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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자가 쓴 29일 촛불집회
게시물ID : sisa_510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검은날개
추천 : 11
조회수 : 59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8/05/31 00:49:09
<< 중앙일보가 기록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 




29일 오후 4시 정부가 미국산 수입 쇠고기 위생조건을 고시했다. 

이 사실을 발표하러 온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짤막한 발표문만 낭독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 후 농수산식품부 공무원의 지리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답답했다.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며, 

‘복어 독’과 관련한 기사를 막 온라인으로 출고하던 참이었다. 

마치 복어 독을 삼킨 것처럼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저녁에는 선배들과의 회식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석해 흥을 낼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흥을 깰 자신도 없었다. 

그냥 카메라를 둘러메고 무작정 광화문을 향했다. 

이때가 오후 7시경이었다. 




택시를 탔다. 

서울시청역 앞 광장은 아직 비어있었다. 

대신 이른바 ‘닭장차’와 전경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탓에 프레스센터 앞에서 택시는 꼼짝 못하게 돼 버렸다. 

내려서 무작정 걷기로 했다. 








파이낸스센터 빌딩에서 청계천 광장으로 도는 거리 초입에서, 

하필이면 ‘언론연대’가 세운 입간판을 보고야 말았다. 

‘조중동 구독 거부 명단’이었다. 

조선·중앙·동아 일보 구독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의 명함이 달려 있었다. 

그 명함에는 거부 사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앞에 잠시 서서 생각에 잠겼다. 

거부 명단에 올릴 명함을 달라고 조르는 이에게, 

중앙일보 로고가 선명한 명함을 내밀고 취재를 해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말다툼으로 번질 게 빤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용기 없음을 자책하면서. 








7시 45분경. 

서울 시청역으로 서서히 인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요 대학의 대학생과 공공 부문 노조들, 
그리고 퇴근 길의 3,40대 직장인들이었다. 

촛불 집회의 오랜 주역인 10대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광화문빌딩 앞에서 오래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3백여명은 

시청 쪽보다 인적 구성이 더 다채로워 보였다. 

교복 차림의 여학생 10여명은 ‘우리가 무섭지 않은가’라는 
사제 구호판을 들고 있었다. 

유모차를 앞세운 주부들도 몇몇 눈에 띄었고, 
가족 단위 참가자도 적지 않았다. 

예비군복 차림의 참석자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가끔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고시 철회’라든가 ‘협상 무효’ 구호가 더 자주 등장했다. 

막간에는 젊은 참석자들이 나서서 제각기 집회에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격려의 박수와 소탈한 웃음이 빈번하게 터져 나왔다. 

전형적인 거리 시위라기보다는 월드컵 거리 응원에 가까웠다. 








8시30분경 시청 앞 광장은 촛불 바다와 같은 장관으로 변했다. 

냉철한 기록자가 되기에는 
서울시청 맞은 편 플라자호텔 고층이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난 이도저도 아니었다. 

참여자도, 기록자도 아닌 채 광화문 일대를 부지런히 쏘다닐 뿐이었다. 

촛불의 물결을 쫓아서. 

시청 앞을 떠난 시위대는 을지로와 종로 3가를 돌아, 광화문으로 향했다. 

시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즐거웠다. 

그리고 또 평화로웠다. 

일부 참가자가 차량이나 지하철 지붕 위로 올라가 
구호를 외치려고 하기도 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이내 잦아들었다. 

시위대 일부는 오히려 전경들을 밀치는 다른 참가자들을 적극 제지했다. 

전경들에게 물병을 건네는 참석자들도 적지 않았다. 

10시 30분 이후 집회 참석자들의 진로가 안국동 쪽을 향하자 

경찰들의 연행이 시작됐다. 

그러나 듣던 대로 특별한 저항은 없었다. 

집회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한 것은 정작 시위대를 둘러싼 전경들이었다. 

청와대행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용으로 활용한 닭장차만이 

묘한 적막감에 휩싸여 덩그라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촛불 집회에는 배후 세력은 물론 지도부도, 
심지어도 주최측마저 없어 보였다. 

물론 행사를 진행하는 이들이 있었고, 

참여자들에게 간단한 음료수를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 정당과 시민사회 단체 등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청과 청계광장 곳곳에 
각 단체의 팻말을 내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건 전시회에 얼굴을 내민 기업의 부스로 비칠 뿐이었다. 

관람객인 대중들이 전시회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대중들이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촛불 집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던 것이다. 

그건 희한한 광경이었다. 

8,90년대의 거리 시위를 예상했던 내가 오히려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이 일을 두고 좌파 세력이 배후라거나, 

10대와 20대의 철부지 짓이라고 매도한다면 
그건 결코 온전한 진실이 아닐 것이다. 

그 반대로 촛불 집회야말로 
한층 성숙해진 우리 민주주의의 징표가 아닐 수 없었다. 




허기를 채울 요량으로 인근 식당에서 꽤 늦은 저녁을 시켜 먹었다. 

그런데 허기가 가시는 게 아니라 속이 더 쓰렸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 대해, 
내가 몸담고 있는 중앙일보가 최근 기록한 것과 

민심은 다시는 맞닿을 일이 없을 것처럼 
멀어지고 말았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다. 

물론 언론은 단순한 민심의 기록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민심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훈계할 특권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진실은 과연 어느 쪽에 더 근접해 있을까? 




우리 나라를 뒤엎은 정치적 당파주의와 사회적 냉소주의가 

가장 가까워야 할 언론과 대중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다. 

비록 나 자신은 직접 간여하지 못했지만, 

지난 한 달여간 조중동의 보도가 
다분히 당파적이고 냉소적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대중 역시 그에 당파적이고 냉소적으로 대응했지만. 








쓰린 속을 달래려고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워서, 

기어코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야 말았다. 

격변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서 있는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그 빌딩 벽에 걸린 문구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랑이여, 건배하자. 
추락하는 모든 것과 꽃 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 

이여영기자의 말과 맛 그리고 멋
http://blog.joins.com/yiyoyong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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