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기초연금법이 통과되었다. 공적연금제도를 붕괴 시킬 최악의 법안이 얼토당토않은 과정을 거쳐 통과되었다.
기초연금법을 처리를 위한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는 2일 오후 5시에 열렸고, 15분 만에 처리되었다. 5시 17분, 복지위 전체회의가 열린다는 문자발송 뒤 3분 만인 5시 20분에 전체회의가 열렸다. 21명의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중 14명이 참석하여 새누리당 의원 11명 전원 찬성, 야당 의원 3명 반대로 의결되었다.
9시 40분, 본회의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가 속개되었고, 10시에 가결되었다. 법사위가 열리는 동 시간 본회의는 진행되고 있었으며 법사위 산회 시점에 상정된 76항의 안건 중 69번째 안건 표결이 이루어졌다.
10시 20분, 75항 안건 표결이 끝났는데 기초연금법 심사보고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의장이 국회의원들에게 잠시 자리에 앉아 대기하라고 한다. 76항 국회기 및 국회배지 등에 관한 규칙 일부 개정 규칙안 안건은 가장 뒤로 미뤄진다.
10시 28분, 기초연금법과 장애인연금법은 77, 78항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11시 11분, 반대토론을 마친 정의당 박원석 의원 등 야당 의원들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기초연금법은 가결되었다. 19대 전반기 마지막 국회 본회의는 밤 11시 22분 산회했다. 전 국민의 노후가 걸려 있는 법안이 통과되는 데는 채 7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 국민의 노후, 고작 7시간 논의
길게 잡아도 정부가 기초연금법을 제출한 것이 작년 11월 25일이니 반 년이 걸리지 않았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작년 2월 25일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약 1년 2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다른 나라의 연금개혁 논의는 십 년씩 걸린다는데 우리나라 행정부와 입법부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남다른 재주를 타고 난 것인가.
시작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에게 현재의 2배인 기초연금 20만 원을 지급한다는 약속을 상당수의 어르신들은 믿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신뢰했다. 급여액 인상은 기초노령연금법 제정 당시부터 진보정당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때문에 원조로 따지자면 우리 것인데 거대정당이 소수정당의 정책을 똑같이 주장했을 때에는 지킬 의지가 있으니까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력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바뀌었다.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모든' 어르신들에게 지급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 일단 급여부터 인상하고, 대상자 확대는 단계적으로 하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부의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기초연금법은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기초연금을 적게 지급받도록 설계된 법이다. 성실한 국민연금 납부자들이 손해 보게 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기초연금법안 처리 놓고 심각한 최경환-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이 국민연금과 연계된 정부·여당의 기초연금법안 처리를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민연금 수령액과 무관한 가입기간만 반영하도록 했기 때문에, '고소득 단기가입자'는 더 많은 기초연금액을, '저소득 장기가입자'는 더 적은 기초연금액을 받게 된다. 저소득자가 고소득자보다 불리하고, 노인층보다 청년층이 더 불리한 안이다. 사회보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또한, 기존 기초노령연금은 매년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 상승률을 반영하도록 되어 있어 해마다 연금액이 자동적으로 인상된다. 하지만 기초연금법은 평균소득상승률이 아니라 사실상 물가변동률을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물가 인상률이 평균소득 상승률보다 낮은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실질 기초연금액은 낮아질 것이다. 보편적 기초연금의 핵심은 기본적 소득보장인데, 연금액의 실질 가치가 하락하면 노후소득보장제도로서의 기능은 유명무실해진다.
공적연금제도는 현재 노인 세대에만 해당되는 제도가 아니다. 미래에 노인이 될 현재의 청년 세대와 미래에 청년이 될 다음 세대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그 영향을 엄밀히 분석하고, 신중하게 논의하여,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개선해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도 공적연금제도를 이런 식으로 논의하는 경우는 없다. '중요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제도를 이처럼 졸속적으로 심의하게 된 상황은 도대체 왜 발생한 것일까.
그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정부의 공약 불이행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지난주 갑자기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아침을 먹으며 정부의 기초연금법에 몇 가지 개선사항을 덧붙여 합의해 버렸다.
그 자체도 어안이 벙벙한 일인데 당론 결정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것이 제1야당의 모습인가 싶을 정도였다. 당내에서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자 소속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전수조사한다며 설문지를 돌렸다. 그래도 반발이 사그라들지 않자 핸드폰 문자 조사를 실시하질 않나, '여론조사당'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하더니 그나마 여론조사 문항도, 조사결과도 명확히 공개하지 않았다. 모든 게 처리를 위한 요식행위였던가.
이해할 수 없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행태
오늘(2일)만 넘기면 연휴고, 연휴가 지나면 새정치민주연합 원내 지도부 선거가 있기 때문에 지도부가 바뀌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전반기 국회가 끝났으니 지방선거 이후까지 시간을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도부에 위임'하기로 결론냈다. 오랜 싸움의 끝은 여기까지였다. 제1야당의 비공개 의총 결과가 전 국민의 노후를 파탄으로 몰고 가게 된 것이다.
지도부 중 한사람이었던 안철수 의원은 복지위 상임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국민연금이 성숙되지 않았는데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하면 국민연금의 근간이 흔들린다"면서 "정부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고 하였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법안 처리에 합의해 줬지만, 반대한다? 반대라 함은 처리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 아닌가?
▲ 정의당, 연금제도 파탄내는 야합반대 정의당 박원석, 김제남, 정진후 의원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정부·여당의 국민연금 연계한 기초연금법안에 반대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료 의원의 통탄의 눈물을 무시하고, 자당 의원이 의원직 사퇴를 언급할 만큼 격렬한 반대를 했음에도 일사천리 통과되도록 협력해 놓고 이제 와서 반대한다고 하다니, 저런 반대가 존재한다는 게 기이하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정부는 그럴 줄 알았다. 그들의 거짓말과 배신은 새롭지 않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이 야합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론을 뒤집을 줄은 몰랐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에 '트로이의 목마'가 있었던가.
복지위에서 오래 일했던 새정치민주연합 보좌진 중 한 사람은 "여당이 아니라 우리 당 지도부와 싸우고 있어요, 어째서 이런 일이…"라고 참담함을 토로했다. "밤새고, 몸싸움 하다 본회의에서 직권상정 했을 때보다 지금 기분이 더 더럽다"라고 한다.
또다른 보좌진은 "전 국민이 매일같이 슬픔과 분노와 자책으로 보내는 이 시기에 새정치민주연합이 박근혜 정부의 엉터리 기초연금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밖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들을 울리고, 어떤 복지국가를 말하고자 하는가. 나는 줄곧 '그래도 정치가 희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정치에 대해 불신을 가중하는 글은 자제하고자 노력해 왔다. 오늘 나는 자제심도 평정심도 잃었다.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7740&PAGE_CD=ET000&BLCK_NO=1&CMPT_CD=T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