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나를응시하던 눈동자는 금세 내 옆으로 미끄러지듯 옮겨갔다. 순간 잡고있던 그이의 손을 꾹 눌러 잡았다. ‘왜?’ 라는 물음이 내 귓가에 울렸다. 눈치가 빠른 그는 그녀를 얼른 힐끔 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친구?’
유난히 붙임성‥ 아니, 넉살이 좋았던 나는 3월이 채 가기도 전에 금세 아이들과 친해졌다. 그러나 그 친목이란 굉장히 얕고 넓은 관계인지라, 짝을 지어 무언가를 하거라, 하는 말이 나오면 끼리끼리 짝을 짓는 아이들 틈에 멍하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시부랄, 의리도 없는 년들.”괜스레 민망해져 중얼중얼 거리며 남는 사람 아무하고나 섰는데, 그게 그 애였다. 붙임성 좋은 나도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한 아이였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교내에선 나름 유명했다. 빛을 받아도 갈색 빛 하나 돌지 않는 새까만 머리칼과 새까만 눈동자로. 딱히 예쁘게 생기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아우라 때문에 건너편 남학교에선 인기가 조금 있었다는 것 또한 유명했다. 말수도 없고, 수업시간이 아니면 공부를 하거나 간혹 그림을 그리는 애.
여학교의 체육시간. 그저 시장바닥이다. 2인1조로 하나씩 나누어 준 배구공은 어느새 누군가의 품 안으로 들어가있고 수다를 떨기에 바빴다. 나 역시 나에게로 온 공을 어딘가로 휙 던져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야, 가위바위보 하자.”
이 웬 쌩뚱맞은 소리인가. 멀뚱히 쳐다보는 그녀에게 덧붙여 말했다.
“이긴사람 소원 들어주기. 안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그녀는 얼결에 꼭 쥔 주먹을 내었고, 나는 보자기를 내었다. 아싸! 하고 외친 나는 잠시동안 고민하다 개구지게 웃으며 이렇게 말 했다.
“언니 대접해주기.”
“뭐?”
“1년동안.”
아, 내가 깜빡한 것이 있었다. 그 애가 교내에서 꽤나 유명한 이유는 머리나 눈동자보다도, 시키면 다 하는 융통성 빵점, 바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1년동안 그 애에게 ‘언니’ 라는 호칭을 들어야 했다.
어느순간, 그 애와도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언니 하는 호칭은 나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금세 적응되었다. 친해지고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종알종알, 이라고 표현 했을 때 어색하지 않은 정도 쯤. 별 일 없이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다 만 늦가을이 되었다. 언니 것을 입은 것 마냥 한 품은 큰 하얀 니트에 파묻히다시피 하고서는 무언가를 열심히도 사각댄다. 그 애는 다른 과목은 ‘더럽게’ 잘했으나 수학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다른 과목은 간신히 선생님의 매질을 면할 정도였지만 수학은 얼추 잘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아마 저렇게 사각대고 있는 것은 수학일 것이다. 저렇게나 매달리는데도 점수가 좋질 못하다. 그런데 놓지도 않고 끝까지 붙들고 간다. 징하다.
“저기‥, 언니.”
아직도 뭔갈 부탁할때는 저렇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언젠가는 농담처럼 ‘너 아부 떠는거지?’ 했다가 그 소리를 들은 주변 아이들의 째림에 호되게 당했다. ‘왜 순진한 애한테 못되게 굴어, 망할 년아.’ 하는 눈으로 보는데, 솔직히, 무서웠다.
“이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인수분해 했어?”
“안되는데‥”
“줘봐,”
그애가 끄적인 계산들을 죽 보다가 ‘에라이,’ 하고 뒷통수를 탁 때리‥지는 못하고 손만 대충 얹었다 떼었다.
“넌 4의 제곱이 36이냐?”
맨날 이래가지고 다 틀리지, 멍청아. 하며 대충 찍찍 긋고 다시해, 하며 돌려주었다. 연습장을 돌려받더니 미술용 연필을 손에 쥔다.
“너는 무슨 문제를 미술용 연필로 풀어?”
“이러면 수학에도 좀 정이 가지 않을까, 해서.”
가지가지한다, 하고 웃다가 우연히 소매를 스치듯 보았다. 손등을 다 덮어 손가락만 빠끔히 고개 내민게 영 걸리더라니. 하얀 니트소매 끝이 연필 탓에 거뭇거뭇해진 모양새가 영 보기 좋지 않아 문제를 풀고있는 손에서 연필을 빼앗아 제 책상에 두었다. 어리둥절한 시선이 오기도 전에 손목을 붙잡아 와서는, 소매를 걷어주었다.
“안그러게 생겨서 은근히 칠칠맞아요. 너 이거 빨려면, 어?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 없었다. 반대쪽 줘봐, 해도 반응이 없길래 막무가내로 또 손목을 붙잡아 와 걷어주었더랬다.
그날, 그 애는 하루종일 말이 없었다.
그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하루종일 말이 없었다.
얼마나 되었을까, 점심시간이었다. 이젠 내가 먼저 무슨 일 있어? 나한테 화난거 있어? 하고 말하기도 지쳐 가만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러더니 체념한 듯 하면서 결연한, 아이러니한 표정으로 나에게 와 앉더랬다. 색연필을 들고서.
“내 눈동자가 예뻐?”
얘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어리둥절 했지만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내 눈동자가 싫어.”
그러더니 연습장 한 장을 북 찢어 그 위에 검은색 색연필로 까맣게, 까맣게. 까만 동그라미를 그렸다. 또 한 켠에는, 가지고 있는 색연필 색깔을 다 덧칠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둘 다 까맣지만, 덧칠한 눈동자는 탁하고 오묘한 색이었다. 썩, 예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굉장히 맑아보이는 까만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그랬다.
“내 눈동자는 이 색이겠지. 언니 눈동자는 이거 말고 옆에 있는 이 검정색이야. 난있지, 내 눈동자 색은 공허해서 싫어. 아무것도 없이 그냥 마냥 까맣기만 해. 그냥‥ 그게 나인 것 같아서 싫어.”
“…….”
“언니 눈동자는 안 그래, 여러 색깔 다 섞인 것 같은 검은색이야. 꽉찬 검은색. 쾌활한 색, 차분한 색, 경쾌한 색, 우울한 색. 다 섞인 검은색.”
“그게 뭐가 좋아, 너 지금 나 다중인격이라고 놀리는 거지?”
나름대로 농담을 해 분위기를 풀려고 했지만 그 애는 끝까지 심각했다.
“그래서 난, 그게 좋아. 나한텐 없는걸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면 이상한건데도 마냥 좋아. 이상한건데, 그래도, 좋아‥ 언니,”
“저기, 잠깐만. 그러니까‥ 내가 머리가 나빠서 정말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그, 네가 좋다는게. 내 눈동자 색이야, 아니면‥?”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어느틈에 시나브로 고인 눈물이 그 애 눈에서 뭉텅뭉텅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애는 오래도록 그렇게 울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영부인마냥 치렁히 장신구를 단 귀부인은 내 뺨을 불이 나게 때렸고, 그 부인 옆의 당시엔 흔치않던 교복을 입은 학생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보였는데도 얼핏 귀티가 흐르는 얼굴로 날 더럽다는 듯 흘겼다. 그리고 곧, 싫다는 말을 못 하는 융통성 빵점인 그 애가 “엄마 제발, 그만해요!!” 하고 외치는걸 보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도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쟤는 싫댔어. 내가 들러붙은거예요. 내가, 싫다는데도 매달린거야.” 따위의 내용을 말하는 것과, 내가 뺨을 맞았을 때와 비슷한 울림은 너무도 선명히 들렸다.
일주일간 그 애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일주일 뒤에는 누구도 모르게 전학을, 이사를 가버렸다.
“여보, 아는 사람이냐니까?”
아, 다른 생각을 좀 했어요. 하면서 그 애를 물끄러미 보았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그이에게 성큼히 다가와서 ‘같은 학교 다녔었어요. 안녕하세요.’ 하는 음성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서글서글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영 낯설다. 어느새 그이와는 이야기가 끝났는지, 나를 보고 그런다.
“있지, 나 오늘 첫사랑을 만났어.”
“어? 아, 어‥ 그래.”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웃기지? 그 사람, 결혼한 걸 보니까‥”
그러더니 이전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다
“그제서야‘아, 다 잊었다.’ 싶더라고. 바보같지.”
난 그 옛날에도 그러했듯, 아무말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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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 써보는건 처음이네요. 여자 주인공을 생각해두고 있었는데 시제에 '그녀가' 서있었대서
어쩌지? 하다가 문득 생각난걸로 요래 끄적여봐요. 분량은 엔터 없이 2장 거의 다 채웠어요.
아이고 떨려라 ㅠㅜ
(퇴고도 다 안 마친 상태에서 실수로 등록버튼 눌러서 ㅠㅜ 삭제하고 다시 올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