쪽으로 손짓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야고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의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는데, 이상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고, 쇠별꽃(나도개미자리과의 다년생 풀. 줄기가 연약하여 땅에 눕고, 흰 판화가 여러 꽃대에서 피어난다.)들만 달빛 아래서 바람에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쇠별꽃의 흐느적거림을 반야가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을 알게 된 마야고는 너무나 실망하여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었다. 마야고는 그 뒤로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정성껏 지어 두었던 반야의 옷도 갈기갈기 찢어서 숲 속 여기저기에 흩날려 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춰보던 산상의 연못도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찢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아났는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멀리 웅장한 지리산 산자락을 타고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天王峰이 보인다. 높이 1,915m)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반야봉(般若峰)(지리산의 제 2봉. 높이 1,734m) 은 마야고가 늘 바라보고 반야를 생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마야고가 메워 버렸다는 못은 누군가가 천왕봉 밑 장터 목에서 찾아내 '산희샘(山姬샘)'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야고의 한과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하여 고려 때 천왕 봉에 사당을 세우고 여신상을 모셨는데(현재 성모상은 중산리 천왕사에 있음) 일제 때 한 왜병이 군도로 그 코와 귀를 잘라 버리려다가 신 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뱀사골 전설
1천 3백여년전 반선 고을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어 해마다 불도에 정진하여 다른 불제자의 본보기 가 될 만한 승려 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 승려가 칠석날 정성껏 기도하면 구름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극락세계로 간다하여 불도들은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이 행사는 해가 갈수록 성대해져 갔는데, 세월이 흘러 조선 선조때의 고승 서산대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불심이 아무리 돈독하다고하여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될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해 모범스님으로 뽑힌 승려 에게 독이 묻은 옷을 입혀 신선대에서 기도하게하고 몰래 숨어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밤이 깊이 자정이 넘었을때 신선대 밑 용소가 요동치더니 거대한 이무기가 나와 승려를 덮쳤다. 서산대사는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간다는 흉계를 꾸며, 해마다 송림사가 한 사람을 속여 승려를 이무기의 제물로 바쳐 온 비밀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신선대에 가보니 승려와 이무기가 함께 죽어 있었다.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은후, 사람들은 이 골짜기 이름을 뱀이 죽었다고 해서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골짜기 입구의 마을을 반선이라 칭하는 것도 신선이 되겠다는 승려가 이무기의 밥이 되어 반쪽 신선밖에 되지 못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차일봉(종석대) 전설
차일봉은 그 모양이 마치 차일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데 정상에 암불이 솟아 있어 자연전망대로서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차일봉 남쪽 천은사 계곡 상류 깊은 곳에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우번조사가 젊은 시절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수도 정진하기를 9년째 되던 어느 봄날, 절세미인 한사람이 암자에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하였다.
여인에게 홀린 우번은 수도승이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여인은 온갖 기회요초가 만발하고 아름다운 수림속을 지나쳐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번은 여인을 놓칠까봐 산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 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은 간데 없고 난데없이 관음보살이 나타나 우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우번이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이는 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 것이라 깨닫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니 관음보살은 간데 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달은 우번은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속에서 수도하여 후일 도승이 되었다 한다.
우번도사가 도통한 그 토굴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됐으며, 또 우번조사가 도통한던 그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들려왔다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며,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서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달궁 전설
마한, 진한, 변한의 부족국가사회를 이루고 있던 삼한시대에 부족간의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한 군에 쫓기던 진한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던 자리를 달궁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심원달궁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 천혜의 요새였다. 진한왕은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 10리밖의 영에 정장군을, 동쪽 20리밖의 영마루에 황장군을, 남쪽 20리밖의 산령에는 성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북쪽 30리 밖의 높은 산령에는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해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고 하여 각각 정령재, 황령재, 성삼재, 팔랑재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나, 지금 달궁에는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 옛날의 궁성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뱀사골 와운마을의 천년송(千年松)
실제 8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할아버지 소나무와 20여 미터 사이를 두고 할머니 소나무가 있다. 이를 천년송이라 불렀고, 옛날부터 와운 마을에서는 정월 초사흘(음 1월 3일)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은 (음 12월 중순경부터) 공을 들이기 시작하여 당산 넘어 계곡(일명 산지소)을 깨끗이 치워놓고, 사흘마다 다니면서 목욕하고(음 1월 1일부터는 3일간 날마다) 옷 세 벌을 마련하여 목욕하면서 갈아입고, 목욕하고 와서 갈아입고, 화장실 갈 때 따로 입었다.
음력 1월 3일 아침 재를 지내며, 밥 해 놓은 것을 한지 종이에 싸서 소나무 밑에 묻고, 왼 새끼줄을 꼬아 소나무에 세 바퀴 놓고, 동동주를 세 군데에 나누어 뿌린다. 이렇게 하여 정성을 드린 사람은 지금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거문도에 살고 있는 김항신(69세)은 그의 부모가 아들이 없어 이 소나무에 정성을 드려 당산제를 준비하던 중 눈이 많이 와서 소나무까지 가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누군가 소나무까지 가는 길을 쓸어 놓아 이상하게 여기던 중 호랑이가 꼬리로 눈을 쓸어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을 낳았으니 김항신은 현재 큰 부자로 거문도에 살고 있으며, 지금도 일년에 한차례씩 천년송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두지바우 전설 - 하얀 말로 환생한 아들
문수리 밤재 입구에 있는 '두지바우'(뒤주바위)는 현재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데, 이 바위가 갈라진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두지바우 근처에 늙은 부부가 아들 하나와 함께 살았다. 그런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갑자기 불행을 당한 부부는 아들이 죽은 뒤 이레가 되도록 시체를 땅에 묻지 않았다. 이렛날 부부는 깜박 잠이 들어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낯선 이가 찾아와 배가 고프니 밥을 한술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들 부부는 나그네에게 밥을 차려 주었고, 밥을 먹고 난 나그네는 부부에게 슬퍼하는 연유를 물었다. 외아들이 죽었다고 하자 나그네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보자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무덤을 큰 바위 위에 만드시오. 그러면 저 세상에서 이 아이는 큰 복을 받게 될 것이오."
그리고는 나그네가 사라져버렸다. 꿈에서 깬 노부부는 나그네의 말을 들어 이튿날 두지바우 위에 죽은 아들의 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위 위에 아들의 시체를 올려놓고 흙과 잔디를 날라다 무덤을 만들었다. 묘를 다 만들고 부부가 돌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틈으로 아들의 무덤이 내려앉으며 푸르스름한 안개가 퍼져 나왔다. 잠시 후 그 안개에 휩싸여 하얀 말 한 마리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말은 부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고, 부부는 그 말을 아들로 여겨 데려다가 극진히 길렀다. 두지바우 한 귀퉁이에는 당시 말이 뛰쳐나오며 남긴 발굽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후 바위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칠불암과 허왕후 전설
칠불암과 허왕후의 전설은 불교의 남방 전래설과 관계있는 흥미로운 것이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여자라고 하여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 칠 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다. 허왕후는 연못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렸으나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성불한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못은 그 뒤로 영지(影池)라 불렀고, 수로왕이 이때 머물렀던 곳을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렀는데, 현재는 범왕리(凡王里)로 변해 있다. 또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으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쌍계사 아래 편에 대비리(大比里)로 변해 있다.
   
 
 
 
 
 
청학동 전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하였으며, 이를 본 고려시대의 이인로, 조선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 등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 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고,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 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짚어 보긴 했지만 확신을 갖지는 못하였다.
현재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현재의 청학동 말고도 여러 군데가 있다. 불일폭포 부근, 세석 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상덕평 마을(선비샘 아래) 등이다.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용추 쌀바위 전설
불일폭포는 하동의 명소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풍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천길 낭떠러지에 흐르는 비류가 직하하여 소를 만들었는데 그 소를 용소라 부른다. 용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날 불일폭포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불일폭포가 있던 골짜기 물이 곱게 흘러내리던 용소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이무기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것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용소 옆에는 불일암이란 암자가 있어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뇌성이 치고 벼락이 나무를 때리며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 쳤다.
산이 쩍 갈라지고, 용소에서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푸른 빛을 발하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쿵쾅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비가 마구 쏟아졌다. 이윽고 비가 멎고 뇌성도 잠잠해지자 불일암 스님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용소 옆에 하나로 서 있던 산은 두 개로 갈라졌고, 곱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없어지고 천애 절벽이 생겨 물이 폭포가 되어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이 절벽을 내려가 보니 절벽 밑으로는 새로 물길이 나 있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에는 큰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는 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님은 이는 분명 부처님의 자비가 내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쌀을 암자로 옮겼다.
그 다음날 스님은 다시 그 절벽의 뚫어진 구멍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 구멍에서는 또 쌀이 나와 있었다. 구멍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쌀이 나오게 되자 스님은 이 쌀을 화개장터에 내다 팔기로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 후부터 하루는 쌀을 구멍에서 옮기고 다음날은 그 쌀을 장터에 내다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의 쌀을 사는 아주머니가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쌀을 이렇게 조금씩 가져올 것이 아니라 며칠 모아서 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시면 수고도 덜고 또 목돈도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암자로 돌아와 밤새 곰곰이 생각하던 스님은 생각이 여기에 까지 미쳤다. "저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 넓게 뚫는다면 반드시 더 많은 쌀이 나올 것이고, 그럼 장터 아낙의 말대로 큰 부자가 될 수있을것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스님은 구멍을 더 크게 뚫을 도구를 챙겨서 폭포로 내려 갔다. 그리는 열심히 구멍을 뚫어 전보다 세배나 더 넓게 뚫었다. 구멍을 뚫은 스님은 내일부터는 세배의 쌀이나올 터이니 마음이 흡족했다.
그리고 그러면 부자가 될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밤잠을 설치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우다시피 했다.

날이 밝자, 스님은 큰 자루를 메고 절벽으로 내려가서는 곧 바로 크게 뚫어 놓은 구멍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그 곳엔 세 배로 많은 쌀이 나와있기는 커녕 단 한톨의 쌀도 없었다. 스님이 욕심이 그만 쌀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사람들은 그 쌀이 나오던 바위를 용추 쌀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륙전중건 전설
화엄사 경내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각황전이 서있다. 본디 이름이 장륙전(丈六殿)이었던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인 숙종 25년에(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공사의 마무리와 더불어 숙종으로부터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각황전이 건립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다음 설화에 그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
벽암스님의 제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촉을 받아 장륙전 중창불사를 시작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지원을 받아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밤새 대웅전의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계파스님은 다음날 아무도 몰래 절을 나섰다. 한참 길을 가다 보니 간혹 절에 와서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파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스님은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간밤에 받은 계시를 지워 버릴 수 없어 그 노파에게 장륙전 건립의 시주를 청했다. 어이가 없기는 노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하루종일 간청하는 스님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큰 발원을 하였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를 내리소서"라는 말을 마친 노파는 길 옆 늪에 몸을 던졌다.
스님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멀리 도망쳤다. 몇 년 뒤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나타난 계파스님은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스님을 보자마자 반가워 하며 매달렸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를 않았는데, 계파스님이 안고서 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손이 쫙 펴졌다. 그리고 그 손 안에 '장륙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장륙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시주하였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절 밥을 얻어먹는 하찮은 거지라도 청정한 공덕을 쌓아 장륙전 중창에 힘이 되었다는 감동을 주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 공주의 아버지 숙종에게는 딸이 없다.
 
 
 
출처 : 지리산커뮤니티 http://www.ofof.net/doc/a20.htm#v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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