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서 열등감이 발생한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미모에 대한 성취되지 못한 애착을 전제한다.
추구하는 미모의 상실에서 외모 콤플렉스가 발생한다.
열등감 상황에서 주체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이는 자존감을 훼손시킨다.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열망은 너무나 집요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열등감 상황은 대체로 견디기가 어렵다.
거울 이미지는 우리의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는 듯 보이지만 나르시시즘의 열망이 이미지를 왜곡한다는 사실은 감추어져 있다.
자신의 모습을 어떤 각도로 거울에 반영하느냐에 따라 이미지는 달라지고 다양한 각도의 수만큼 그만큼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다양한 이미지들 각각이 모두 자신의 모습임에도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이미지만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나르시시즘적 열망이 이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세월의 길이만큼 거울보기의 횟수는 비례하고 특정 각도의 소수 이미지만이 자신의 반영이라는 착각의 반복 속에 여타 이미지들는 시각의 무의식적 층위로 억압된다.
기만적 거울 이미지의 진실은 사진, 특히 필름 카메라 사진에서 폭로된다.
처음 자신의 필름 카메라 이미지를 본 사람들은 불쾌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필름 카메라의 이미지는 자신임에 분명하지만 대개의 경우 나르시시즘의 열망으로 거울보기에서 억압시켜 놓았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억압된 진실의 폭로는 나르시시즘을 훼손시켜 주체를 불쾌하게 만든다. 피사체 자신의 능동적 각도 조절이 불가능한 필름 카메라에서 주체는 거울보기와 달리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이미지 형성에 개입시킬 수 없다.
디카의 보급과 카메라 렌즈 회전 기능으로 말미암아 사진 이미지는 이제 거울 이미지에 근접했고 피사체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사진 이미지 형성에 개입시키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얼짱 각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굴욕 사진들이 존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진에서 여전히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열망은 집요하다. 뻔히 드러난 진실을 왜곡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따라서 열등감 즉 자신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은 매우 고통스럽다.
이때 열등감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서 슬픔과 우울증이 분기한다.
슬픔에서 주체는 열등감을 정면에서 천천히 응시한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도 이상에 대한 열망도 왜곡되거나 부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열등감이 자기 극복으로 해결되든 정당한 체념으로 마무리되든 고통스런 슬픔의 시간이 종료되면 열등감도 합리적으로 해소된다.
슬픔은 인간을 성장시키고 거기에는 나르시시즘의 훼손이라는 고통스런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즘적 열망이 강한 사람의 경우 슬픔의 과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열등감을 왜곡하거나 억압해서라도 자존감을 지키려는 경향이 생긴다.
예컨대 실제로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강렬하나 이를 숨기고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한다는 식으로 꾸며댐으로써 자신의 미모에 대한 애착을 왜곡하여 현재의 초라한 자신을 기만적으로 긍정하려 할 때 슬픔은 우울증이 되고 주체는 순간적이나마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슈렉이 고립된 삶의 장점을 일갈할 때 그의 주장은 기만적이다.
그러나 허위의식에 의해 적어도 열등감을 의식에서 몰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열등감은 제거되거나 극복되지 않고 억압된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며, 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형식으로 돌아온다.
의식에서는 열등감이 부인되고 있기 때문에 주체는 열등감이 회귀했을 때 불쾌감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울증적 고통은 슬픔과 달리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런데 기만적인 슈렉이 우울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외로움에 대한 열망은 존재하나 그것이 강렬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