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가 주는 또다른 이미지 즉, 뚱뚱하고 말이 분명치않고 눈빛이 흐릿하고와 같은 바둑 고수답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뭔가 분명치 않은 기색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4살 우승'은 창호가 진정 놀라운 천재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 어느 누구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14살'이란 나이가 바둑에 종사해온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준 것도 사실이다. 필자 역시 "바둑은 진정 도(道)나 예(藝)라 할 수 있는가. 바둑이 예도라면 어떻게 세상 경험도 전무한 14살 소년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격렬한 의구심에 휩싸이곤 했다. 필자는 이무렵 곧잘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사실 창호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창호는 불가사의란 네글자로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1988년에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에 연승부문마저 휩쓸었던 창호는 1989년에는 전반 6개월동안에만 무려 67국을 두어 53승 14패라는 발군의 기록을 세운다. 이창호는 이해에 모두 111국을 두어 84승 27패의 전적을 거두는데 이 111국은 연간최다대국 부문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다. 4단시절인지라 창호는 거의 모든 기전에서 1차예선부터 참여했고 계속 이겨 타이틀전까지 치렀기 때문에 대국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이같은 '살인적인 대국'은 '기사생명 단축'과 결부되어 바둑가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창호는 그러나 이듬해인 90년에도 109국을 두었고 오늘날에도 매년 70국 이상의 많은 대국을 소화하고 있다. 주위에선 작은 기전엔 나가지 말라고 하고 본인도 그랬으면 하는 눈치지만 대회를 주최하는 측에선 최고 인기기사인 이창호를 반드시 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이창호로서는 힘든 강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본인이 힘들게 출전을 거절하는 경우 선배기사를 통해 출전 교섭이 들어오고 그러면 창호는 결국 굴복하여 대국에 나서곤 했다. 다행히 어렸을 때 우량아 상을 받았던 타고난 체력이 창호에겐 큰 도움이 되어왔으나 1989년에 기록된 연간 111국이란 이 살인적인 대국은 앞으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기록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이창호가 '기록제조기'란 새로운 별명과 함께 바둑판 361로(路)의 난제들을 일직선으로 돌파해가고 있던 1989년 9월, 싱가포르에선 한국의 최강자 조훈현 9단과 중국 최강 네웨이핑 9단의 제1기 잉창치(應昌期)배 결승전 최종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2대 2에서 벌어진 마지막판. 서울과 베이징(北京)은 이 한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결과는 曺 9단의 불계승. 한국바둑계에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의 매스컴은 만화와 사설까지 바둑으로 뒤덮혔다. 조훈현의 집에 TV 카메라 부대가 들이닥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처럼 조금은 유치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한 가족들의 만세 장면과 손가락으로 'V'자 그리기 장면을 촬영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曺 9단은 불도 켜지 않은채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우승컵이 한쪽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테이블엔 40만달러짜리 수표가 든 하얀 봉투가 뎅그렇게 놓여 있었다. 曺 9단은 말이 없었다. 고요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방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문기사를 위해 曺 9단의 심정을 들어보려 들렀던 나는 바다 밑 같은 분위기에 동화되어 함께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曺 9단이 어둠속에서 침묵을 깼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말에 응축되어 있는 뜻은 풀이하자면 이랬다. "일본과 중국 바둑은 하늘처럼 높아서 우리의 상전 같은 존재였지만 나는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물리치리라고는 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지만 기적같이 그 일을 해냈다. 앞으로는 누가 그 힘든 일을 해낼까. ······그 일은 그만 생각하자. 창호가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어투는 착 갈아앉아 있어 40만달러짜리 우승컵을 막 따낸 사람치고는 어딘지 우울해 보인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부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뜻밖에도 창호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어조는 차분하여 묘한 서글픔마저 띄고 있었던 것이다.
"창호는 믿을만한가" 하고 내가 묻자 曺 9단은 "그럼, 믿을만하지." 했다. 9살 때 프로생활을 시작하여 근 30년간 쉬지않고 달려온 曺 9단은 인생의 정점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빛나는 성공,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오랜만의 휴식에 망연해졌던 것일까. 문득 외로워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끝없이 이어질 제자 이창호와의 피나는 승부를 이때 이미 본능적으로 예감했던 것일까.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예감>
한국에서 바둑은 3번의 도약을 통해 스포츠 등 다른 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1980년 조치훈의 명인쟁취가 처음이었고 1989년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 두번째였다. 세번째가 이창호의 등장인데 이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했던 것은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었다.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장내를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서 거창한 회견을 했고 꽃다발을 목에 걸고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런 식의 카퍼레이드는 한국에서 조 9단이 마지막이었다. 曺 9단은 이튿날인가 TV 출연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방송국에 나갔다. 집을 비워둔 채였다. 그날 曺 9단 집에 도둑이 들었다. 절묘하게 허를 찌른 날카로운 도둑이라며 웃고 말았지만 참으로 씁쓸한 사건이었다.) 曺 9단은 서울에 오자마자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를 차례로 무찌르고 3연속 타이틀방어에 성공했다. 응씨배 우승을 통해 曺 9단은 더욱 강해진 느낌이었다. 바둑계에선 '19로의 마술사'라 불리던 그에게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선사했다. 바로 이무렵, 그러니까 프로입단 3년째인 89년 12월에 이창호 4단이 다시한번 최고위전의 문을 노크하며 슬며시 나타났다. 어언 4번째 도전이었다. 12월 11일의 첫판에서 창호는 놀랍게도 6집반승. 이창호는 영화속의 로마군처럼 큰 방패를 일렬로 세우고 창날만 내민채 착착 진군해 曺 9단을 쓰러뜨렸다. 바둑이 시작되기 전에 창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특유의 죄송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바둑이 시작되자 철가면을 쓴 기사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일년 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제2국은 그러나 曺 9단의 불계승. 혼전에 말려들어 손쓸새 없이 져버리고 말았다. 3국에선 다시 이창호의 불계승. 이판에서 창호는 명국이라 할만큼 완벽한 바둑으로 승리를 거뒀다. 창호가 2대 1로 앞서자 바둑계 인사들은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늙은 스승이 제자에게 지고 나서 허허 웃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스승이 정상의 위치에 있을 때 제자가 진검승부를 펼쳐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바둑이건 스포츠건 다른 분야에선 본 적이 없다. 스승이 제자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모습은 이것도 인연이요,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낯설고 이상하여 상상하기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바둑계 밖에선 이창호라는 정체불명의 소년과 스승 조훈현의 맞대결을 놓고 벼라별 얘기가 다 떠돌았다. 몇몇 팬들은 제자가 어떻게 스승을 이길 수 있느냐, 바둑계는 예의도 없느냐고 한국기원에 항의했고 그럴 때면 한국기원은 "일본 바둑계에선 제자가 스승을 이기면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답니다."고 대답해줬다. 그러나 일본에선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얘기는 늙그막의 스승이 제자와 만나 대국을 벌이고 제자가 힘없는 스승을 꺾어 잘 배웠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을 두고 은혜를 갚는다고 말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펼쳐 제자가 이기는 것을 말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가 피나는 승부를 벌인 경우는 조훈현 - 이창호가 바둑 사상 처음이었다. 용호상박의 싸움끝에 최종국인 제5국이 1990년 2월 2일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포석에서 뒤진 이창호는 시종 비세에 몰렸으나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인생역정을 무수히 겪어본 장년의 승부사처럼 자리를 꽉 차고 앉아 괴이하고 줄기찬 승부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창호는 결국 자신의 능기인 '장구(長久)한 기다림'과 '완벽한 계산력'을 십분 발휘하여 역전 반집승을 거두게 된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그렇다. 반집이었다. 이창호가 이후 무수히 엮어낼 반집의 드라마. 수많은 초일류 기사들을 악몽 속으로 몰아넣었던 반집 역전승의 드라마는 이렇게 첫번재 테이프를 끊었다. 창호는 이리하여 생애최초로 신문기전에서 우승했다. 공교롭게도 최고위(最高位)는 20년전 曺 9단이 타이틀 사냥을 시작할 때 최초로 손에 넣었던 바로 그 타이틀이었다. 이튿날 매스콤은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이창호 보은(報恩)의 타이틀획득'
1990년에 접어들자 신문의 바둑란에 '4인방시대'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의 4강시대라는 뜻인데 왜 의미가 좋지않은 '방(坊)'자가 들어가게 됐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치에서의 오랜 독재가 빚어낸 언어의 굴절현상일까. 높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싫은 나머지 바둑에서 정상에 군림하는 4사람의 강자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도 서울에선 이 네사람을 4인방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중국만은 문화혁명시절 악역을 담당했던 4인방과 구분하여 4천왕(天王)이라 부르고 있다. 아무튼 4강시대라지만 타이틀전에 관한한 조훈현의 아성을 여전히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창호는 만 15살 때인 1990년 2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6개월동안 국내기전에서 무려 41연승을 거두어 바둑계를 경악시켰다. 이것 역시 신기록이었다. 그때까지 연승기록은 김인 9단이 25살 때인 1968년에 세운 40연승. 하지만 당시는 강자가 적던 시절이라서 이창호의 41연승은 더욱 돋보이는 기록이었다. (10년후 이세돌 3단이 32연승을 세우며 역대 연승기록 3위에 오른다. 조훈현 9단은 전관왕을 3번이나 해치운 사람이지만 연승기록은 1977년의 31연승이 최고다.) 우물안 개구리 소리를 듣던 창호가 이무렵부터 해외대국에서도 드디어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