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컥'하는 성격 때문에 자주 사고를 치던 마리오 발로텔리(21, 맨체스터 시티)가 TV를 보다 '울컥'해서 뜻 깊은 선행을 했다.
'골닷컴 영국판'은 27일 '맨체스터 시티의 스트라이커 발로텔리가 수단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를 지었다'고 보도했다. '사고뭉치' 발로텔리가 아프리카의 남수단공화국에 기부를 하게 된 이유는 TV로 영화를 보다가 감동을 받아서다.
발로텔리가 본 영화는 <침묵의 군대(The Silent Army)>라는 독립 영화로, 콘 켈레이라는 남자의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한국에서는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켈레이는 현재 29세로, 아프리카 수단 태생이다.
수단은 수십 년에 걸쳐 내전의 아픔을 겪은 나라다.
오랫동안 수단을 지배했던 영국은 아랍계 주민들을 주로 정부 인사로 등용했고, 이는 자연스레 아랍계의 지배계층과 아프리카계의 피지배계층으로의 분리를 야기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면서 수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아랍계와 아프리카계의 갈등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결국 1955년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이 시작돼 1972년까지 계속되었고, 수단은 본래 정부기관이 위치하던 북부 수단과 아프리카계가 자리 잡은 남부 수단으로 쪼개졌다. 남부 수단에는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아프리카계는 '자치'가 아닌 '해방'을 원했고, 수단 인민해방군(SPLA)를 조직해 1983년 2차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은 2005년까지 계속됐고 누적 사상자는 200만명에 달했다.
북부 수단과 남부 수단은 국제기구들의 노력에 힘입어 2005년 1월 평화협정을 맺었고, 올해 7월 39년간의 내전을 끝내고 북수단과 남수단으로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남수단은 193번째(UN기준) 주권국가가 됐다.
켈레이는 이 같은 수단의 혼란스러운 역사가 낳은 희생자였다. 그는 4살 때 SPLA에 납치돼 제대로 뛰어다니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군인이 됐다.
총과 탄약, 폭탄과 시체 틈바구니에서 소년기를 보낸 그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그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도 공부에 매달려 네덜란드에서 법학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했다.
끔찍한 과거를 잊고 유럽에서 새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믿기지 않게 그는 피비린내 나는 고국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남부 수단의 해방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아내와 함께 <침묵의 군대>를 만들어 전 세계에 수단의 비극을 소개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부모가 아프리카 가나 출신인 발로텔리는 <침묵의 군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수소문 끝에 켈레이와 접촉하는 데에 성공했다. 켈레이는 독립에 성공한 남수단공화국에 중학교를 짓고자 노력하고 있었고, 때마침 이를 알게 된 발로텔리는 중학교 건립에 드는 모든 비용을 전액 지원했다. 학교는 발로텔리의 이름을 따 '발로텔리의 날개(Mario Balotelli Wing)'라고 명명됐다.
발로텔리는 "켈레이는 그 어린 나이에 총을 쏘도록 강요당했다"며 "총은 그의 몸집보다 훨씬 컸고 너무나 무거워서 제대로 들 수도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러나 켈레이는 도망쳐 살아 남았다. 그는 새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돕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평소 사고만 치던 발로텔리가 뜻깊은 선행을 했다는 소식에 네티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축구전문사이트를 찾은 네티즌들은 "충동적인 성격이 이럴 때는 좋다", "나쁜 게 아니라 철이 안 들어서 그렇지 심성은 착하다", "아무리 사고를 쳐도 이런 모습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다" 등의 의견을 남기며 발로텔리의 선행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3줄요약-
발로텔리가 집에서 티비를 봄
수단을 내전으로하는 영화를 보다가 울컥함
아프리카에 학교만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