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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담] 부산지역의 여러 전설과 설화들 (1) <BGM>
게시물ID : panic_505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6
조회수 : 242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18 19:02:41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1HGBV
 
(1) 시랑골 모분재 (慕盆齎)
 시랑골 모분재 암벽.jpg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는 신라가, 서쪽에는 가야(가락)가 대치하다가 드디어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켰다.
가야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혹은 일본으로 건너가고 혹은 깊은 산골에 은신하기도 했는데 이곳 대리천이 흘러내리는 언덕 위에도 가야시대 시랑(侍郞) 벼슬하던 사람이 피신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멀리 김해 땅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나라를 잃은 허망함을 달래었고, 해마다 나라가 망했던 날에는 옛날 벼슬하던 사람들이 모여 망해버린 가야나라를 그리워 하면서 모여 들었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져 내려오던 모분재(慕盆齋)라는 글자 속에는 가락의 중심 근거지인 김해 분산(盆山)을 잊지 못해 재(齋)를 올린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 모여 나라 잃은 슬픔을 나누던 정자를 벗들이 모였다가 떠나보낸다고 송우정(送友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시랑이 살았다고 붙여진 시랑골(侍郞谷)과 모분재(慕盆齋), 그리고 송우정(送友亭)의 전설은 암벽에 새겨져 있었던 모분재(慕盆齋) 각자(刻字)의 뜻을 해석하여 구전(口傳)되어 왔다.
 
 
 
 
 
 
(2) 애기소의 유래
 
대천애기소애기소는 원래 이심(泥心)이 소라고 불렀다. 옛날 이곳 폭포 물밑이 깊어 이곳에 들어가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폭포 밑 암벽에 이심이라는 전설의 물고기가 굴을 뚫어놓고 살았다고 하여 이심이 소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부터 냇가 아래 위로 삼림이 울창하여 항상 우수기(雨水期)에는 개울가 바위나 나무들이 마를 날이 없이 습기가 차서 이끼가 많이 끼고 그것이 떠내려와 냇가에 밀려오므로 이끼미소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이곳에 옛날 젊은 아낙네가 아기를 데리고 왔다가 주위의 뛰어난 경관에 심취되어 정신을 팔다가는 아기가 물에 빠져 죽는 것도 몰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애기가 빠진 웅덩이라 애기소(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애기소에 얽힌 실화가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대천마을에 신화식이란 소년이 살았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특히 말(馬)을 잘 그렸는데 마을사람들로부터 천재라고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이 천재소년이 우연히 정신병에 걸려 미쳐버렸다고 한다. 소년의 부친은 단 하나의 외동아들이 이렇게 되니 나날이 술로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이곳 애기소에서 투신자살 하였다고 한다.
옛날 애기소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어 온갖 전설이 생겨났다.
일설에는 계모 밑에 학대를 받던 처녀가 빠져 죽었다고 하여 애기소라고 불렀다고 하나 이는 말뜻과 다르며 애기를 데리고 온 엄마가 주위 경관에 감탄하여 정신을 팔다가 애기가 빠져 죽는 줄도 몰랐다고해서 애기소가 되었다는 전설이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3) 애기소의 전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속 외딴집에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은 강물 위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고 아내는 주변의 텃밭에 씨를 뿌려 가꾸며 추수하는 행복한 삶을 누렸다.
나날이 큰 어려움 없이 금슬 좋게 살아가는 부부였지만 오랫동안 태기가 없어 걱정이 되었다. 이에 아내는 차츰 수심이 쌓이게 되어 생각다 못해 부부가 의논하여 천지신명께 백일기도를 올려보기로 하였다. 남편의 승락을 받아 계곡을 따라 두어참 올라간 곳에 넓은 소(沼)가 있어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이 기도 드리기에는 안성마춤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웅덩이의 가장자리 너럭바위에 단정히 무릎 꿇고 앉아 지성껏 빌고 빌었다.
열심히 기도한지 어언 백일째 되는 날 초저녁, 한 선녀가 나타나 하늘의 법도에 의해 이 두 부부에게는 애기가 없으나 선녀의 노력으로 애기를 점지해 주되 태어난 후 3년 만에 도로 하늘나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약속할 것인가 하고 다짐을 받으려는데 선뜻 약속을 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약속을 하지 않으면 아기를 얻지 못할 것 같아 마음속으로는 얘기를 뺏기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선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꿈이 아닌가 하고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꿈은 분명 아니었다.
놀란 가슴으로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아기를 갖게 된데 대해 기쁘면서도 다시 잃게 된다는데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그렁저렁 해가 바뀌어 이듬해 여름 아내는 귀여운 옥동자를 분만하였다. 두 부부의 고마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금지옥엽으로 키우며 혹시 선녀가 와서 아기를 데려 갈세라 사립문 밖에 내보내지도 않고 애간장을 태우며 아기의 재롱을 낙으로 삼고 키원간 지 어언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부부는 3년이 되는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이제는 아기를 데려가지 않겠지 생각하고 선녀에게 고맙다는 인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기를 업고 소(沼)로 올라 갔다. 그동안 아기를 위해 발길을 끊었던 소(沼)에는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에 도취된 아내는 아기를 너럭 바위 위에 앉혀두고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며 경관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뜻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 신발 한짝 남기지 않고 사라진 아기를 찾아 물속이건 숲속이건 모두 다 뒤졌지만 흔적도 없었다. 아기를 부르며 찾아 헤매다 지쳐 쓰러져 흐느껴 우는 아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남편이 ‘처음부터 우리부부에게는 자식 인연이 없었던 것’이라고 위로하며 달래고 있을 때 선녀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아기를 돌려 달라고 애걸 했지만 ‘하늘의 법도를 어길 수 없는 일’이라며 아기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몸, 꼭 아이를 보고 싶다면 밤마다 이곳으로 나오면 매일 밤 아기와 선녀가 목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말한 후 사라져 버려 정신을 잃은 아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물 위에 쓰러진 아내를 울며 데리고 내려 올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아기가 빠져 죽은 곳이라며 ‘애기소’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화명동에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말 없는 너럭바위가 전설처럼 누워 있는 애기소가 있다.
그러나 그 넓었던 웅덩이는 사라호 태풍시 호우로 붕괴되어 버리고 여인의 치마폭 몇 장을 깔아 놓은 것 만큼 좁아졌지만 주위의 경치는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서 달 뜨는 밤이면 요즈음도 선녀는 아기를 데리고 목욕을 하러 내려온다고 할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4) 만덕고개와 빼빼영감
 
동래 남문(南門)밖에 동래와 구포장을 번갈아 다니면서 삿자리 장사를 하며 생계(生計)를 이어가던 홀아비가 살았다.
성(姓)도 이름도 없이 빼빼영감으로 통하는 이 삿자리 장사는 어찌나 여위고 피골(彼骨)이 상접(相接)하였던지 성내(城內)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이 영감이 하루는 구포장에 갔다가 여러 장꾼들과 함께 험한 만덕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 고개는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이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부터 동래부(東萊府) 관아에선 최대의 도적들 소굴이었으니, 지금 양정동(楊亭洞)의 마비현(馬飛峴=모너머고개) 화적떼도 이 무리에 비하면 문제가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만덕고개를 ‘만등고개’로도 불렀는데 만(萬)사람이 무리를 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 만덕 고갯길을 빼빼영감과 장꾼들이 구포장을 보고 동래로 돌아가면서 고개마루에 있는 주막에 앉아 잠시쉬게 되었다.
이때 별안간 10여명의 도적떼가 뛰어들면서
“꼼짝마라! 움직이면 죽인다.”라고 사나운 얼굴을 지으며 장꾼들을 한사람씩 묶어버렸다. 그리고 두목이 나서서 물건을 판 돈과 가진것들은 모조리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 이때 빼빼영감이 감연히 앞으로 나서서 도적을 향하여,
“여기있는 장꾼들은 이 험한 고개를 나돌아 다니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산다고 하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될 것이 아니옵니까?”라고 애걸(哀乞)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도적들은 이 빼빼영감에게 달려들면서,
“이놈! 묶인 녀석이 무슨 잔소리냐”하면서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차더니 땅바닥 위에 쓰러 뜨렸다. 영감은 봉변을 당하고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이놈들! 이 끈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고 외치면서 눈에는 살기(殺氣)가 등등하였다.
도적들의 시선이 빼빼영감에게 쏠렸을 땐 벌써 몸뚱이에 묶인 밧줄은 모두 끊어진 뒤였다. 이놈을 때리고 저놈을 밀어 넘어뜨리는 그 솜씨는 비호같이 날쌨다. 이 비상한 완력에 감당할 수 없었던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그러자 그는 묶인 장꾼들을 한 사람씩 모두 풀어주었다.
이때 힘을 얻은 장꾼들은 다쳐서 못달아난 도적들을 잡아 동래로 가자고 했으나 그는 “우리들에게 소득이 없는 일이라면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 그 자들은 이젠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술이나 한잔 합시다.”라고 하면서 술과 안주를 있는대로 다 가져오라고 주모(酒母)에게 청했다.
“여러분! 이 술은 모두 제가 사겠습니다. 마음껏 잡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마을에 내려가거든 오늘 일어 난 이야기만은 절대하지 말도록 거듭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했다.
술 대접까지 잘 받은 장꾼들은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려와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흘 후 장꾼의 한 사람이 빼빼영감의 집을 찾아드니 그 집은 텅텅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자 나라에서는 빼빼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을 알고 찾았으나 그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5) 만덕사와 용을천
 
만덕사는 고려(高麗)시대에 창건(創建)된 큰 절로서 산수(山水)가 뛰어난 이곳에 승려(僧侶)들을 비롯한 많은 객인(客人)들이 찾아 들었는데, 그래서 끼니때마다 쌀을 씻은 뜨물이 덕천(德川)을 흘러내려 낙동강까지 하얗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손님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던 주지스님이 어느날 절을 찾아온 도사(道士)에게 푸념을 늘어 놓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절에 손님이 적어지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도사가 대답하기를 “만덕사의 뒤쪽 산줄기인 용을산(龍乙山) 너머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위에서 막아 절 옆의 ‘대천내들’로 흐르게 하면 절에 식객(食客)이 끊어질 것이요.”하더란다.
대천내들이란 용호골 상류에 개간되어 있던 밭지대를 말한다. 이곳에 단구(段丘)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만덕사 뒤 용을산 너머로 흐르던 물을 막아서 절 옆으로 흐르게 했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도사의 말대로 하였더니 절에는 객(客)이 끊어지고 결국 절이 망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만덕사 금당지(金堂址) 서쪽으로 소량(小量)의 시냇물이 흘러 내리는 개울이 있는데 그 물길따라 농사를 짓는 논(畓)이 계단식으로 형성되어 있다.
 
 
 
(6) 만덕사 창건과 폐사의 유래
 
만덕사는 고려시대 초기 창건된 국찰(國刹)이었다.
만덕사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신라의 마지막 화랑장군인 노강필(盧康弼)과 이엄(利嚴)선사에 의해 태조 때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엄선사는 김해의 승광사(勝光寺)에서 4년동안 주석하면서 법풍(法風)을 떨친 스님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이곳 만덕사를 중창(重創)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덕사(大德寺)에 수장(收藏)되어 있는 ≪조선정벌기-동래함락편≫에서 나온 자료에 의하면 이처럼 만덕사는 고려초기에 건립되어 조선 선조시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이다.
만덕사가 국찰(國刹)인 것은 절터의 규모와 유물을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공민왕 때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를 원나라에서 왕으로 옹립코자 할 때 공민왕의 배원(排元)정책에 따라 석기를 만덕사에 삭발연치(削髮軟置)시켰다는 기록을 보아도 만덕사의 비중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왕자가 유폐 되었던 국찰인 만덕사는 그 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고려 왕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곳에서 왕족들은 왕(王)자가 들어가는 성씨(姓氏)로 변성을 하게 된다.
왕(王)씨, 옥(玉)씨, 금(琴)씨, 마(馬)씨, 전(田)씨, 전(全)씨 김(金)씨 등으로 성을 바꾸어 거제도와 합천 등 영남 일대에 흩어져 잠적,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선조 때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의 의승병(義僧兵)을 모집하여 최초로 만덕사에 집결시키고 일본군의 조선 침략을 막기위해 노력했으나 전세(戰勢)는 계속 불리해지고 만덕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타(燒打)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그 당시 일본군을 따라 다니던 왜승(倭僧)의 종군(從軍)일기인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만덕의 지명 유래에 임진왜란 때 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피난을 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만덕사에 많은(萬) 승려(大德)가 집결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7) 의성 옛 성터
 
옛날 신라(新羅)의 영토였던 구포지역은 김해쪽 가야(伽倻)나라와 경계를 두고 있어 국경을 수비관찰(守備觀察)하는 성을 쌓았다고 한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략은 대부분 소규모로 강가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노략질을 해 갔는데, 한번씩 대량의 군사를 동원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낙동강 하류지역을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성부터 함락(陷落)해야 내륙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성은 왜구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신라의 조정(朝廷)에서는 너무나 엄청난 왜구들의 난동에 고구려에 원병(援兵)을 청원하는 사신을 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군사는 500여 명, 성주(城主)는 황룡이란 장군이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왜구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와 성을 에워싸고 쳐들어 오자 황룡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나라를 위하여 의(義)로운 죽음을 남기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군사들이 성을 타고 올라 오는 왜구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또 싸웠던 것이다.
결국 왜구들이 성을 함락했을 때는 500여 명의 군사가 거의 죽거나 전상(戰傷)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현장에 올라온 왜구의 대장은, 이렇게 전멸할 때까지 도망가지 않고 싸운 군사들의 모습 앞에서 이제 더 이상 침략을 해보아도 승리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전쟁에는 이겼지만 그 이상의 큰 충격을 받게 된 첫싸움에서 기가 꺾여 바다를 건너 되돌아 갔다고 한다.
그래서 쑥대밭이 될 뻔 했던 낙동강유역의 주민들이 전쟁의 공포와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의(義)로운 죽음을 택한 황룡(黃龍)장군과 500여명의 군사들의 넋을 추모하는 뜻으로 이곳을 의성(義城)이라고 명명(命名)했다고 한다.
 
 
 
(8) 음정골 참샘이
 
구포 동편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골짜기인 음정골(陰井谷)에는 구포와 인근촌(隣近村)에 널리 알려진 ‘참샘이’라는 약수터가 있었다. 과거에는 동민은 물론 먼 동리(洞里)에서까지 여름이면 목욕을 하러 왔던 곳이다.  지금은 인가가 들어서고 정주(定住)하는 사람이 있어서 옛날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약수터 참샘이에 얽힌 옛 사연들이 있다. 가장 오랜 사연으로는 어느 때인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저 신라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에 어떤 부녀(父女))가 복스럽게도 살고 있었다는데 무단히 그 아버지가 몹쓸 피부병으로 오래 앓아 많은 가산(家産))을 탕진했다는 것이다. 그 외동딸은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를 간호했지만 별 차도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실망치 않고 정성을 다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서 신명(神明)께 빌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꿈에 어떤 약수터를 계시 받았다는데 그 물로써 아버지의 오랜 병이 신통스럽게 나았다고 한다.
그 약수터가 참샘이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즉 고려말엽 쯤 참샘이의 물을 유일한 식수로하여 2만석의 부호가 여기에 살았으며 그때 이곳에서 옛날 많은 말을 사육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등고개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였다는 것을 이 부근의 밭에 널려있던 썩어서 허옇게 된 수많은 조개껍질들이 증명해 주었다.  더욱이 참샘이 주위엔 옛날에 인가가 있었던 것을 표시나 하듯이 대나무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9) 금곡 안등골에 나타나는 귀신
 
금곡동 공창마을에는 산에서 다양하게 흘러 내리는 개울물을 이용하여 산답(山畓)을 형성,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몇군데 남아있다.
가야시대 쇠를 녹이는 야철지(冶鐵址)였던 불메등에는 산답(山畓)이 근래까지 4천평 정도 있었고 안등골에도 6천여 평의 산답(山畓)이 남아 있었다.
이곳 안등골에는 옛날 자연적인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 물로 농사를 풍요롭게 지으면서 4~500년전 조선시대부터 함안 조씨(咸安 趙氏)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지면서 이 저수지가 무너져 내려 조씨 일가(一家)는 멸족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안등골이 있는 산에 나무가 우거지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사기, 옹기, 기와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고 옛 무덤 자리에는 조씨(趙氏)의 각자(刻字)가 새겨진 비석들이 눈에 띄었는데 여기에서 나온 부식된 기와 조각으로 동네 사람들이 놋그릇을 닦을 때 사용했다. 그리고 이 저수지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두 곳의 너덜겅에 쌓여있던 돌들은 일제시대 김해 쪽 낙동강제방을 쌓을 때 운반되어 갔다고 한다.
이곳 안등골에서 산을 따라 더 올라가면 안등과 불메등으로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 있었다. 여기에는 마을 정자 나무로서 수백년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동네사람들은 방아송(반송)이라고 불렀다.
산답(山畓)이 많았던 이곳에서 여름철이 되면 물이 풍부할 때는 골고루 논물을 갈라 썼는데 가뭄이 겹치면 시간을 정해놓고 물을 자기쪽으로 대느라 물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밤에 물을 대기 위해 물길을 지키고 있으면 어느날엔가 난데없이 어디서 소리가 나면서 우장 삿갓을 쓴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몰래 물을 끌어가는가 싶어 다가가 보면 금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우장 삿갓을 쓴 사람이 나타난 그 이튿날에는 반드시 꼭 비가 와서 가뭄을 해소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아마 안등골에 살다가 저수지가 무너져 몰사했던 조씨 집안의 귀신이 가뭄에 애를 태우는 동네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 믿게 되었다.
안등골에 산사태가 나서 조씨 일가가 몰사했던 곳을 가리켜 동네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뜻으로 불쌍터라고 하였는데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안등골 위쪽에는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는데 이를 제공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공창사람들은 재난을 막아달라는 치성(致誠)을 드려왔다.
 
 
 
(10) 등대 역할을 한 동원 당산나무
 
부산의 제일 위쪽 마을인 금곡동 동원마을 앞 나루터에는 옛날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할배당산으로 섬기던 고목이 서 있었다.
동원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일본과 교역을 하던 나루터로서 강변에 주점(酒店)이 들어서 흥청거렸고 잉어, 장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어서 외지인의 발길이 잦은 곳이있는데 지금은 마을도 강나루터에서 높은 지대로 옮겨가고 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차랑차랑한 강물이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서있던 이 팽나무는 30m 이상 가지를 뻗쳐나간 웅장한 모습이었는데 1979년 태풍 때 가지 한 쪽을 잃어버리고 9m 가량 되던 나머지 가지도 뒤이어 닥친 태풍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옛날 전기도 없어 벽지였던 이곳에서 수령 400년이 넘었을 당산나무가 어업을 주로 하던 동민들의 등대 역할을 해 주었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강물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이 당산나무를 보고 뱃길을 잡았던 것이다. 또 어민들은 그 당시 매월 초 하루와 보름날이면 만선(滿船)을 비는 출어제(出漁祭)를 지냈다.
이처럼 당산나무를 마을사람들은 신주(神柱)로서 굳게 믿고 있었다.
한일합방 직후 나무 옆에 있던 나루터의 큰 바위를 깨뜨리려던 일본인 2명이 죽었는데 이 나무의 신령술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해방 직후 콜레라가 그렇게 많은 목숨을 앗아갔어도 이 마을 주민들은 당산나무의 보호 덕분에 한 사람도 불행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1979년 태풍으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내의 모 재벌이 가구용으로 쓰기 위해 몇 백만 원을 줄 테니 팔라고 해도 주민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마을에 큰 재앙을 초래한다는 이유였던 것이다.
이처럼 받들어 모시던 당산나무가 자취를 감춘 뒤 지금도 강변 나루터의 나무둥치가 있는 자리에는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찾아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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