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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리화가" 감평(스포조심!)
게시물ID : movie_512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모리감성
추천 : 2
조회수 : 105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2/16 14:48:08
 

서편제를 정말 감명깊게 본 사람이라 처음에 도리화가라는 판소리영화가 만들어진다 해서 설렘과 기대로 기다리다 이제 봤습니다. 
전체적으로 상업성으로는 흥행은 안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일단 개인적인 영화적 평으로는 

영화전체가 노래가 됐다. 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전체적인 평들을 보면 내용이 진부하다 뻔한 사랑이야기이다. 기승전사랑이다 라고 많이 말들을 하십니다. 
저는 그 평들이 맞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영화의 기본줄기는 실제인물인 신재효와 진채선의 중심으로 영화는 흘러갑니다.  

진채선의 어릴적 아픈과거 그리고 신재효와 진채선의 닿을 수 없는 애뜻한 사랑 

그리고 살이 되는 부분은 바로 춘향전과 심청이의 노랫말로 덮어진다고 생각됩니다. 춘향전과 심청이의 내용(노래)자체가 애뜻한 사랑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다솟 진부하고 뻔한스토리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감독에게서 이부분은 개인적으로 참 아름답게 만들고 잘 만든 거라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도리화가의 노랫말의 본질을 무덤덤하면서 애절하게 잘 표현한듯)

아래에는 도리화가의 유래입니다. 

〈도리화가()〉는 조선 후기에 신재효(, 1812-1884)가 창작한 판소리 단가로서, 작품명은 가사 첫머리의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불고 흼도 흴샤 외얏꽃이"에서 '도리화'를 취해 붙인 것이다. 여기서 도리화는 진채선()이며, '스물네 번 바람 불어'라는 표현은 당시 그녀의 나이가 24세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도리화가〉는 경복궁 낙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제자 진채선에 대한 신재효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단가이다.

"경오 칠월 칠셕 우하 농호 증 션낭(      )"이라는 말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신재효가 59세 되던 해인 1870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낙성식은 1867년에 있었으므로 진채선은 21세에 고창을 떠나 신재효가 〈도리화가〉를 짓는 1870년까지 3년간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재효와 진채선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나, 이 작품에 나타나는 주된 정조는 급작스레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한 남성의 절절한 사랑과 슬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리화가 [桃李花歌] (한국전통연희사전, 2014. 12. 15., 민속원)

이 유래를 잘읽고 다시한번 영화를 보신다면 영화 전체가 노래다 라는 표현을 조금은 이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전에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던 흐름을 끊는 컷이라던지 주변인물에 대한 관계나 존재성을 확실하게는 각인시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중간에 신채효가 잡혀서 진채선이 흥선대원군에게 풀어달라 요청하기위해 도와준 기생에 대한 관계라든지 그저 관객이 어림짐작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았다는게 아쉽습니다. 

그리고 수지의 연기력
개인적으로는 전보다는 확실히 연기력이 늘었다라고 생각되지만 도리화가의 진채선를 연기하기엔 내공이 많이 부족했다라고 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잡아주는 것이 판소리인데 너무 전문적이지 않다라는 느낌이죠. 

아래에는 진채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무녀의 딸로 태어났다. 타고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 했다. 진채선의 소리 재능을 보고 17살에 신재효()에 발탁되었으며 그가 운영하는 소리학교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운 뒤 최초의 여류 명창이 되었다. 진채선의 소리는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의 관념을 뒤집는 것으로 여성의 목소리로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하여 청중을 놀라게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진채선은 고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운현궁에 머물며 흥선대원군의 첩실이 되었다. 이때문에 신재효는 <도리화가>를 지어 제자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진채선은 스승 신재효가 중병이 들자 운현궁을 빠져나와 고창으로 돌아왔으며 스승의 임종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이후 진채선은 사라지고 그녀의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진채선은《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고, 특히 《춘향가》 중 <기생점고> 대목에 뛰어났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채선 [陳彩仙] (두산백과)

진채선이라는 인물은 판소리에 관해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여성최초 명창이 되었습니다. 이정도의 수식어를 붙기 위해선 현재 계시는 명창분들정도의 실력이 안되더라도 최소한의 내공이 되는 아마추어정도는 되어야 되지 않았을까하는 (조금은 욕심이지만) 생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판소리와 일반 음악의 발성자체가 다르고 판소리를 하게 되면 쇳긁는소리?가 되어져서 일반 가수로써 힘들수도 있었겠고 1년연습한다고 해서 금방 느는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혹시나 감독이 수지라는 이름의 타이틀을 원한 것이 아니였다면 판소리를 했던 배우를 섭외 했으면 조금 더 집중도가 높아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서편제 같은 경우는 주인공인 오정혜씨는 실제 판소리를 하셨죠. 그래서 영화가 전체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수지도 열심히 노력했을텐데 다만 조금 욕심을 부린듯한? .. 수지야!!!!! 그래도 난 네가 좋다 한복입고 나올때 완전 이쁘더라.!!!ㅠㅠ )

여튼 개인적으로 도리화가는 내용보다는 배경BGM을 한번 들어보시라고 권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좋아요 



출처 도리화가의 유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25823&cid=56785&categoryId=56785

진채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990&cid=40942&categoryId=34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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