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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오거리의 까마귀들, 1. 태양을 위하여 - 4
게시물ID : pony_407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불가필
추천 : 2
조회수 : 28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4/24 23:00:13

  늙은이는 천장만 쳐다보며 젊은이는 바닥을 바라본다. 쾌차하시란 말을 제하면 하급자인 미하일은 먼저 건넬 말이 없었다. 질문을 해 오면 답이라도 할 텐데 그의 조부는 천장만 보다뿐이지 아무런 말이 없다. 그 탓에 병실은 조용했다.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침대의 환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거나 책을 보고 있다.
  조용한 중에 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방에 산 포니라고는 그밖에 없는 듯하다. 그는 그마저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잘 살고 있나. 알 수 있나. 지금의 감정과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면 제법 괜찮은 걸작이 나올 듯도 하다. 소, 하고 설. 그는 작게 웃는다. 아무래도 그 역시 죽어 있는 듯하였다.
  늙은 마부와 막스도, 요루즈도, 그의 조부와 일리사이도, 셀레스티아 공주도 다들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중의 몇은 삶이겠으며 몇은 죽음이겠거니 생각한다. 치열히 살고 죽는 와중에서, 그는 침묵하였고 외로웠다.
  멀리로 창밖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병원 인근엔 심겨놓은 나무가 많았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었다. 더러는 늙고, 더러는 어리다. 매서운 봄바람이 불 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나무들은 늙거나 어려 서로 달랐으나 그것들의 가지에서 파릇한 이파리가 돋아나고 있다는 것만은 다르지 않았다.
  잎이 나고 봄이 온다. 그렇게, 다 살아가는 중이었다.

 

 


  겨울도 끝나갈 무렵,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미하일은 알고 지내던 포니의 죽음을 통보받았다. 사인(死因)은 자살이었다. 망자의 생전 모습을 떠올려본 미하일이 고개를 약하게 가로젓는다. 그 활달한 친구가 그럴 리 없는데. 어쨌거나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과일장수 스피델, 죽은 포니의 이름이다. 유난히 짙은 눈썹에, 새파란 눈과, 검은 갈기. 아니 회색이었던가. 몸의 털빛만은 옅은 다홍색이었던 것이 확실할지도 모른다. 그는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사실, 그의 아버지의 고향인 올펏(미하일이 태어난 곳은 이곳 캔틀롯이었다) 출신의 스피델은 그와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는 넉살 좋은 스피델의 성격을 두려워했다). 상경한다기에 친척들의 부탁으로 작은 도움을 몇 번 주었고 스피델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종종 과일을 보내주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적인 교류는 전무하였다.
  어색한 사이지만 죽었다니 가엾다. 자살이라니 더욱 그렇다. 힘든 내색도 보이지 않던 포니가 왜. 미하일은 의문을 접어두고 그가 죽어 좋은 곳으로 갔기를 빌었다.
  그의 과일을 몇 번 얻어먹은 적 있는 샤이닝 아머는 나라의 변두리에 세워진 공화국 탓에 세간이 뒤숭숭했음에도 미하일의 휴가를 용인해주었다. 자네야 어차피 캔틀롯에서 가장 자유로운 노동자 아닌가. 근위대 본부에서 나온 미하일은 그의 어머니께 나가리라 알리고는 곧장 기차를 타고 캔틀롯을 빠져나갔다.
  스피델과 그의 가족들은 왕도(王都) 인근의 가난한 마을인 문타운에 살고 있었다. 장례식도 그곳에서 열렸다. 가끔 밤에 루나 공주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은 기차가 들지 못했다. 미하일은 산 아래의 도시에 내려 그곳에서부터 문타운까지 올라갔다. 운이 좋아 그곳으로 가는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정말이지 가난한 마을이었다. 아이들은 비쩍 말라 갈빗대가 드러났고 판자로 지은 집들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추운 농한기였지만 돌아다니는 주민들이 제법 있었다. 미하일이 붙잡고 물으니, 모두 스피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들이었다.
  이상한 것이 있다. 가난한 길거리에서, 좋은 옷을 입은 말끔한 청년들이 가끔가다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사교성 좋던 스피델이 사귄 부잣집 친구쯤으로 생각하였다.
  미하일의 눈이 커진다. 저놈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붉는 눈과 갈기, 푸른 털빛. 선한 인상의 유니콘은 벽에 기대어 다른 유니콘들이나 페가수스들과 혹은 남루한 어스 포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캔틀롯 학회의 일원으로 저명한 사학자인 레플렉스의 아들……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청년들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간소한 장례는 끝이 났다. 제 목숨을 끊은 얼간이의 상(喪) 따위 알 게 무엇이냐며 내내 불참하던 스피델의 늙은 아비가 막바지에 나타나 아들의 관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아비는 고개를 숙였다.
  “내 새낀데.”
  저기, 관에 누운 게.

 

 

 


  고인과 가깝게 지내던 포니들이 관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스피델의 아비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청명한 종소리가 남은 조문객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미하일이 보니 예의 청년들이었다.
  “여러분, 혹 무엇이 우리 모두의 친절한 이웃 스피델을 죽게 하였는지 알고 계십니까?”
  안경을 쓴 녹색 어스 포니의 말에 웅성거리는 군중.
  “생전에, 스피델은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 모두도 이 병을 앓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가난이라는 불치의 병입니다…… 스피델은 영리하고 ‘깨어 있는’ 우리의 친구였습니다만은 그것이 가난병의 약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나라와 몇 거상(巨商)들이 결탁해 스피델을 죽인 셈입니다…… 그는 이 저주받은 병을 비관하며…… 그러는 동안 이 나라와 제도와 왕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미하일은 다음에 이어질 말들을 속으로 예상해보았다. 그것들은 얼추 맞았다. 비관적인 처지를 부각시킨 다음, 나라와 상류층의 무능이나 폐단을 탓하며, ‘깨어 있는’ 포니가 될 것을 호소한다. 공화주의자들의 흔한 패턴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삶,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그에 호응하였다.
  미하일은 그런 그들을 잡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말이 구구절절 참 옳기도 하거니와 그는 오늘 휴가를 내고 알던 이의 장례에 얼굴이라도 비추려 온 것이지 근무차 공화주의를 뿌리 뽑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까지 성실하지 않다.
  그는 다만 호기심이 일었다. 상류층 젊은이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연설자의 한참 뒤편에서 저들끼리 쑥덕거리던 대여섯의 청년들이 느닷없이 흩어져 달리기 시작한다. 붉고 푸른 유니콘의 뒤를 쫓아, 그도 달렸다. 시골길은 우둘투둘해 거칠었다.

 

 

 


  둘은 비탈길을 달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일정 간격을 두고 더 좁아지거나 넓어지지 않는다. 미하일은 일부러 당장 잡아 뒤통수를 갈기지 않고 느긋하게 뛰었다.
  한참을 무언가에 홀린 듯 달리던 미하일은 그가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가던 청년이 멈춘다. 그도 멈추었다.
  청년이 지쳐 숨을 고를 동안, 미하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닳아빠진 비석이 지키는 임자 모를 묘들엔 듬성듬성 잡꽃들이 피어 있다. 나비들이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무덤가에서, 죽은 자들은 삶을 말하는 공화주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하일도 그를 보았다. 여타 공화주의자들이 심심할 적마다 외치는 구호. 잘 살아보세! 부유한 학자의 아드님은 얼마나 더 잘 살려고 여기 송장 깔린 두메산골까지 찾아왔나.
  나무들과 풀들 사이 멀리로 마을이 아득하게 보인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을, 가난하고 비천한 삶을 넘어 그곳에서 출발한 어스 포니들이 경건하게 망자의 관을 이끌고 무덤이 가득한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망주석이 풀 위에 쓰러지고 비석에 새긴 글귀는 알아볼 수 없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산 자들은 삶을 신봉하였다.
  스피델도 안 되겠군. 참 안됐어. 이미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세상을 그리워 흉내 내었고 아는 척을 하였으며 그들처럼, 살지 못한 자들을 불쌍하게 여겼다. 미하일이 그들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살아도 죽어도.”
  아예 주저앉아 쉬던 청년이 이에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그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하나만 묻지. 그렇다면 자네는 왜 사는가? 미하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죽은 자들은 우두커니 선 그를 남겨두고 무덤가 뒤편으로 난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 한탄하였다. 애고(哀苦), 애고! 아이고(我以苦)오……. 미하일은 망자들이 그가 만들어낸 환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땀방울이 숨줄 위를 타고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근위대 부대장 미하일, 맞지요? 흰 갈기 흰 털 흰 눈.”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몬그랩이라 밝혔다. 미하일은 그제야 그를 기억해냈다.
  “여기선 달이 참 잘도 보입니다. 문타운, 그야말로 달동네지요. 달과 가까운 동네, 아주 뭣처럼 가깝지!”
  미하일은 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레플렉스의 아들 몬그랩, 자넨 왜 이러는가?” 그는 그가 질문을 조금 이상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포니답게 살기 위해 이러지요!”
  미하일은 몬그랩의 두 눈이 태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마침 해는 지고 있었다―그래도 밤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희미하니 달이 보인다.
  달구경이나 하던 그는 몬그랩과 말을 나누던 중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몬그랩의 뿔은 아주 밝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하늘에서, 수풀 속에서, 나무 뒤와 위에서 네댓 명의 유니콘들과 페가수스들이 튀어나와 저마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미하일은 오늘은 달이 밝으리라 생각한다. 새하얀 유니콘은, 미안하지만,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번갈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뿔에서, 눈이 멀도록 강렬한 흰 빛이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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