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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 - 살육의 승전
게시물ID : readers_51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불꽃의기사
추천 : 0
조회수 : 1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2 23:49:50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가득 피어난 흰 눈꽃 속에서, 어미를 잃은 한 마리 아기새마냥 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나도 모르게 그 등 뒤로 내딛었던 한 발은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금 제 자리로 돌린다. 시린 가슴을 속이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올리고 나서야 그녀를 부를 수 있었다.

대주, 이곳에계셨습니까?”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떨림은 온전히 떨쳐내진 못한 듯 작은 망설임이 일었다.

벌써 끝이 났나요?”

그녀는 나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흑단보다 더 윤이 나는 검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린다. 슬픔을 가득 담은 눈망울과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이 여린 여자가

바로 조선 최고의 무력집단, 의천의 4개 전투대의 하나인 은랑대의 주인이다.

팔도에서 고르고 고른 1천의 무사를 통솔하는 여장부.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없던 그녀의 어깨가 지금은 너무나 작고,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막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고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 측 피해는 전무한 실정입니다. 몇몇의 부상자가 나오긴 했어도 치료만 잘 받으면 금 새 나을 것입니다.”

대승이었다. 수백 명이 투입된 전장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 없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보고를 하고 있는 내 마음도, 또 내 앞의 여린 그녀에게도 마냥 달갑지 못한 승전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작은 산골 마을은 사라졌다.

그 대신 참혹했던 전장의 상처를 가득 담은 폐허속에서 그녀는 분주히 움직였다.

조악한 활과 부지깽이등을 움켜쥔 채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나간 적들의 시신이 불에 그슬린 공터에 한 무더기로 쌓여갔다.

제기럴, 내 평생 이렇게 기분 나쁜 싸움은 처음이구만.”

육중한 전투도끼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는 호성은 자신이 들고 온 시신을 내려놓으며 욕지기를 내 뱉었다.

그 곳에는 이제 막 집안을 활발하게 뛰어놀법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함이 가득해야 할 얼굴에는 고통과 얼룩진 눈물자국만을 남긴 채, 아이를 그렇게 짧은 세상을 떠났다.

호성은 결국 못 참겠는지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의 애병인 쌍월부를 어깨에 들쳐맨체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그 발걸음은 나를 포함해 어린 여대장의 지시를 받아 묵묵히 시신을 수습하는 우리 대원들의 공통적인 마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호성의 일탈에도 눈길한번 주지 않은 채, 그녀는 주변의 시신을 나르고 또 날랐다.

 

어느덧 붉은 태양이 서산 너머로 넘어갈 때 즈음엔 시체로 쌓은 산이 작은 동산을 쌓을 만큼 높아졌다. 그 중의 대다수는 전쟁과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던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민들이었다.

부대주, 정리가 모두 끝이 났네. 이제 태우기만 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토록 하지요.”

벌써 엊그제부터 한 잠도 못 취했던 그녀는 대원들이 반 강제로 막사에 뉘였다. 대주가 자리를 비웠으니 당분간은 내가 대를 이끌어야 한다. 어려울 것은 없었다. 이미 기름을 가득 담은 나무통도 모두 구해놓았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눈앞에 그려진 지옥도를 쳐다보았다.

혀를 길게 내민 채, 눈을 부릅뜬 그 모양새가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하다.

애써 떨쳐내려 했던 번뇌와 죄의식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나는 앞에 걸린 횃불을 집어 들었다.

화르르륵!

기름을 가득 먹은 거대한 화마가 거대한 홍염을 발하며 솟아올랐다. 매캐한 검은 연기와 함께 살이 타는 누런내에 나는 코를 쥐어 잡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죄의식이나 저들에 대한 연민보다 당장 내 코에 전해지는 자극이 나를 더욱 심하게 몰아친다.

그래, 우리들은 죄가 없어. 조정의 명을 받아 적들을 섬멸한 개선군이다!’

대원들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파고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간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던 대원들도 이제는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을 참이었다.

으아아아앙!”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의 저 너머로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 어찌합니까? 부대주?”

나와 안면이 꽤 많은 대원 덕성이 곤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

그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눈앞의 이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흙더미가 잔뜩 묻었지만 아이의 옷은 한양의 양반집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 비단이다. 이렇게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이러한 값비싼 옷을 입힐 수 있는 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집안 모두가 조정에서 내려진 토벌문서에 들어가 있었다.

다쳤구나.”

아이의 오른 발은 화상으로 부어있었다.

아마도 이 참사를 피하기 위해 부모가 숨겨놓은 장소까지 저 거대한 불길이 닿았던 모양이었다.

, 부대주. 분명 이곳 지주의 가족이 분명한데.”

말끝을 흐리는 이 대원도 고개를 내저었다.

전투가 끝나고 흥분했던 감정이 가라앉으니 도저히 이 어린 아이를 죽이자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이들도 막상 눈앞의 아이를 두고는 말없이 땅만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광기로 변해가던 분위기가 단 한 번의 울음소리에 깨어난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겠지. 데리고 복귀한다.”

아이의 작은 발에 붕대를 감아주고선 말안장에 훌쩍 올려 태웠다.

, 눈앞에 그녀가 보인다. 조금은 휴식을 취했는지 많이 좋아진 안색에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출셋길을 막으면 서 까지도 이번 토벌을 반대하던 대주인데, 그래도 이 아이를 본다면 좋아할게 분명하다. 나는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푸욱!

친숙하면서도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나는 조심스레 눈동자를 돌렸다.

눈처럼 흰 검날이 말 안장에 태운 작은 아이의 몸을 비집고 튀어나와 있었다.

, ! 우리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을 죽인 겁니다! 당당한 개선장군 이예요!”

, 나를 비롯한 모든 대원은 광기가 가득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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