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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안생겨요.
게시물ID : readers_5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태
추천 : 14
조회수 : 85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23:59:43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긴 검은 생머리에 하얀 피부. 적당한 키, 다리에 쫙 붙은 진한색 청바지에 짧은 가죽잠바. 이런 객관적인 그녀의 모습을 떠나 버스정류장에 홀로 서있는 그녀는 차가운 눈발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그 조용한 정류장에 왔을 때부터 계속 스마트폰과 버스 도착 안내판을 번갈아 가며보고 있었다. 모든 버스 번호 옆에 빨간 글씨로 종료 버튼이 떠있는걸 보며 긴장하던 중 내가 기다리던 버스 번호가 떠올랐다.

 

번 호   남은시간

XXX번   7분 막차

 

다행히 막차가 남아있었다. 저 버스 하나만 남아있는데 기다리고 있는 걸로 봐서, 그녀는 나와 같은 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손등 위로 눈이 내렸다. 그녀는 그제야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내가 서있는 가로등 위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첫 눈이네. 올해도 안 생겼네.”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에 홀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안생겨요.”

“네?”

 

내가 무심코 낸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러다 이내 되묻는 자기 목소리도 너무 컸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보였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생긴다구요”

“아, 네...”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본다는듯 내게 낯선 남자를 향한 경계어린 눈빛을 한껏 보내고서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향하는 그녀.

 

“이힛!”

 

그녀는 입을 가린 채 기성에 가까운 특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오유하세요?”

 

나는 순간 놀라 눈만 껌뻑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오유하세요?”

 

나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네.”

“아- 그래서 ‘안생겨요’ 아시는구나-”

 

“네!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과 만났으니까요!”

라고 유쾌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유 시작한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지도 어느덧 4년째.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회원가입을 했으니 오유 가입일자는 내 솔로 역사 시작일자이니 내 안에서 안생긴다는 말이 점점 신뢰를 얻어가고 있었다.

잠깐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

 

“이거 베오베 감인데요?”

“네?”

 

이 멍청한 놈아. 대답이 ‘네’ 밖에 없냐. 라고 스스로를 마구 질타할 무렵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차는 다 끊기고 집에 가는 버스 딱 1대 남았는데 기다리다 첫 눈을 맞은 두 사람이 오유인이라는게... 신기하지 않아요?”

 

-여자는 운명에 약하다.

 

오유에서 볼 때마다 언젠가 여자친구 생기면 써먹어야지 하고 스크랩했던 수많은 이론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지나가는 생각들, 드립들, 수많은 메달들을 받아서 푸른색으로 스스로를 뽐내며 내 맘속에 콱 박혀있는 ‘착한 남자가 아니라 그냥 매력없는 남자’라고 했던 리플까지.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야해.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저...”

 

그 순간 버스가 왔다.

 

내가 먼저 타서 “두 명이요” 라고 하면?

망상과 같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그녀와 나는 버스에 탔다. 문 뒤 2자리씩 있는 곳에 서로 다른 의자에.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종쳤다. 스스로를 한심해하던 찰나,

 

“저기요,”

“네?”

“아까 버스 오기 직전에 뭐라고 말씀하시려고 하셨던거 아니었어요?”

“아... 저...”

 

주머니 속의 손이 움찔. 병신아. 어디로 도망치려고. 용기없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주머니에서 꺼냈다.

 

“어... 마이쮸 드실래요?”

 

그녀를 향해서 내민 내 손 위에는 살짝 껍질을 까서 이미 두어개를 까먹은 딸기맛 마이쮸가 있었다.

 

“아... 에히힛!”

 

그녀는 나와 마이쮸를 번갈아보며 ‘아...’ 라는 소리를 내다 그 특이한 웃음소리로 웃었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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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첫눈이 내린 날로부터 2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뒤에서 이불을 돌돌 말아서 꼭 껴안고 자고 있는 아내에게 며칠 전에 들은 말에 의하자면, 당시 제 얼굴색은 그 날 먹은 딸기맛 마이쮸 색깔이랑 똑같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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