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5. MBC <뉴스-후>에서 계란으로 바위 깨기의 내용이 <사법피해자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방영되고 며칠 뒤 자신의 남편이 살인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슬기 엄마가 찾아와 도움을 호소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사설탐정 원린수
2007.8. 목포시 축복동에서 슬기아빠(32세)와 동료 유씨는 술이 만취한 상황에서 이 지역 폭력배들과 싸움이 벌어져 슬기아빠의 동료가 숨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목포의 검경은 슬기아빠가 술이 너무 취해 자신의 동료를 상대방으로 착각하여 돌려차기로 넘어트리고 밟아 죽였다고 구속 기소했고 1심법원도 징역5년을 선고했었다.
슬기아빠가 범인이란 증거는 슬기아빠와 싸운 상대방들의 증언밖에 없었다.
조사를 시작한지 20여일 만에 폭력배가 숨진 유씨를 돌려치기로 차 쓰러트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 2명과 유씨가 쓰러진 이후 폭력배가 다른 사람과 합세해서 슬기아빠를 장시간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4명 등 도합 6명의 목격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사건 직후 현장을 조사나온 경찰 3명에게 슬기아빠는 폭력배에게 맞기만 했다는 목격내용을 목격자가 말했는데도 경찰은 이 내용은 누락시키고 계획적으로 슬기아빠를 범인으로 조작한 증거도 찾아냈다.
나는 <범인은 폭력배이고 경찰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검사에게 신속한 조사를 요구했으나 검사는 미동도 하지 않아 정식으로 고발장을 목포지검에 제출하자 검사는 어처구니없게도 사건을 조작한 경찰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광주고검에 부당한 내용을 알리는 진정서를 제출했더니 광주고검에서는 <진정인의 주장이 맞다>며 목포지검에서 수사를 직접 하라고 지시했으나 목포지검의 검사는 고검의 지시도 묵살하고 더 이상 수사할 필요성이 없다며 <공람종결>해 버렸다.
나는 광주고등법원에서 진행된 슬기아빠 사건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목격자를 찾아낸 과정과 목격자의 목격내용을 증언했고 이후 목격자도 사건현장에서 증인선서를 한 후 상세한 목격내용을 증언했다.
슬기아빠는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도록 수사검사나 경찰은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아 2009.9. 진범들을 처벌하라는 고발장을 제출했다.
자비를 들여 4번이나 목포경찰서를 찾아가 적극적인 수사협조를 했는데 경찰이 조사를 할 때는 이미 범인들은 도망을 쳐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리고 사건은 기소중지 시켰다는 통지를 받았다.
2010.6.4. 다른 사건 조사를 위해 무안경찰서를 방문해 일을 보던 중 게시판에 부착된 지명수배자 전단을 보게 되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고발한 진범들의 사진은 지명수배자 전단에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해 바로 담당형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우물쭈물 하며 말을 하지못해 다그쳐 물었더니 지난 3월에 진범을 검거했는데 검사가 석방시켰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목포경찰서 형사과를 찾아가 상세한 내용을 확인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유씨를 때려 숨지게 한 폭력배가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거주지로 되어 있었고 2010.3.16. 부산의 한 PC방에서 검거된 것을 검사가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석방지휘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진범을 찾아 내 고발했는데 검사는 자신들의 범죄혐의가 들어 날까봐 몰래 풀어 준 것이다.
나에게는경찰과 검찰의 범죄증거가 있다.
글쓴이 - 원린수
익산택시기사 살인사건 억울한옥살이
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용구(류승룡 분)가 억울한 살인누명을 쓰고 결국 사형당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7번방의 선물’처럼, 살인 혐의로 10년간 옥살이한 20대 청년이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사건의 시작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10일 전북 익산시 영등동 내 버스정류장 근처에선 택시운전기사 유모(당시42세)씨가 10여차례 칼에 찔려 숨지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씨가 무전기에 남긴 말은 “약촌사거리, 강도야”가 전부였다.
당시 인근 다방에서 배달일을 하던 최모(15)군은 애초 목격자로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최씨의 증언으로 몽타주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이틀 만에 경찰은 최군을 참고인이 아닌 용의자로 지목했고, 선배들과 천안에 있다 익산으로 돌아온 최군은 긴급체포됐다.
“경찰서 아닌 여관에서 날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어느덧 28세 청년이 된 최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익산역에서 체포한 최군을 경찰서가 아닌 한 여관으로 끌고갔다. 형사들은 최씨의 뺨과 머리를 때리며 자백을 요구했고, 겁에 질린 최씨는 구타에 못이겨 자기가 살인을 했다는 자백을 했다.
최군에 대한 폭행은 경찰서에서도 계속됐다. 대걸레와 경찰봉으로 발바닥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위를 골라 때렸다. 최씨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할 때 마다 “왜 번복하느냐”며 폭행은 이어졌다.
최군은 검찰에게도 폭행을 당한 사실을 밝히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2001년 2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1년 5월 2심에서는 최군은 갑자기 혐의에 대해 순순히 자백을 했다. 당시 최군의 변호를 맡았던 국선변호사가 ‘혐의를 인정해야 형량을 줄일 수 있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그 결국 2심에서 최씨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상고를 포기했다. 불과 16살이었던 소년은 살인범이 돼 그대로 교도소로 가야했다.
2003년 최군은 자신의 누명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자신이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김모(당시 22세)씨가 긴급체포 된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진술을 번복했고, 당시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은 김씨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최군은 한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국가인권위에 긴급구제조치 신청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인권위는 이례적으로 ‘1년 이상 경과해 위원회가 조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국가인권위가 나서 누명을 풀어달라”
결국 10년의 복역기간을 마치고 20대 후반 청년이 된 최씨는 최근 자신의 누명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최씨와 가족들은 22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최씨의 사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길 촉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인권위가 재심 청구에 입장을 내지 않는다면 국가기구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며 “이제라도 책임지고 반성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기관이 되려면 이번 재심 구제를 처리해야한다”고 요구했다.
재심 청구를 담당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징역 10년을 받게 된 억울한 상황을 바로 잡자는 것”이라며 “가혹행위를 한 경찰들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조치를 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36년만의 무죄 판결, 그리고 끝나지 않은 법정공방
197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었 던 정원섭 씨(76, 당시 38세). 그는 당시에도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대법원까지 간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로부터 36년 뒤, 15년의 형을 살고 모범수로 출옥한 정 씨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달라며 다시 법의 심판을 요구했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지난 2008년 11월 28일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정 씨는 왜 범인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검찰의 항소로 아직 진실 공방은 끝나지 않았지만, 재판부는 왜 36년이 지난 지금 무죄판결을 내린 것일까?
시한부 검거령, 그리고 고문과 조작 의혹
72년 10월 유신 직전, 당시 ‘전국 4대 강력사건’ 규정되어 내무부 장관이 ‘범인 시한부 검거령’까지 내렸던 사건. 그 시한부 검거령 하루 전에 잡힌 정 씨를 범인으로 만든 결정적인 증거는 검사 앞에서의 자백과 여러 목격자들의 진술이었다. 그러나 30여년 전 재판 당시에도 목격자들의 증언 번복과 경찰의 고문, 협박여부, 피의자의 알리바이 등이 논란이 되었고, 이에 대해선 지난 2001년 [그것이 알고 싶다 - 아들아, 너는 살인범의 자식이 아니다 편]에서 방영한 바 있다.
당시 취재에서 정 씨의 범행을 증명했던 사건 당시 핵심 증언자들은 경찰의 강압에 의해 억지 진술을 했다고 제작진에게 털어 놓았다.
그리고 7년 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새로운 단서들이 발견됐다.
5000 페이지에 달하는 사건 관련 기록, 그리고 경찰의 가혹행위와 사건조작에 대해 새롭게 드러난 관련자들의 증언은 당시 정 씨를 범인으로 규정했던 공소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단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아직 최종적인 법적 결론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정 씨의 사건은 지난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한 번 ‘진상규명’된 바 있다. 얼핏 보면 정 씨의 사건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굵직한’ 시국사건, 공안사건들과는 다른, 한 시민의 ‘평범한 형사사건’처럼 보이지만, 인권을 중시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읽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는 말했다.
지난 36년간 강간살인범으로 살아왔던 정 씨. 체포당시 만삭이었던 아내와 그 가족들은 가장의 불명예스러운 멍에를 나눠지고 비참한 생활을 보내왔다. 지난 1심에서 받은 무죄판결문을 들고 얼마 전 춘천 선산을 참배했던 정 씨의 마지막 소원은 다시 명예롭게 고향에 돌아와 살고 싶은 것 뿐이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사법피해자 모임
출처 ;미제사건추적
http://cafe403.daum.net/_c21_/home?grpid=1GnA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