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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판펌] 제발 누구라도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게시물ID : humorbest_5134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품절女
추천 : 192
조회수 : 22707회
댓글수 : 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8/16 11:31:01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8/16 10:19:10

출처 : 네이트판 http://pann.nate.com/talk/316547331

 

안녕하세요. 저는 28살 주부입니다.

남편과의 다툼끝에 남편이 저보고 제정신이 아니라면서 인터넷에 글을올려보라고

넌 돌팔매질 맞을거라고 하며, 제 잘못을 일깨워 주겠다고 하더군요.

 

남편과는 9살 차이가 나고, 제가 20살때 알바를 하던 곳의 사장님이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조그만 호프집을 열었었고 전 그곳에 알바생으로 들어간게 인연이 되어 3년 연애 후,

결혼을 하였습니다. 당시 전 전문대를 막 졸업한 터였고, 결혼하기엔 어린나이었지만,

남편과의 나이차가 많았기 때문에 시댁쪽에서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저희집에서는 처음에 나이차이때문에 반대가 심했지만 남편의 생활력과 듬직한 모습에

결국 허락을 하셨습니다.

 

결혼준비를 할즈음, 남편은 가게를 아는 지인에게 넘겼고 고향(경상도)에 가서 자리를 잡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쭉 서울에서만 자라왔기 때문에 연고도 없고 지인도 없는

낯선 타향살이가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 하나 믿고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 살기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희 부모님께서는 내려가는건 내려가더라도 죽어도 시댁살이만큼은 시킬 수 없다 하셨고, 남편과 시댁쪽에선 무조건 시댁으로 들어오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저희 아버지께서 신혼집을 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집문제는 해결되는가 싶었더니, 식이 다가오자 시어머니께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라며 살다가 분가를 하는한이 있더라도 처음부터 나가사는건 허락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꾸셨습니다.

남편역시, 어머니 뜻이 너무 완고하니 처음 1년만 들어가 살다가 나오자고 하였고,

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더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가 않아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구해주신 집은 급하게 전세로 내놓고 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공을 살려 취직을 하고 싶었으나, 시댁에서는 여자는 살림을 할 줄 알아야

일도 할 수 있는거라며, 살림을 먼저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시집가서 그런 시집살이를 하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 시집와서 정말 잘하려고 노력했고, 어떻게든 시모에게 이쁨받으려고 하라는거 다 했습니다.

정말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부분은 남편도 인정합니다.

 

남편은 1남 3녀로, 시집을 간 첫째시누가 있고, 남편 아래로 둘째시누와 막내시누가 있습니다.

시댁에는 시부모님과 저희부부, 둘째시누와 막내시누 이렇게 6명이 살았습니다.

시집가자마자 시작된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막내시누의 괴롭힘 속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게 살림을 가르치신다는 명목으로 온갖 잔소리에 인격모독등도 서슴치 않으셨지만

저는 제가 잘 하면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지으라고 하시고는 국이 간이 맞지 않는다며

제가 보는 앞에서 국통을 설거지통에 부으셔도, 전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하며

울면서 다시 밥을 지었습니다.

저보다 세살이 많은 막내시누는 제가 빨래를 잘못해서 비싼 블라우스를 망쳤다며

수건질 하고 있는 저의 얼굴로 블라우스를 집어던지기도 했습니다.

시집와서 전 무조건 네네, 죄송합니다 란 말 밖에 할 수 없었고,

화가나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친정부모님들을 들먹이며

친정에서 그렇게 배워왔냐며 저희 부모님 험담까지 늘어놓으셨습니다.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전 너무 외로웠습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인 남편또한 회사생활을 하면서 잦은 회식때문에 늘 술에 취해 새벽녘에나

들어왔고 전 매일밤을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너무 보고싶어서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명절에도 친정에 갈 수 없었습니다. 시댁이 큰집이라 명절때는 모든 친척들이 저희집으로 왔었고

정말 허리도 피지 못하고 일을했습니다. 숨좀 돌릴라 치면 설거지해라, 과일내와라, 장봐와라....

친정에는 언제갈 수 있냐는 말을 했더니 시모 왈, '너는 이제 박씨집안 사람인데 가길어딜가냐.

친정이 코앞도 아니고 서울까지 언제갔다오냐. 이젠 여기가 너의 본가다'

남편에게 정말 친정에는 가지 않는거냐고 물었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손님들이 이렇게 많은데 꼭 그런얘기를 해야겠냐며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며 자리를 피하더군요.

 

3개월째 생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임신테스터기를 여러번 해봤지만 음성반응이 나와

병원에 갔더니 스트레스로 생리가 끊겼다 하여 호르몬 주사를 맞고왔습니다.

그뒤로 저는 생리불순이 되었습니다.

생리를 한달에 두번하기도 하고, 세달에 한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복통으로 쓰러진 저는 하혈을 하며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의사는 유산이라고 합니다. 미련하고 또 미련했던 저는... 임신한 것 조차도 모르고

생리불순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허무하게 첫아기를 떠나 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모는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여자가 얼마나 미련해 터졌으면 임신한것조차 모르냐' 며 저에게 면박을 하였습니다.

방에서 한참을 울고있는데 남편이 들어와 저를 안아주면서 미안하다며 같이 울더군요.

바보같이 저는 그모습을보면서 그래도 내가 의지할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둘째시누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둘째시누를 유독 아끼던 시모는 둘째시누가 시집을 가자

저에게 둘째시누네 집 파출부노릇까지 시키려고 하였지만 남편이 중재하여 이는 면했습니다.

그도 오래 못가 둘째시누가 임신을 하자 시모는 매일 사골이나 몸에좋다는 음식들을 만들라고 하고는

저에게 배달까지 시켰습니다.

 

저는 이집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누구하나 저를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사람 없었고,

전 그저 이집의 종년이었습니다.

남편또한 저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늘 한발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시모에게 심하게 혼나서 울어도 남편은 그저 '우리 엄마가 원래 그래 알잖아' 이말만 하였습니다.

나중엔 이말이 너무 듣기싫어 남편과 다툼이라도 있는 날에는 시모가 들어와

어디 감히 남편한테 대드냐며 이래서 서울년들은 근본도 없는 년들이라며

애초에 제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 막말을 하였습니다.

어린년이 약아빠져서 돈보고 시집왔다면서 (시댁보다 저희 친정이 훨씬 더 잘삽니다)

저를 짐승마냥 모욕했습니다.

 

신랑은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말이 심해진다 싶으면 "엄마 그만해" 하면서 말리는 시늉을 하는데,

전 시모보다, 시누보다, 그누구보다 남편이 가장 미웠습니다.

남편을 왜 내편이 아니라 남편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연애때만해도 남편의 사투리가 듣기 좋았는데 시집을 온 후로는 노이로제가 걸릴정도로...

저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나도 듣기 싫었습니다.

가뜩이나 저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난 시모와 시누들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까지 더해서

시비를 걸면 심장이 쿵쾅쿵쾅 거려 진정이 되지가 않았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니 뭐하노!' 라고 한마디만 해도 너무 놀라 깎던 사과를 떨어뜨리기까지 할 정도로,

무슨 말을 해도 무섭게 느껴지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친정부모님께는 제가 이렇게 사는걸 말 할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시집보낸 막내딸이 이런취급당하는걸 알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실까 싶어서

친정부모님과 통화할때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모두들 잘해준다고 행복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친정식구들이나 친구들과 통화한 날에는 너무 서럽고 외로워서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소리죽여 한참을 울곤했습니다.

전세계약이 끝나면 분가할 생각으로, 그 희망 하나로 다 참고 버텼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분가해서 시댁식구들과 따로 살 생각에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두번째 임신을 하였습니다.

첫째아기를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낸 터라 저는 임신사실이 너무나도 기뻤고

남편또한 너무 기뻐했습니다. 제가 너무 자랑스럽다며 저를 업고는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시모에게 주책맞다며 등짝을 맞았지만요. 첫째를 무리한 집안일로 유산한 터라 임신한 뒤로는

제 몫의 집안일이 아주 조금 줄었습니다. 막내시누의 속옷빨래나 시누의 방청소 정도....

여전히 집안일은 제 몫이었고, 저는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래도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며 행복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제가 이집 며느리로 인정을 받은줄 알았습니다.

 

임신 7개월째였습니다. 배가 뭉치고 아기의 움직임이 줄어든 것 같아 남편에게 다음날

회사 점심시간에 나와 같이 검진을 받으러 가자고 하였더니,

귀찮다며 그정도는 혼자갔다오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정 싫으면 토요일까지 기다렸다가 같이가자는 말에, 다음날 그냥 혼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새벽에 둘째시누가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는 연락을 받고는 시모가 부랴부랴

병원 갈 채비를 하였습니다. 저더러 운전을 하라기에, 남편을 깨우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아침에 일나가야 하는데 푹자게 내버려 두라며 저더러 운전을 하라고 했습니다.

 

임신한 뒤로는 몸조심 하느라 운전을 하지 않았기에 저는 남편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시모가 저더러 자기를 우습게 알고 자기말을 무시한다면서 노발대발 하였습니다.

시모가 다다다다 소리를 지르는데 심장이 또다시 쿵쾅거리면서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찢어질듯한 통증에 배를 잡으며 쓰러졌습니다.

시모는 저더러 '저게 이젠 쇼를한다' 며 비아냥 댔습니다.

제가 식은땀을 흘리며 헐떡대자 그제야 이상한 걸 알고 남편이 저를 태워 병원에갔습니다.

 

아기가 사산되었습니다. 의사는 뱃속의 아기가 이미 죽어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자리에서 악을쓰며 울다 실신하고 임신7개월째라 아기가 커서

유도분만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죽은내새끼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또다시 가슴에 묻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실에 입원해 있는데 남편을 제외한 시댁식구 그 누구도 한번 와보지 않았습니다.

시댁식구들 모두 출산한 시누에게만 갔습니다. 저는 더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멍하게 앉아있다가 졸리면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고 살아도 사는게 아니었고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울면서 정신차리라고 애원하는걸 보고도 그저 멍할 뿐이었습니다.

 

남편이 친정에 전화를 했는지 친정부모님들이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근 2년만에 보는 저의 모습을 보고는

저희 엄마는 목놓아 우셨습니다. 시집갈때보다 저는 8키로 가량 빠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아빠가 저에게 첫마디 "우리딸 왜이렇게 말랐니" 이말에 마른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나왔습니다.

아빠가 아무말 없던 남편의 뺨을 한대 때렸습니다.

왜때렸는지 모르겠고, 남편도 왜맞았는지 모르겠지만 남편 스스로는 왜맞았는지 아는 듯 했습니다

 

바로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퇴원하고 시댁으로 돌아왔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시모가 들어오더니

이틀뒤에 출산한 시누가 산후조리를 하러 집에 온다고 합니다.

죽은아기를 낳고 돌아온 저더러 시누의 산후조리를 하라고 합니다.

남편도 이때만큼은 못참고 시모에게 제정신이냐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모는 "느그들 심정 잘 안다. 나또한 우리집 장손을 잃었기때문에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죽은아이는 죽은거고 아이는 또 갖으면 된다" 고 했습니다.

남편이 시모등을 떠밀며 방에서 나가고 거실에서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더이상 화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저 졸려서 잠을 잤습니다.

전 더이상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동이트면 일어나서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점심차리고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고 장보고

심부름하고 저녁짓고 설거지하고 빨래널고 잠을 잤습니다.

모든게 다 무의미 했고, 더이상 시모의 잔소리도 상처받지 않고 모르쇠반응으로 나갈 경지가 되었습니다.

남편도 처음에는 저더러 정신차리라고 화도내보고 달래도보고 했지만

이내 자긴 할만큼 했다며 더이상 저에게 관심을 갖지 않더군요.

아무렴 상관 없었습니다. 애초에 전 남편에게 이런존재였으니까요.

기계처럼 일하고 아무 감정없이 그냥 기계처럼 살았습니다.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았습니다. 아빠가 신혼집으로 사주신 제집의 전세 계약 만료가 다가왔습니다.

아기낳은 둘째시누네 집이 좁다며 저더러 그 집을 시누에게 싼 값에 월세주라고 하더군요.

저희가 분가하기로 한건데요. 했더니

시누네 큰집 구해서 나갈 형편 될때까지만 선심쓰랍니다.

남편에게 시모가 이런말을 했다고 하니 대답이 없더군요.

어쩌고 싶냐고 물으니 자긴 아무래도 상관없답니다.

내가 그토록 분가만을 바라며 참고 살아온걸 알면서 상관없다고 합니다.

내심 남편이 시모에게 안된다는 말 한마디 해주길 원했지만 기대도 안했습니다.

남편이 야속했지만 그냥 전 모든걸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남편이 아기를 다시 갖자고 했지만

전 피임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년간은 정말 물흘러가듯이..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고 여전히 종년처럼 살았습니다.

 

중간에 제가 분가할테니 시누보고 집 나오라고 한번 말했다가

시모한테 머리채 잡힌적도 한번 있었습니다.

저는 이집에서는 그냥 거실에 걸려있는 유화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시부가 비싸게 사온거라며 아끼던 그림이었는데

먼지가 쌓였다며 제대로 닦지 않는다고 혼났으니까요.

 

 

오늘 일입니다.

광복절이라며 공휴일이라고 남편이 일을 나가지 않았는데 집에만 있는 저로서는

공휴일도 평일도 주말도 다를게 없기에 늘 그렇든 시모의 면박을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순차적으로 집안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달라졌다며 저더러 서운하답니다. 잠자리에서도 무시받는 기분이 든다고 하며

너는 지금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기가차서 한마디 했습니다.

 

'내나이 23살에 연고도 없는 이곳에 너하나 믿고 와서 지금까지 이집에서 종년노릇을 했고 내새끼를 두번 잃고 집까지 니 동생에게 내줬다. 이집에 사는 인간들 모두 내가 해준 밥을 먹고 내가 빨아준 옷을 입고 내가 청소한 방에서 잠을 잔다. 난 이집에 시집온 후로 늘 죄인마냥 죄송하단 말을 달고살아왔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죄송하단 말을 안하면 일이 더 커지기때문에 그래왔다. 이젠 누가 나를 부르기만 해도 자동으로 죄송하단 말이 나온다. 여기까지 니가 할 말 있냐'

고 물었더니 아무말 못하고 저를 노려보기만 합니다.

 

'그리고 넌 매일 아침 내가 다려준 셔츠를 입고 나가고 나 없인 양말한쪽 못찾아신는다. 그리고 나랑 섹스도 하지 않냐. 내가 대체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이집에서 못한 의무가 어디있냐. 어디 들어나보자'

고 했더니 '니가 이집와서 고생한거 다 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내가 호강시켜줄건데 지금까지 잘하다가

왜 그러냐. 가뜩이나 일에 치이고 피곤해서 들어오는데 너때매 눈치보느라 더 피곤하다. 넌 요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고 하더군요.

가소롭고 기가찼습니다. 그때 깨닳았습니다. 내가 이집에서 유일하게 믿고있던 남편이란 놈이

이런놈이었구나.. 내가 이런놈을 믿고 살아왔구나 싶은게 그제야 집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더군요.

 

참았던게 폭발하면서 '난 지난 6년간 투명인간이었다고!!!!' 하고 소리를 꽥 지르니

시모가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옵니다.

저더러 이게 미쳤냐며 어디서 감히 남편한테 소리를 지르냐면서 제 어깨를 밀치더군요.

시모더러 '개같은년' 이라고 했습니다.

둘다 놀라서 아무말도 못하다가 시모가 다시한번 말해보라길래 시모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개.같.은.년 이라고 한글자씩 또박또박 말하자 말끝나기가 무섭게

신랑이 제 뺨을 연속으로 두대를 때렸습니다.

'저년이 이제야 본색을 들어낸다' 며 뒷목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시모를 뒤로하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서 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무작정 달리고달리고 집에서 최대한 멀리 달려왔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6년간 살아온 곳인데 매일 집에 갇혀서

집안일만 하다보니 부산에 아는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핸드폰 전화기록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으며 내려와도 부산에서 연락할만한 지인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때가 오후 3시쯤이었습니다. 무작정 걷고걷고 버스타고 여기저기

그냥 최대한 시댁과 먼곳으로 목적지도 없이 갔습니다.

핸드폰은 전화로 불통이 나서 아예 꺼버렸습니다.

 

탈옥수의 심정이었습니다. 나오기전엔 몰랐는데 뛰쳐 나오고나니 그곳은 감옥이고 지옥이었습니다.

최대한 시댁과 먼 곳으로 가고 싶어서 버스를 서너번 갈아타면서 그냥 무작정 가고 있었습니다.

속이 울렁거려서 중간에 내려서 한시간 정도는 걸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어딜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근처 피씨방에 들어가서

무작정 서울가는 ktx표를 끊었습니다. 카드로 결제를 했더니 남편에게 표를 산 결제 문자가 갔나봅니다.

ktx를 타러 역에갔다가 미리와있던 남편에게 붙잡혔습니다.

남편이 저를 끌고 올라가서 강제로 차에 태웠습니다.

 

붙잡힌 탈옥수의 심정으로 절대로 집에 안가겠다며 발버둥을 치고 울고불고 발악을 했더니

남편이 근처 모텔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집에가서 시모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합니다. 저는 이혼해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말도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자기가 잘 얘기할테니 너는 사과만 하면 된다고

자기가 뒷일은 알아서 하겠다고.. 선심쓰듯이 말합니다.

저는 제발 저를 놔달라고 이혼해달라고 빌다싶이 하자

남편이 저더러 잘못을 해놓고도 반성을 할 생각은 안하고 이혼타령이나 한다면서

이혼이 어린애 장난이냐고 합니다.

'아 너 아직 어려서 이러나?' 라는 조롱섞인 말도 했습니다.

남편과의 실랑이 끝에 남편이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라고

그 누구도 너보고 잘했다는 사람 없을거라고 하길래 기가차서 그래 한번 물어보자 하고

이 글을 썼습니다.

다들 남편말처럼 제가 돌팔매질 맞을만큼 잘못한 일이라면 시모에게 사과를 하겠습니다.

지금 남편은 집에 돌아갔습니다.

너무 긴 글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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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28살의 여자로써....너무너무 슬프고 가슴아파요..왜 저런 그지같은 새끼한테 잡혀서

그 아까운 예쁜 청춘을 다 허비했는지..지금이라도 헤어지고 새삶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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