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로 봤습니다. 휴가 나오면서 본 거라 아이맥스 찾고 그럴 여유는 없었어요.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적어 보겠습니다.
1. 하퍼의 자폭
하퍼가 줄리아 혼자만 보낸다면 줄리아가 외로워할 것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야 복선이 떠올랐습니다. 그 복선이란 하퍼와 줄리아가 나눈 대화 그리고 끈을 풀고 도망간 52번 하퍼의 존재였습니다.
줄리아는 하퍼에게 "네 기억이 바로 너다"라는 식의 말을 합니다. 하퍼가 '기억'을 찾게 되자 그제야 진짜 '너'답다는 말을 하죠. 겉 모습이 하퍼라고 '진짜 하퍼'인 것이 아니라, '하퍼의 기억'을 가진 하퍼가 '진짜 하퍼'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줄리아에게 '진짜 하퍼'인지 알게 됐지만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진짜 하퍼'인 49번 하퍼 자신이 테트로 가서 자폭을 하면, 줄리아에게 '진짜 하퍼'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는 52번 하퍼가 줄리아를 보게 됨으로 인해 해결됩니다.
49번 하퍼가 그랬던 것처럼 52번 하퍼 역시 줄리아를 보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49번 하퍼는 52번 하퍼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냥 묶어둘 뿐이었죠. 타워에 갔다온 49번 하퍼는 52번 하퍼가 도망친 걸 알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영화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52번 하퍼 역시 기억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래야 줄리아의 남편으로서 가진 기억을 떠올린 '진짜 하퍼'가 되어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49번 자신은 죽지만 잭 하퍼의 기억이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줄리아를 지켜줄 '진짜 하퍼'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숭고한 희생을 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줄리아 혼자 두고 간 것이었습니다.
2. 하퍼와 줄리아의 미래
하퍼가 줄리아에게 청혼하던 장면 기억하시나요? 그 장면은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하퍼와 줄리아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라감 -> 하퍼가 반지를 보여줌.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순서였죠. 그런데 제가 본 이 장면은 <오블리비언> 클라이막스에 대한 은유였습니다. 저 장면과 클라이막스 부분을 비교해보겠습니다.
하퍼와 줄리아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라감 -> 줄리아에게 반지를 보여줌.
하퍼와 말콤이 테트로 향함 -> 폭탄을 터뜨림.
감이 오시나요? 하퍼가 청혼한 과정은 하퍼가 자폭하러 떠난 여정과 같은 구조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는 '높은 곳'은 곧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테트를 암시합니다. 말콤이 누구를 대신해 테트에 갔는 지는 말 안해도 아시죠?
마찬가지로 반지는 터뜨린 폭탄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퍼가 줄리아에게 준 반지는 하퍼가 인류를 위해 터뜨린 폭탄인 셈이죠.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하퍼가 반지를 주며 했던 말을 떠올려봅시다. 하퍼는 "너에게 미래를 보여줄게"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퍼가 테트에게 했던 "줄리아의 안전과 인간 종족의 보존을 원한다(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 데 이런 뉘앙스였던 것 같습니다)"라는 말도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이제 이해가 되실 겁니다.
즉 반지는 하퍼가 줄리아에게 약속한 미래이고, 폭탄을 터뜨리는 것은 하퍼가 인류에게 선물한 미래입니다. 반지가 폭탄과 같은 의미라는 것은 '하퍼가 누군가를 위해 선물하는 미래'라는 동일한 가치를 담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 생각나는 것만 써봤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