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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기쟁이는 우리 아버지
게시물ID : lovestory_184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은백
추천 : 27
조회수 : 76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5/09/10 14:08:02
밑에 [막노동하시는분들 깔보는 사람들에게]라는 글을 쓰신 '수빈'님의 글을 보고 아버지가 생각나 쓰는 글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남들이 얘기 하듯이 '뺑기쟁이'입니다.
 막노동이네, 뺑기쟁이네, 노가다네 하는 말을 많이 듣죠.

 하지만 아버진 술한잔 입에 털어 넣으시며
 "예술인이야 나는.."
 이라고 하십니다.

 어머니는 날 낳으실때 임신중독으로
 세상을 뜨시고, 흑백 사진 한장 남겨 놓으셨죠.

 덕분에 방황하시던 아버지는 마침내 방황을 마치고
 예술인(뺑기쟁이)의 길에
 들어서게 되셨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페인트가 잔뜩묻는 아버지의 작업복이
빨래줄에 걸려 있는 풍경은 참 정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5살때 아버지는 혼자사시는 것이 많이 외로웠답니다.
 밤이 되면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어린 나의 가슴을
 토닥대어 주시다가 내가 잠이 들면
 간단한 외출복을 챙겨 입으시고 동네 포장마차를 가십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 1병을 종이컵에 2잔 연거푸 마시고 
 집에 와서 내가 자는 것을 확인한 후 잠이 드신다고 합니다.
 술이 없이 하룻 밤을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내 기억에도 아버지께서 어린 나를 보고 흐니끼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잠이 깨어 아버지 품에 안겨서 울던 기억이 많이 나네요.
 그때 아버지의 손엔 돌아가신 어머니의 흑백사진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5-6학년때는 페인트 칠을 하시는 아버지가 챙피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또 어떨때는
 아버지가 페인트 지워지지 않은 손으로 1000원을 쥐어 주시며
 소고기를 사오라는 날에는 정육점 가기가 챙피해서
 얼굴 빨게져 사오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정육점 문을 열고 나오면
 이네 소고기 먹는다는 기쁨에 집까지 한달음에 뛰어오곤 했죠.

 전쟁 고아로 고아원에서 자란 아버지는
 6살때 나를 보육원에 맡겨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서야 
 집으로 나를 데리고 오셨죠.

 보육원에서 친구들이 외국으로 입양 되어 갈때
 어린 나는 '총무님'을 찾아가서
 "총무님, 저는 아버지가 찾으러 오신다고 했어요. 전 절대로 외국 보네지 마세요"
 라고 말씀드린 기억도 납니다.

 보육원에 있다가 친구들이
 "야! 니네 아버지 오셨다"
 이 소리에 보육원 언덕까지 가보면
 저 멀리 꼬불 꼬불한 뱀길 끝에 서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꽤 먼거리였지만, 어린 나는 한달음에 달려 갑니다.
 달려 가면서 눈물이 조금씩 나오고
 눈앞의 화면이 묽게흐려지면서 흘들리면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되네이던 그 한마디.
 "아~~~~~빠~~~~!"
 라고 소리쳤고, 이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맙니다.
 
 하룻 동안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보내면 어린 나는
 다음에 다시 온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굳게 받아내고
 보육원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랑 헤어질때는 울지 않았습니다.
 날 다시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2학년 2학기에 4년간의 보육원 생활을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뺑기쟁이 우리 아버지는 절 끔찍히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사춘기가 되어 자전거를 훔쳐 왔을 때는
 페인트 묻은 그 손으로 자전거에 새로운 색으로 락카를 뿌려 주셨습니다.
 물론 나는 훔친얘기는 하지 않고 주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가 잠든 사이 밖에서 술을 한잔 하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새로운 자전거가 생긴 나는 설레임에 잠도 못잤지만,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자는 척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내 곁에 오시더니
 "xx야 미안하다. 아버지가 자전거도 사주지 못하고, 너에게 몹쓸짓을 했구나~"
 하시며 나를 부둥켜 안고 우셨습니다.

 나는 눈물이 났지만 울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눈물이 내 볼에 떨어졌을 때, 그 눈물은 정말 뜨거웠습니다.

 다음날 난 자전거를 원래 위치에 갔다놓았고,
 나는 한달 후에 새 자전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눈물이 나게도 많이 맞았습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라며 다리가 피나기 직전까지 때리셨습니다.
 그리곤 멍든 다리에 연고를 발라 주시며,

 "사랑한다, 너 없었으면 난 이미 오래전에 자살했다.
 핏덩이 버려둘수 없어 이렇게 살고 있다. 넌 나처럼
 부모없이 버려둘수 없어서, 이렇게 아둥바둥 살고 있다.
 사랑한다. xx야. 아빠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이미 나의 코는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막혀있었고,
 힘든 호흡을 하며 아버지에게

 "사랑해요.. 아버지~"

 라고 뱉고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하염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결혼 예물로 가져온 화장대 위에서 10년전 그 흑백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계셨고, 아버지 등뒤에 그 사진을 보면서
 오랫동안 부르고 싶던 '엄마'를 마음속으로 되뇌이면
 눈물은 또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우리 가족에겐 또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심부전증'이라는 병이 아버지에게 찾아온것입니다.

 덕분에 잘살지도 못하던 우리 가정은 더욱 더 어려운 환경에 쳐해지고
 조금만 일해도 숨이 차오던 아버지는 교육을 위해서
 병마와 싸워가면서 뺑기쟁이를 하셨습니다.

 나 역시 방학 때만 되면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죠.
 신문, 우유, 실로폰 공장, 커피숍, 전단지, 편의점, 뺑기질...

 고등학교까지는 우리 부자는 어두운 그늘에서 살아야 했지만..
 뺑기쟁이 아버지는 나의 교육을 위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일하시다가 병원에 입원하시기를 수차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돈으로 대학 입학금을 벌었고,
 대학교 1학년때 드디어 예비교사들과 그동안 내가 모은 돈으로
 신장 이식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신장이었구요. 
 이제는 건강을 되찾으셔 잘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 교사가 되었고, 지금도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교사야~"
 하시며, 항상 공중도덕을 아주 잘지키십니다.
 가끔 내가 쑥쓰럽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아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만 하라고 해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으십니다.

 재작년에 내가 결혼할때는 아마 아들 장가보내고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신 아버지로 기억될겁니다.
 결혼식 내내 눈이 씨뻘것게 되셨으니까요.
 
 결혼식 가족 사진에 아버지랑 나랑 둘이 딸랑 찍으려는데
 많이 뻘쭘해 보였는지
 내 친구들이랑 우리학교 선생님들이 가족사진에 우루루 오셔서
  "xx야~ 삼촌왔다~"
 하면서 찍어줘서 기쁨이 더 커졌습니다.

 이제 올해 10월 19일 우리가족사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곽씨 일가의 3대째 자손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제 딸이죠~ ^^;;
 우리 뺑기쟁이 아버지는 요즘 얼굴이 환해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함께 했던 아버지의 페인트 묻은 손은
 항상 나를 이끌어 주던 빛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예술인입니다. ^^;;

 -PS- 아, 참! 우리 아버지가 요즈음은 영화사에 무대미술일용직으로 일하십니다.
 친구, 똥개 등등 여러영화의 무대 미술에 마무리 작업을 맡으셨고, 지금도 맡고 계시죠.
 30년 넘은 뺑기기술이 극한에 이르러서요. 미세한 컬러 조정이 일품이라나 뭐라나~ ^^;;
 시간나면 영화 안보신분 한번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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