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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빙벽 위에서
게시물ID : readers_51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똑디이빨
추천 : 2
조회수 : 24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23:49:30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3피치(두개의 하켄 사이에 줄을 고정시킨 간격. 3피치는 6개의 하켄 사이에 줄을 고정시킴. 피치 하나당 40미터 내외.)를 넘기 전만 해도, 사지를 단숨에 찢어발기겠다는 듯 매섭게 불던 바람이 어느새 서늘하게 잦아들어 있었다. 마터호른의 북벽은, 철민의 목숨을 삼키고도 도도히 그녀를 맞았다.



알프스의 피라미드는 새벽녘부터 날카롭게 모서리를 세우고 있었다. 1,100미터의 북벽은 새벽부터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좌측빙하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크레바스(얼음 사이의 갈라진 틈)가 촘촘히 박혀있다고, 이틀 전 하산한 영국팀이 전해왔었다. 서진은 철민과의 빌레이(줄의 연결)를 점검하고 아이젠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빙벽등반은 얼음이 단단해야 안전하다. 종일 온도가 낮다 하더라도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철민이 앞장서서 빙벽을 찍어 오르기 시작했다. 노련함은 서진이 앞섰지만, 빙벽 하단부는 공략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기에 철민을 앞세웠다. 55도의 경사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난이도였다. 피치 하나에 약40미터. 밧줄은 생각보다 금방금방 빠져나갔다. 이런 속도라면 이틀 뒤에 순조롭게 빙벽을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철민은 씩씩하게 얼음을 찍어대고 있었지만, 이내 행오버(툭 튀어나온 선반 같은 지형)를 만나 주춤하고 멈춰 섰다. 가로로 15미터, 높이 1미터 정도의 폭을 가진 녀석이었다. 철민은 우회 루트를 찾는지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나마 높이가 낮은 부분을 찾아 옆으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서진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빙벽 등반은 익스트림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생사를 다투는 스포츠다. 암벽이라는 험난한 지형에 얼음이라는 극한의 변수가 더해져 훌륭한 위험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얼음의 상태는 기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다음 순간 피켈(등산용 곡괭이)로 내리찍은 얼음이 부서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위험 역시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3초 전까지만 해도 발을 붙이고 있었던 홀드가 까마득하니 떨어져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고는 지극히 냉철해야 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얼어붙은 만년설보다 더 차갑게 빙벽을 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빙벽은 단숨에 등반가를 집어삼키려 든다. 산은 틀림없이 살아있다.


 철민은 어렵지 않게 선반 위쪽으로 상체를 밀어 올렸고, 그 뒤로도 쭉쭉 피치를 빼냈다.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등반은 멈추기 어렵다. 그것은 산이 허락하는 기회였다. 악명 높은 험산이 가끔씩 내보이는 호의는 귀한 기회지만,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호의를 거절당한 산의 보복은 틀림없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4피치를 더 뺀 두 사람은 잠깐 쉬기로 했다. 목표 지점까지 100미터 남짓한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열심히 오른 보람이 있었는지, 시간은 아직도 오후 네 시를 넘기지 않았다. 목표지점까지는 길어야 두 시간 남짓. 짧으면 삼십분 내에도 주파가 가능했다. 오늘 분배한 코스를 소화해내면, 내일 치 구간은 꿀르와르(암벽사이의 깊은 협곡)를 따라 쉽게 오를 수 있을 터였다. 짧은 휴식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식빵쪼가리와 잼, 과일로 끼니를 때웠고, 남은 1피치를 단숨에 주파했다. 앞서 조사한대로 적당한 넓이의 테라스가 튀어나와 있었고, 최신형 나이프하켄도 다섯 개나 단단히 박혀 있었다. 둘은 비박(bivouac: 텐트를 치지 않은 일시적인 야영지, 거기에서 자는 것)할 준비를 했다. 테라스에서의 비박은 등반가들에겐 꽤나 괜찮은 호사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카라비너와 자일(등산용 로프), 하켄 한두 개에 의지해 공중에 매달려 잠을 청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비박 준비를 끝낸 서진은 관자놀이가 휑하도록 펼쳐진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볕을 기준으로 북쪽의 준봉들은 서서히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기점 산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선득하게 투명한 공기에 저 멀리 도심지까지 보였지만, 지평선은 높이 둘러싼 산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겨울은 태양은 잠깐의 시간이지만 빠르게 기울었고, 만년설에 반사되는 황혼이 촛불처럼 타오르며 서진의 망막으로 뛰어들었다.


 서진은 말없이 풍경을 마음속에 들여놓았다. 아마 두 사람의 마지막 산행일 테다. 이별을 결심한 후부터 그와 그녀의 관계는 빠르게 식어갔다. 서진의 일방적인 외면에도 불구하고 철민은 그녀를 쉽사리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었기에 서진은 그에 대한 애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은, 여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번 산행에 동의했고,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진은 안전모를 벗으며 흘깃 눈으로 철민을 건너다봤다. 그는 입이 심심한지 육포 한 쪼가리를 우물대고 있었다. 철민도 서진의 결심을 알고 있을까. 그가 이 산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또 무엇이고. 남자는 씹던 육포를 삼키고 서진을 쳐다봤다. 귓바퀴로 눈을 마주치는 상황이 어지간히 불편했다. 철민은 간단히 통보했다. 먼저 자겠다고.


다음날, 새벽부터 둘은 다시 빙벽을 타기 시작했다. 알프스의 새벽은 광활한 우주 그 자체다. 노출 값을 최대로 올린 카메라로 찍은 시골 밤하늘이, 이곳에선 날 것 그대로 펼쳐져 있다. 별들은 우둘투둘한 산 능선 너머로 가라앉았고, 별 그림자에 져버린 만년설이 야경을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진은, 이 순간만큼은 무아지경으로 빙벽을 탔다. 피켈은 박는 족족 얼음 깊숙이 파고들었고, 눈이 쓸려나간 릿지(바위능선)는 무게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30분짜리 피치를 두 개정도 딴 후부터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지만 서진은 개의치 않았다. 어느새 마터호른 북벽의 중반을 오르고 있었다. 경사도가 80을 넘는 구간이었다. 열기에 취해 피치 확보 시간을 점차 줄여가던 서진은 마침내 자신이 선행을 하겠다고 했다. 철민은 이상하게도 순순히 위치를 바꾸었고, 둘의 등반속도는 더더욱 빨라졌다.


 두 사람이 자리를 바꾼 이후로,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간간히 싸락눈도 섞이기 시작하는 것이, 기상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정상까지 약 300미터, 비박을 할 수 있는 구간까지는 적어도 세 피치는 더 나가야 했다. 암벽화를 신어도 될 정도로 바위 표면이 드러난 구간이었지만, 난이도는 Ⅳ. 그리고 아이젠을 신은 신으로는 오히려 발 디딤이 불안정해진다. 튼튼한 나이프하켄이 듬성듬성 박혀 있긴 했지만, 눈보라에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저 멀리 보이는 행 오버 아래쪽에 주렁주렁 매달린 커다란 고드름이 서진의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 두 사람을 덮치는 위치. 하지만 하켄은 적어도 5개가 그대로 뻗어있었다. 좌우로 다른 확보물을 찾아봐도, 눈보라 때문에 진로를 바꾸기엔 여의치 않은 상황. 서진은 빠르게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15미터정도를 전진하면서, 서진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켄의 상태는 매우 튼튼했다. 말인즉슨 정상루트인 동시에, 낙빙을 걱정할 정도로 위험한 루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람이 거세긴 했지만 자일은 하켄 사이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확보 상태도 양호했다. 철민 역시 수월하게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직각으로 굽어진, 행오버 좌측의 3번째 하켄이었는데, 하켄의 위치가 지나치게 꺾여 있었다. 행오버 위쪽에도 하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드름 때문에 단숨에 타고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행오버 아래쪽의 하켄에 자일을 걸쳤다. 생각보다 고드름은 단단해보였고, 우회루트도 비교적 명확하게 보였다. 빙질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빠른 속도로 3번 하켄에 절반쯤 다가왔을까, 귓전에서 펄럭이는 바람 사이로 이질적인 타격음이 서진의 귀에 포착되었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빙벽에 붙이며 소리쳤다.

“낙석! 낙석-!!”

 곧이어 서진의 몸통만한 바위가 그녀를 스쳐지나갔고, 다음 순간 네댓 개의 바위가 그녀의 팔과 머리를 강타했다. 

“슬립!!”

 비명처럼 울리는 메아리와 함께 서진은 자일을 펄럭이며 약 15미터를 추락했다. 하지만 추락하는 서진은, 눈발 사이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웬만한 SUV만한 바위가 행오버를 두들기고 튕겨나가는 것을, 그리고 아래에 매달린 고드름들이 우수수 흩어져 내리며 철민을 덮치는 광경을.


 퍽 하고, 거꾸로 매달린 서진의 머리가 홀드에 부딪혔다. 안전모를 착용하더라도 뾰족한 바위에 부딪히는 것은 적잖은 충격을 가져왔다. 순간 시야가 아득해졌던 서진의 눈에 철민이 자신의 자일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행오버 위로 덮치는 낙석을 서진보다 먼저 파악하고 그녀의 자일을 잡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이었다. 굉장히 많은 일이었지만 정말로 간발의 차였다. 그러나 낙석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굴러 떨어져온 사람만한 바윗덩어리가 로프를 잡고 있던 철민을 치워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민은 40미터 아래로 추락했고, 동시에 서진 역시 빙벽에 거칠게 부딪히며 정신을 잃었다.


 철민은 새로 산 피켈을 보여주며, 이제 암벽이 아니라 빙벽을 오르겠다고 했다. 피켈의 끝은 지나치도록 뾰족했다. 서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빙벽은….


 온 저리는 통에 서진은 눈을 떠야 했다. 얼마나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감각 역시 무뎌져 있었다. 정신을 차린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손가락은 벌써 곱아들어 감각이 없었고, 피켈 하나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색하게 꺾인 오른 다리는 피가 통하지 않았는지 그저 살덩어리로 느껴졌고, 왼쪽 발은 욱신거리다 못해 간지러웠다. 동상의 초기 증상이다. 서진은 그나마 자유로이 움직이는 양 손으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관절이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에 쌓인 싸락눈들이 우수수 흩어져 내린다. 무심코 눈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눈으로 쫓던 서진의 눈에, 눈덩이 하나가 빙벽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서진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단순했다. 철민은 죽었다. 이제 곧 서진의 차례다. 체온 저하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서진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어림잡아 두 시간은 족히 기절해 있었던 듯 했다. 베이스캠프와 마지막 무전이 2시간 반 전. 30분 간격이니 지금쯤 사고가 난 것은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기상상태로는 구조대가 올 수 없었다. 서진은 무전기를 잡았다. 다행이 고장은 나지 않았다. 송신버튼을 누르고 짧게 상대방을 호출한다. 아, 받는다. 서진은 상황과 위치를 대략적으로 전달했다. 철민의 죽음을 알리면서도 비통함은 들지 않았다. 자신 역시, 다음 차례라는 생각이 더욱 강할 뿐. 다만,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느냐, 한 피치라도 더 오른 후 죽느냐의 문제였다. 서진은 피켈로 철민과 연결된 자일을 끊었다. 복부를 압박하던 무게감이 툭, 하고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고, 희미하게 보이던 눈덩이는 소리 없이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다. 서진은 피켈을 다잡았다. 그녀가 도착해야 할 곳은 이제 비박 포인트가 아닌 정상이었다.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마터호른의 꼭대기에서, 오롯이 홀로. 그 무엇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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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부분 수정하느라 다시 올리네요..
아 오유 홈페이지 이미지가 다 깨져보이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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