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22일 경상남도 통영시(당시 충무시) 통영항 남쪽 700m 해상에서 해군·해경 신병과 기간사병 311명과 승무원 5명 등 316명을 태운 해군YTL(예인선)이 뒤집어지면서 침몰해 장병 159명이 사망
당시 해역에는 최대풍속 18m의 강풍이 불어 높은 파도가 일었고, 기온마저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있었다. 마침 풍랑 주의보를 접하고 항구로 피항하던 어선들이 달려와 구조작업에 나섰지만 인명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이 사고는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많은 인명 손실을 낸 대참사로 꼽힌다.
당시 신병 311명과 승무원 5명 등 316명을 태운 해군 YTL선은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와 승선하기 위해 급회전을 하며 배를 모함에 대던 중에 전복 사고를 당했다. 이날 사고를 당한 신병은 공교롭게도 '해군 159기'였다.
대형 사고의 배경은 탑승인원이 정원(150명)을 배 이상 초과한 상황에서 돌풍 같은 불순한 기상조건으로 구조 활동이 부진했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됐다. 특히 모함(LST 815호)이 뻔히 보이는 30미터 앞에서 전복되었는데도 승선자의 절반이 실종·사망한 것은 수영훈련조차 받지 못한 신병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이튿날 열린 국회 국방위에서 해군 참모차장은 "진해의 수영시설 미비로, 사고를 입은 159기 훈련병들에게 아직 실질적인 수영훈련을 시키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7구의 시체가 서로 팔짱을 낀 채 포개져 엉켜 있었다"는 잠수부들의 증언은 훈련받지 못한 신병들에게 닥친 사고 당시의 참상을 짐작케 한다.
해군은 침몰한 지 사흘 만에 배를 인양해 사체 128구를 건졌다. 사체를 확인하지 못한 실종자도 29명이나 되었다. 구조 후 사망한 2명을 포함해 국가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 159명이 수영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떼죽음을 당했으니 정상국가라면 정권이 퇴진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책임지기는커녕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다. 책임자 엄중 문책을 공언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은 해군 참모총장과 차장을 해임, 예편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해군 YTL선 침몰 사건은 해군 공식 역사에는 없다. 부끄러운 수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해군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진 부끄러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위령제조차 지내지 않았다. 통영해군전우회 주관으로 민관군 합동위령제를 연 것도 사고 발생 24년이 지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부터다. 해군은 숨기고 잊었지만, 생때같은 자식·형제를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날의 참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
배경 : 구일본군 장교출신인 박정희는 이미지세탁을 위해 충무공을 숭배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군장병들을 방문시킴
원인 : 탑승인원이 정원(150명)을 배 이상 초과한 316명이 탑승한 상륙함이 급회전을 하며 배를 모함에 대던 중에 전복
구조 : 인근 어선들이 투입되어 구조활동
조치 : 책임자 엄중 문책을 공언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은 해군 참모총장과 차장을 해임, 예편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언론 : 파문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언론 통제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et6840&logNo=50085685243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