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땅, 땅-. 거칠게 오려진 교과서의 한쪽 귀퉁이가 분주히 교실을 뛰어다녔다. 만년 이등인 실장의 정수리에서 왁스 가득 발려진 좀 노는 오빠의 머리통을 타고 내려와 매 시간 자는 아이의 귓 바퀴를 돌아 학급 청소부장의 꾸지람을 듣고나서야 들뜬 종잇조각은 사정없이 구겨진 제 몸통을, -땅, 그 멀대 앞에서 펼쳐보였다. 뭉툭한 연필은 행여 날아갈까 어제의 고백상황을 꾹꾹 눌러 종이에 담았고, 지루한 아이들은 눈을 빛낸채 바지런히 종이를 옮겨다녔다. 그것은 일련의 삐라였다.
삐라는 지구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이윽고 제 본분을 뛰어넘은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00일, 커플, 크리스마스, 여자, MT, 보X, 자X, 씨팔, 가슴, 다리, 털... . 그녀는 삐라 안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아니, 구겨져 있기만 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그의 것이 되었지만 그는 아직 그녀를 지켜줄 마음이 없었다. 멀대는 입을 쩍 벌리며 삐라를 보고선 더욱 열심히 뭔가를 끄적여댔다. 잠시 후 삐라는 아이들 뒷통수로 재비행을 시작하였고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수직으로 낙하하여 먼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멀대는 하루종일 큰 소리로 그녀를 지칭하였다- '개년'.
아이들 역시 눈치를 보다 마음 껏 그녀를 입에 담았다- '개년'.
'개년'은 18번 째의 삐라를 타고 교실을 날아다녔다. 공중 비행을 하는 '개년'의 팔랑이는 스커트 밑을 보기위해 '개놈'들은 혀를 뽑은채 헥헥 대었고 저마다의 손은 분주히 자신의 성적 이상을 교과서 귀퉁이에 옮기고 있었다. 이제 교과서 귀퉁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폭력'이었다. 나는 내 귀퉁이가 혐오스러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를 수업시간 내내 찢고 있었다.
(나는 점심을 먹은 후 화장실에서 런닝 사이로 푸르딩딩한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