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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게시물ID : readers_70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ickyo
추천 : 1
조회수 : 77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4/22 16:14:45


딱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 발자국을 밟는 순간 보이지 않는 어떠한 선을 싹둑 하고 자르는 것처럼 느낀다. ..아니, 어쩌면 삶이란 돌아오지 못할 곳만을 밟으며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거칠었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지금 내가 이 선을 넘어선다고 해도, 넘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삶은 언제나 다시금 원치 않은 장소에서 알 수 없는 때에 선택을 강요하리라. 그나마 이것이 내게 주어진 선택이라면 감히 행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손 끝을 타고 뜨거운 울컥거림이 전달되어 온다. 스스로를 몇 번이나 다독이면서도 손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건만 막상 뜨끈한 액체가 손 위로 술렁술렁 넘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떨림이 멎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러나 숙이지도 않고 먼 곳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쥐고 있던 칼 자루를 뽑았다. 이를 악물고 힘을 줬더니 어금니에서 이갈리는 소리가 녹슨 철제 구조물에 튕겨져 허공을 맴돌았다. 미미하게 덜컹거리던 의자는 쏟아지는 핏물을 피하려고 더 과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비슷한 자리라고 여기는 곳에 한번 더 온 힘을 다해 칼을 찔러 넣었다. 붉은색을 뒤집어 쓴 의자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한번 더 파르르 떨었을 뿐이다.

 


그는 두어차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손을 떼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말끔한 정장의 중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전히 꿀럭꿀럭 피를 뱉어내고 있었는데, 여전히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보여 그는 새삼스레 생명이 얼마나 끈질긴지 느끼게 되었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더 이상 자기 영역을 늘리지 않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다가, 두 손으로 의자의 뒤를 잡고 창고 밖 부두로 질질 끌고 나갔다. 수분이 죄다 빠진 몸뚱이는 생각보다 굉장히 가벼워서 옮기기가 수월했다. 검은색 바다를 향해 주저 없이 의자를 밀어내자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새벽의 적막을 깼다. 의자를 끌고 온 길 뒤로 검붉은색 기찻길이 올라와 있었다.

 


피가 묻은 손을 바지춤에 쓱쓱 닦아내고 전화를 꺼냈다. 손에 습기가 있다 보니 터치패드가 잘 먹히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피를 옷에 닦아내고서야 전화를 걸 수 있었는데 덕분에 온 몸에 피칠을 한 것이 꼭 칼 맞은 사람 같았다. 기나긴 신호음이 지나자 건조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일은 다 처리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축하합니다. 차를 한대 보낼 테니 타고 오시지요.”

 


짤막한 대화가 끝나자 그제서야 그는 현실로 돌아온 듯 했다. 축하한다. 사람을 죽이고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날이 올 거라고는 평생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 출렁였냐는 듯이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피딱지가 쥔 두 손으로 부서져라 주먹을 쥐고 읊조렸다. “약속을 겨우 지켰다.” 눈이 시큰하더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왜 이러지? 이제 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샘이.. 이윽고 주체할 수 없이 어깨가 들썩이고 이내 아랫배서부터 화산이 분출하는 것마냥 괴상한 소리가 입을 때리고 튀어나왔다.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들썩이는 어깨가 잠잠해질 즈음, 어둠을 틈타 한 대의 차가 그 뒤로 멈춰 섰다. 그는 아까 통화에서 말한 차량이 왔음을 직감하고 눈물 콧물이 번진 얼굴을 재빨리 슥슥 닦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힘겹게 일어났다. 차는 라이트를 두 번 깜빡이며 그를 확인했는데 그 빛이 갑자기 눈을 찌르는 듯 하여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라이트가 꺼진 차량에서 이윽고 검은 점퍼를 입은 남성이 내렸다. 그는 방금전의 라이트 빛 때문에 그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며 입을 열었다.

 


, 박검사님께서 보내신..”

 


그러나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푸슉 푸슉 푸슉 하는 세 번의 공기를 찢는 소리가 그의 이마, 왼쪽 가슴, 아랫배를 찢고 지나갔다. 그는 무슨 상황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대로 쓰러져 내렸다. 남자는 트렁크로 돌아가 노끈과 벽돌들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뒤로 나자빠져 꿈틀대지도 않은 채 피만 왈칵 쏟고 있는 그의 다리에 노끈으로 벽돌을 묶었다. 능숙하고 숙련된 솜씨로 재빠르게 벽돌을 댓개씩 묶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체를 들어 태연하게 바다로 던져버렸다. 노끈이 팽팽해지기 전에 벽돌도 가볍게 밀어 던지고, 그는 주변을 한번 휙 돌아본 뒤 차로 돌아갔다. 부릉거리는 엔진의 시동음이 들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그 부둣가에는 붉은색 웅덩이만이 남아있었는데, 그것 마저 어딘가에서 주섬주섬 나온 비렁뱅이 같은 모습의 사내들이 무언가를 뿌리고 닦아 금세 사라져버렸다.

 



박검사는 텅 빈 집무실에서 파일을 넘겨보고 있었다. 매번 하는 일이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수사관들이 몇 시간 뒤면 출근할 것이기 때문에 그 전에 마무리를 해 놓아야 했다. 그는 몇 번이고 펼쳐본 파일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돈이 없었던 아버지와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딸. 얼굴이 반반한 그녀를 데뷔시켜 주겠다며 꼬신 돈 많은 자본가. 두 다리 사이를 벌리고 받아 넣은 고액의 어음들. 이 이후로는 뻔한 이야기였다.

 



자본가는 돈으로 여자를 희롱하고, 또 다음 무고한 희생자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뱃속에 남겨진 어음은 부도수표가 되어 배를 불리 우고, 심지어 그 부도수표마저 뜻대로 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온갖 달콤한 꿈을 건네던 남자는 처음 보는 건장한 남성들의 몽둥이 질에 갈기갈기 찢겨진 수표를 왈칵하고 다리 사이로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깔깔대며 웃는다.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향해 입이 부서질 때까지 발길질을 하고, 허공을 힘 없이 헤메는 양 팔을 콱 잡아챈 뒤 연약한 피부를 과격하게 찢는 주사바늘들이 그녀의 혈관에 피와는 다른 희멀건 물질을 빙글빙글 돌게 하노라면, 어느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르는 채 흐리멍텅한 눈으로 몸에서 나오는 온갖 액체를 질질 흘리며 주저 앉아 있는 살아있는 변사체가 되어버린다.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재판을 할 수도 없다. 증거는 철저하게 인멸되어 있고, 꼬리를 잡더라도 금세 잘려나간다. 피해자의 상태를 알게 되는 가족들은 보통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스스로를 죽이거나, 상대를 죽이려 하거나. 그러나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면 대부분은 처음부터 당하지도 않는다.

 




 그는 동기가 충분한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욕도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복수를 완성하겠다는 자세. 박 검사는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를 생각했다. 몇 번이고 달려들었으나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복수. 죄목은 살인미수였으나 정작 두들겨 맞고 뼈가 부러져 온 사내.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전혀 꺾이지 않고 증오심을 활활 불태웠던 남자. 박 검사는 끊기로 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시뿌연 담배연기가 사무실의 환기구를 타고 올라갔다.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상황을 만들어주고, 복수할 기회를 주는 것. 사법당국이 할 수 없는 징벌적 구제를 위해 힘을 슬쩍 빌려주는 것. 그의 제안을 들은 그 남자의 표정이 떠오른다. 퉁퉁 붓고 시퍼렇게 뜬 얼굴 위로 번지는 간절함. 책상에 이마를 박으며 제발 부탁한다던 절박함.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가 했던 제안과는 약간 다른 결말이었지만 박 검사에게 있어서 이제 그런 거짓말은 거리낄 것이 없는 일이었다. 사건파일의 마지막 장에 서명을 하고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두 번의 잠금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어서 블라인드를 열고 기지개를 폈다. 창문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마천루를 자랑하는 도시의 도로는 어제와 다를 것 없이 평안하게 분주했고 활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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