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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최악 사학횡령, 명지재단 2500억원 횡령혐의!
게시물ID : bestofbest_509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빨강구두
추천 : 199
조회수 : 23827회
댓글수 : 0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1/05/30 20:38:01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5/30 18:11:02
일단 유머글이 아닌점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요즘 반값 등록금 때문에 말들 많으시죠?
관심도 한창 증폭된 시기인지라 이틈을 빌어 
저희학교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사태를 고발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이트를 통하여 저희학교 학생 뿐만아니라 
모든 학생여러분들의 도움을 얻고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초, 신문기사에 KBO 전 총재 유영구 이사장이 자진사퇴했다는 기사와 함께
명지재단 산하기관에서 약 2500억원을 횡령하여 구속기소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저희 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 확대운영위원회 에서는 
<재단비리규탄대책위원회(이하 '재대위')>를 결성하였고 5월 22일 신문기사에는
구체적인 횡령금액과, 횡령부분이 언급된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2500억원중 약 170억원 정도의 금액이 학생들의 등록금, 즉 교비에서 흘러나간 혐의,
더불어 340억원정도가 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의 부지매각의 방식으로 빠져나간 혐의를 받고있습니다.
저희 '재대위'에서는 1차 서명운동, 2차 피켓시위, 3차 수업거부 운동을 통하여
학교측의 비리타파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횡령에 관한 그 어떤내용도 학교측에게 해명조차 듣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지난 수요일까지 회계자료와 법인측의 입장을 설명하겠다던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우들이 응원을 보내고 있지만, 사실상 저희학교 학생들의 관심조차 부족한 상황입니다. 
채플수업거부 때 단상위에서 무릎을 꿇었던 학생대표들은 
출석이 인정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동참해주지 않던 수많은 학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어떻게 믿고 수업을 빠지느냐"라고 말하던 학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이 터져라 비리척결을 외치는 시위참가자들에게 눈길한번 보내지 않던 학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6월2일 목요일 오후5시. 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 60주년 채플관에서 <전체학생총회>를 개최합니다.
총학생수의 1/5이상의 인원이 참가하여야만 개의될수 있으며,
저희 캠퍼스의 경우 1400명 이상이 참가하여야 합니다.
1400명이라는 인원이 과연 본인의 권리를 찾기위해 두발벗고 나서줄지 미지수입니다.

여러분, 사상최악 2500억원이라는 사학횡령사건이 비단 명지대학교만의 일이겠습니까?
각종 재단산하에 있는 사립대학교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학교는 과연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을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저희 학교 학우들 뿐만아니라 지금, 다른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우리의 권리는 다른 누군가가 찾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권리는 본인 스스로가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권리를 찾고자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불평 불만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검찰조사가 진행중이며, 재판이 끝난것이 아니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저희 명지대학교 학우의 소중한 등록금이
단 1원이라도 빠져나갔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우리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와 병행하여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갖다바친 여러분의 땀입니다.
방학내내 공사장에서 노가다를 뛰며 갖다바친 여러분의 피입니다.
여러분을 편하게 공부시키시기 위해 힘드신줄 모르고 남들에게 고개숙여가며 벌어오신
부모님의 고된 노고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배를 불리려고 갖다바친 생돈이 아닙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 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ㅡ20세기 중반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로ㅡ

관련기사: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98216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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