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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눈 내리던 날
게시물ID : readers_51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leaf
추천 : 1
조회수 : 17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23:28:05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머리엔 이미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사실 누가 무엇을 하건 신경 쓸일 없는 삭막한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그녀는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그저 회사 근처 식당에서 동료와 식사를 마치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봤을 뿐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눈이 오려나 보네.”

옆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한숨 섞인 말에 ‘그렇네.’ 라고 짧게 답하며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에 시선을 두었다. 분명 출근할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있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점심을 먹기 위해 회사 정문을 나섰을 때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지 아마. 그녀 머리에 쌓인 눈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무엇을 기다리며 저렇게 서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뭐야, 뭔데 그렇게 눈을 떼질 못해?”

동료의 질문에 난 조용히 손가락으로 그녀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별 건 아닌데 저기 서 있는 저 사람 보고 있었어.”

내 손가락을 따라 동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이어지는 질문.

“아는 사람이야?”

그러게. 난 왜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갑자기 스스로가 좀 한심하게 느껴져서 멋쩍게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 그냥. 밥도 다 먹었고 나가서 커피나 한잔 하고 들어가자.”

“허, 뭐야 싱겁긴.”

코트를 걸치고 식당을 나설 때 까지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식당 맞은편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문득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그녀가 나를 보며 표정이 밝아졌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방향을 보았으리라. 괜히 뜨끔해서 뒤를 돌아보자 대학생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다시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이마엔 굵게 세 줄기 주름이 패여 있고 눈가와 입가에도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못해도 50대 후반은 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엄마!”

그녀에게 다가가던 청년의 목소리에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의 ‘엄마’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눈매가 그녀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청년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은근한 땀 냄새가 느껴졌다. 이런 날씨에 땀 냄새라니.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알바가 좀 늦게 끝났어요.”

그녀도 아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와의 거리가 꽤 가까워져 있어서 청년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땀 냄새의 정체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이 날씨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 때문에 서둘러 온 흔적인 것 같았다. 청년의 이 말에 손사래 치면서 별로 안 기다렸다며 웃는 그녀의 머리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청년도 말없이 그녀의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주면서 살짝 웃었다. 그녀는 그저 웃으며 청년이 눈을 다 털어낼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배고프지? 뭐 먹으러 갈까? 날이 추우니까 따뜻한 국물 있는 거 먹으러 갈까?”

청년이 눈을 다 털어내자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청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금 우리가 나온 식당을 가리키면서 자기가 이 근처에서 먹어본 곳 중에 이 집 갈비탕이 제일 맛있었노라며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모자는 식당으로 들어갔고 나와 동료는 식당 맞은편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우연인지 창밖으로 식당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가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열심히 이야기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가 이따금씩 웃는 모습이 보였다. 내 앞에 앉아 있는 회사 동료도 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말없이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식사가 나와서도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점심시간이 끝나감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엇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만 들어가지?”

“그러게.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됐나.”

커피점에서 나와 회사로 향하면서 다시금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가 한가득 걸려 있는 그녀와 그런 그녀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청년의 모습은 골목을 돌자마자 볼 수 없게 되었다.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청년의 웃는 얼굴이 각인된 것 같았다. 사무실 한켠에 있는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아 꺼져 있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의 모습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이도 비슷하겠거니와 어머니도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나의 이야기를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으며 들어주셨던 생각이 났다. 삭막한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 가면서 안부전화도 조금씩 뜸해진 것이 벌써 몇 주는 됐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아련해졌다.

“김 대리. 오전에 얘기했던 거 오늘 중으로 마무리 해 줘.”

“아, 네.”

과장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나 눈앞에 있는 모니터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회사는 돌아가기 시작했고 아마 퇴근 전까지는 별다른 생각조차 못 할 것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오늘 퇴근하고 나면 반드시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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