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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육우당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6790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움칫둠칫
추천 : 1
조회수 : 42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4/26 21:00:17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그에게는 이렇게 여섯 가지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육우당(六友堂)'이라 불렀다. 글쓰기를 좋아했고, 또 잘 썼다.


"난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른손잡이가 있으면 왼손잡이가 있는 것이고, 이런 길이 있으면 저런 길도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을 걷는다면, 난 단지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있는 것뿐이다." (2002.10.8 육우당이 쓴 일기)


"내 혼은 꽃비 되어 당신 곁에 내리는데 / 당신은 이런 나를 못 느끼고 계시군요. / 임이여! 내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아요." (육우당의 시 )


육우당은 성 소수자라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진 후 따돌림을 당한 끝에 2002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다 2003년 3월,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어른들은 경악할 학교 울타리 밖 활동이었지만, 그는 당당했고 쾌활했다.


일기와 시에 꾹꾹 눌러 담곤 했던 담대한 용기는 그해 4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성 소수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내던진 저주 섞인 성명 앞에서 중심을 잃고 흐트러졌다.


당시 한기총은 청소년보호법에서 동성애자 차별 조항을 삭제하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한다"고 했고, "동성애는 창조 질서에 도전하고 에이즈를 퍼뜨린다"고 했다. 이에 발맞춰 등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기사를 연이어 쏟아내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묵주를 항상 가방에 넣어 다닐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육우당은 끝없는 절망을 느꼈다. 그는 그해 4월 25일 자주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향년 19세.


6장에 달하는 유서에 그는 썼다.


"홀가분해요. 죽은 뒤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는 동성애자다'라고요."


"내 한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 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죽은 게 아깝지 않다고 봐요."


이렇게 육우당은 청소년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됐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이맘때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어 왔다. 올해는 10주기다. 22일 '내 혼은 꽃비 되어 무지개 봄꽃을 피우네'란 이름의 육우당 추모 주간이 시작된다.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1991772





그의 죽음 이후에 시민 단체들이 한기총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한기총은 사과할 수 없다는 입장만 밝혔습니다.


마침 개신교 신자들의 반대로 차별금지법이 철회된 상황에 놓인 것이 아이러니하네요.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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