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아직 중세 사회다. 인간의 자유, 주체성,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의 조류를 우리는 겪어본 적이 없다. - 개화기의 ‘모다니즘’이 근대화의 물결을 충분히 일으켰다고 보기에는 여러가지 지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 상황도 그러하고. -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재벌총수들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왕조 시대의 신민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회장님이 회사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망하기에 총수들은 얼마나 큰 금융범죄를 저질렀든 집행유예를 받는 데에 그친다. 한국 사회를 삼성이 다 일으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시장에서 사회에서 인격적 주체로 다루어지지 않는 사회를 어찌 근대적 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몇몇 영웅들이 시장을 통채로 세웠다고 믿는 사회의 어디에서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과 이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모더니즘을 겪지 못한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겪었을 리가 없다. 서양의 기준으로 보면 근대가 인간에 대한 신앙의 시기라면 중세는 인간 외의 것들에 대한 신앙의 시기이다. 주변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현재 신앙의 대상인지 생각해보자. 어처구니 없게도 인종주의도 현재 신앙의 반열에 올라있다. 남성우월주의가 신앙의 대상인 것은 심지어 별로 신기하지도 않다. 한국 사회라면 이건 차라리 그럴싸하니까. 광신적인 태도는 우파만의 문제는 아니다. 통합진보당 분당 당시의 분신을 생각하자. 그리고 그의 분신이 이중으로 안타까움 역시 기억하자. 그의 분신은 전태일의 그것만큼 순수하고 숭고했기에 안타까웠으며, 그가 죽음으로 지켜내려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기 때문에 - 혹은 지켜낼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 안타까웠다. 그에게 정치적 지향은 신념이었을까 종교였을까.
근대와 중세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절대’이다. 중세에는 신의 존재가 절대적이었고 근대에는 인간의 이성이 절대적이었다. 각 시대에 넘을 수 없는 태산이었던 신이나, 헤겔의 절대정신은 다른 반박을 거부했고 완결된 세계관을 인간에게 제공했다. 인간은 그 절대성에 따라 순종적인 삶을 살면 되었고, - 근대의 시대정신을 생각하면 모순적이게도 -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은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암흑시대’라는 단어와 ‘세계대전’이라는 단어가 설명하기에 부연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는 ‘절대’라는 말 만큼 위험한 말이 없다는 것이다. 토론 불가능한 태산을 짋어진 사회는 그 태산을 넘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리고 그 태산은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일 뿐이다. 진리는 저 하늘에 떠있는 별이 아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진리이며, 그렇기에 시공을 초월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이고, 따라서 언제나 반박당하고 고쳐져야 하는 것이 진리이다. 누가 나에게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변하지 않은 진리를 달라. 우리가 가진 진리는 오직 하나 뿐이다.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절대정신이 존재한다면 머리아프게 선거 따위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변증법을 거쳐서 결론이 도출되면 그를 따르면 되니까. 그리고 그에 위반하는 것들을 모두 걷어내면 되니까.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선거를 하는가. 신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사람 혹은 신이 직접 사회를 운영하면 되는 것을.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그 진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우리가 소위 말하고 원하는 진리 시늉이라도 낼 수 있기에 선거를 하고 고민을 모으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을 담아서 말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 인류에게는 잘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확신 없는 주장들을 모아서 현 사회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근사치를 찾는 것이 민주주의의 위대한 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결국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리하여 두 가지의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근대적 가치의 확립이며, 다른 하나는 절대적 진리가 아닌 현재 맥락에서의 최선을 찾아내고자 하는 - 그리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 후기 근대적 가치의 확립이다. 이 두 가지의 과제를 한번에 이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한국은 뭐든지 압축적으로 이루어왔다. 민주화와 산업화, 노동운동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쇄락을 동시에 보일 수 있었던 사회는 흔치 않다. 그리고 이는 어렵더라도 이루어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돌파하지 못하고는 열린 사회와 열린 토론이 불가능하며 이는 곧 사회의 발전가능성을 사회 스스로 닫아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p.s 잡설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썼는데 댓글로 피드백을 달아주시면 좋겠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